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믿음찬교회 0 31 06.14 12:49
주일설교(2021.06.13)
마태복음 40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마 11:16~27
2021.06.13.

오늘 말씀을 11:16부터 읽었지만, 오늘 본문은 11장 전체입니다. 11장 전체를 본문으로 삼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11장 전체를 정리하면 대략 다음 5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질문,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 장터의 아이들 비유, 고라신과 벳새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예수님의 기도와 말씀
이런 5가지 내용이 조금 어수선하게 11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11장 안에는 우리가 의문을 가질만한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들도 들어있습니다.
1)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질문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의심인가, 불신인가, 아니면 재확인인가?
2)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왜 자신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대답해주시지 않으셨는가?
3)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4)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또 무슨 뜻인가?
5)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이 말씀은 누가복음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인가?, 다른 의미인가?
6)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라는 말씀은 맞는 말씀인가?

네, 우리가 11장 말씀을 읽어나갈 때 이런 의문들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 같은 이 내용에 대해서, 비록 설교시간이지만, 간단히 알아보고 지나가는 게 좋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런 내용을 잠깐이라도 알아보는 것이 혹 성경에 대한 오해를 막고 또 이것을 잘못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했는가 하는 것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황상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느끼기에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이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 있죠.
  그러나 요한복음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집니다. 요한복음에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부분이 없고,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줄 때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요한복음을 고려하면 세례요한의 이 질문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닌, 재확인 정도의 성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혹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이런 질문을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세례요한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가 어떤 영적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 세계와 다른 영적인 일을 명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기도의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분명히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례요한보다 나은 인물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일과 영적인 일에 대해 겸손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 조금 더 말씀드리면,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기독교에는 신앙과 미신이 섞여 있는 모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말씀을 읽지도 않고 잘 모른 채,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건 무당이죠. 양복 입은 무당 노릇을 하는 사역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어떤 감동을 받고 확신을 받는 것은 정당한 것이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소위 내가 하나님과 통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어떤 사람의 앞길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세례요한마저 그의 마음에 이런 불확실한 부분이 있었다면, 우리는 영적인 일에 더욱 겸손하고 조심하는 것이 맞습니다. 
2)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왜 직접적으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조금만 생각하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직접적으로 시인