설교영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2 (율법의 짐)

믿음찬교회 0 365 2021.06.28 16:08
수고하고 무거운 짐 2 (율법의 짐)
마 11:28~30
2021.06.27.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둘째는 당시 유대 백성들의 율법의 무거운 짐입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 위에 있던 무거운 짐을 크게 4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첫째는 가난, 둘째는 질병, 셋째는 율법, 넷째는 악한 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난과 질병은 인생의 무거운 짐에 해당하죠. 그다음으로 힘든 것은 바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율법이 지배하고 있던 매우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사회 규범이 율법이고, 개인 규범도 율법이었습니다. 신앙도 율법이고, 법도 율법이고, 좋고 나쁜 기준이 율법이고, 살아가는 모든 일이 다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율법이 하나님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율법과 율법주의자들이 막고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총도 율법과 율법주의자들이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는 율법과 종교는 있지만 정작 하나님은 없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악한 영과 귀신이 날뛰었습니다. 본래 그 존재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밝을 때 활동할 수 없죠. 우리를 속이거나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하나님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는 어두운 골짜기 짐승 천지가 되는 것처럼 악한 영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당시 유대 사회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율법의 어둡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유대 백성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좋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진 유대 백성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와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율법이란 아시다시피 처음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이었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노예 생활을 하던 노예였습니다. 법도 없고, 규율도 없고, 체계도 없고, 민족적 정체성도 없고, 자긍심도 없고... 그저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희미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속에 높은 규범과 의식을 가진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와 신앙을 지탱하는 중요한 두 기둥이 됩니다. 율법과 성전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내려주신 거룩한 자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한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망할 때 성전이 불태워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겐 오직 율법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중요성이 매우 커지게 되었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오직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일이었죠. 구약성경이 완성되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결과만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신봉은 소위 율법주의, 혹은 율법지상주의를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랍비들은 모세 율법의 철저한 실천과 준수를 위해 그 해석과 세부적인 지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안식일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금지행위 39가지를 만드는 것이죠. 씨를 뿌리는 것도 안 되고, 물 주는 것도 안 되고, 추수도 안 되고, 탈곡도 안 되고, 글자 두 자 이상 쓰기도 안 되고, 그림 그리기도 안 되고, 불 피우기도 안 되고, 불 끄기도 안 되고, 바느질도 안 되고, 망치질도 안 되고, 물건 옮기는 것도 안 되고...  이런 내용을 39가지나 만들고 그 하나하나에 세부 설명을 달았습니다. 
나아가 모세 율법이 말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하는 구전 율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떡 먹을 때나 집에 들어갈 때 손 씻는 방법, 고르반이라고 하는 하나님께 바치는 규정, 특정 절기(하누카) 동안 성전의 등잔대에 촛불 켜는 방법(전부 켰다가 하나씩 줄이느냐, 하나부터 켜서 마지막 날 전부 켜느냐), 각종 기도와 구제와 금식 전통들... 그렇게 그들은 삶과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율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랍비들은 ‘할라카’라고 하는 모세오경에 대한 해석과 세부 지침을 만들고, 거기에 ‘학가다’라고 하는 랍비들의 교훈과 잠언과 전설과 이야기를 보태고...또  ‘미쉬나’라고 하는 구전 율법(장로들의 유전)을 만들고, 또 ‘게마라’라고 하는 그 구전 율법에 대한 해석을 만들고...  이렇게 할라카, 학가다, 미쉬나, 게마라를 만들었습니다.
모세오경 관련 할라카와 학가다를 합쳐서 미드라쉬라고 하고, 구전율법 관련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쳐서 탈무드라고 합니다. 이 양이 엄청나죠. 탈무드만 하더라도, 총 20권 전체 1만2천 페이지에 달합니다.

이런 율법과 불문율이 유대 사회를 움직이고 있었고, 그래서 가난한 유대 백성들은 율법의 각종 규례 아래 숨을 쉬기 어려웠습니다. 몇 개라도 어기거나, 혹 가난해서 절기를 지키지 못하거나 예물을 드리지 못하면, 율법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사람을 불경건한 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문자를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 지도자들이 말하는 대로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싫어하시고 자신들을 거부하시고 자신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 안에는 죄의식과 좌절감과 영적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귀신과 악한 영들이 공격했습니다. 그때 그 어느 시대보다 귀신들림과 귀신들림으로 인한 질병이 많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백성들의 바로 그런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고 수고했지만, 하나님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우리 영혼이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죠.
비록 삶이 힘들어도, 우리 몸이 휴식을 취하고 마음에 소망이 있고, 영혼이 숨을 쉰다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적절히 쉬시고, 소망과 기대를 품으시고,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쉼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 영혼을 위한 쉼을 발견하리니” 네, 원문의 표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상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을 찾는 생명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없다면 고단한 삶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진 유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개혁해야 했습니다. 힘든 백성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고, 축복해 주고, 기도해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개혁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들에게 주신 모세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고, 동시에 서기관과 랍비들이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만든 불필요한 유사 율법들을 청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사람이 주렁주렁 달아놓은 모든 것들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제단을 깨끗이 회복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본래 모세 율법에 금식 규정은 1년에 한 번이었습니다. 대속죄일에 전 백성이 한 번 금식했죠. 그런데 그들이 나라를 잃고 민족적 애도의 의미로 4월과 5월과 7월과 10월에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시대에 부림절이 만들어지면서 또 한 번의 금식일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 당시 유대 백성들은 1년 총 6번의 금식전통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또 금식했습니다.
물론 금식에 다 이유가 있고 좋은 의미이긴 하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많은 금식은 또 하나의 무거운 율법의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금식하신 것 외에, 제자들에게 금식을 가르치거나 사역의 일환으로 금식을 하시거나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그 무거운 율법의 짐을 벗겨주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나의 새로운 율법, 곧 과도하지 않고 형식적이지 않고 모세 율법에 충실한 나의 새로운 율법으로 멍에를 만들어 주고, 그리고 그런 새로운 올바른 율법에 의해 만들어진 가벼운 짐, 즉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실천과 의무를 갖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율법의 개혁입니다. 모세의 본질적인 율법으로 돌아가는, 예수님의 율법 개혁이자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개혁하시고 또 성전의 종말을 예언하시고, 자신의 죽음으로 성전의 그 두꺼운 휘장을 찢으시고, 그렇게 새롭게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가장 본질적인 신앙이 살아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된 낡은 인간적인 율법을 버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올바른 하나님의 뜻이 살아있는 영적인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다면,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네, 간단합니다. 그때의 율법처럼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앙 안에 우리를 무겁게 하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잘못된 의무나 규정이나 관행 같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멍에 위에 올바른 가벼운 짐을 지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생각하면 항상 교회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닌 교회가 좋았습니다. 작은 교회였는데 간간이 목사님이 바뀌어서 새 목사님이 오시긴 했지만, 성도님들은 다 아는 분들이고 교회 가는 것이 항상 따뜻하고 편안했습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 같은 경우에는 어른들은 안에서 예배드릴 때, 저는 밖에서 친구하고 놀았죠. 그때는 교회들이 다 비슷비슷하고 좀 큰 교회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교회를 다니는데 무슨 무거운 짐이 있다거나 부담이 있다거나... 그런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 형편대로 헌금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죠. 목사님들도 예배 외에 어떤 프로그램이나 별도의 사역을 하시거나 훈련하시거나 그런 것이 많이 없고, 예배 인도하시고 설교 준비 하시고 가끔 심방하시고 바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청년이 된 80년대 말과 90년대가 되면서 우리나라의 교회 환경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성장하는 교회가 나오고, 교회 안에 무슨 훈련 프로그램 같은 것이 생기고, 예배 외에 사역이나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좀 새로운 유형의 목사님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예배나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교회를 운영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목사님들의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또 그때 교회마다 건축을 많이 했습니다.
건축을 하면서 큰 교회들이 많이 생기고, 그런 교회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교회 규모가 커지니 목사님들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소박하고 수수했던 목사님들보다는 화려하고 멋지고 비전을 제시하는 카리스마적인 목사님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교회도 커지고 목사님들도 커지고... 그래서 교회가 우리 신앙에 어떤 묘한 중심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교회주의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자들에게도 여러모로 부담을 많이 주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헌금을 비롯하여 건축헌금을 강조하고, 교회에 헌신하고 충성 봉사하는 것을 강조하고, 훈련이나 프로그램 참여 같은 것을 강조했습니다. 신자들의 개인 삶보다 교회의 활동이 중요하고 신앙생활이 하나님 중심보다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는 것이죠. 설교를 들어도 거기에 하나님 말씀보다는 목회자의 생각과 말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느낌이 잘 안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를 잠시 돌아보면, 교회는 성장하고 발전했지만, 동시에 교회주의가 만들어지고 신자들에게 많은 짐과 부담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교회가 예수님 시대의 성전당국이나 중세교회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간혹 어떤 목회자들을 보면, 신자들을 인위적으로 교회 일에 충성 봉사하게 하고 헌신하게 하고 헌금 많이 하게 하는 것을 ‘목회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걸 잘하는 목사가 유능한 목사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 분들은 교회를 건축해도 무리하게 건축합니다. 물론 간혹 잘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축 재정의 10~20%만 가지고 시작했는데, 건축을 어쨌든 마치고, 건축을 마치자마자 사람들이 많이 와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신도시 같은 경우엔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잘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어떤 부담을 줄지 잘 계산해야 합니다. 그런 계산 없이 무조건 비전만 외치고 사명만 외치는 목회자라면, 그는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의 종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교회로부터 받는 짐은 크게 3가지이죠. 헌금, 교회 봉사, 훈련. 제가 볼 때 우리 교회는 이런 점에서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헌금을 무리하게 하시는 분은 안 계시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씀과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오해해서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시죠? 여러분의 형편과 사정에 알맞게 하나님께 감사의 헌금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봉사가 너무 많은 교회가 있기도 합니다. 예전에 제가 직장생활 하던 청년 때 그랬습니다. 주일이 되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생회 교사에 찬양대에 청년회 임원에... 교회에서 점심 저녁을 다 먹고 하루 온종일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유일하게 오후 4~6시에 시간이 비어서 그때 혼자 차에 가서 잤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중에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한 후에 주일 예배를 오전 한 번만 드렸습니다. 예배 후에는 같이 식사를 하고 이야기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니 저도 부담이 되지 않고 쉼과 회복이라는 주일의 의미를 살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코로나가 잦아들면 우리 교회도 그렇게 주일 점심을 함께 나누고 오후 모임을 가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모임과 수고와 봉사를 적절하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간혹 어떤 교회는 유달리 훈련과 교육이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새신자 과정에서부터 제자 과정, 중직자 과정, 군사 과정... 그런 과정을 다 거쳐야만 좋은 교인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기도 했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훈련과 교육의 한계를 알게 되면서 점점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훈련과 교육은 일꾼을 세우는데 필요한 도구이긴 합니다. 교회를 잘 세워나가기 위해선 그것이 필요하죠.
그런데 훈련과 교육은 신앙을 만들지 못하고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사랑과 자유 속에 성장하게 하기보다는, 훈련하는 자의 목적과 의도로 인위적으로 성장시킨다는 점에서 순수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마치 사람을 좁은 틀 안에서 키우는 것 같다고 할까요.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필요한 훈련과 교육을 하되, 그것을 주된 목회의 도구로 삼거나, 신자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훈련과 교육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말해주는 목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저는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원고 설교를 하고, 그래서 설교가 성경공부도 되고, 교육도 되고, 은혜도 되고, 영적인 양식도 되는... 그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 설교를 잘 들어주시길 부탁드리고, 우리가 그렇게 말씀을 들으며 모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세우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과 기도의 영적인 모임이 되고 사랑과 은혜의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불필요한 짐을 신자들에게 지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로 오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은 주님이 주신 좋은 멍에를 메고 가벼운 짐을 지고 하나님을 믿으시길... 그리고 그런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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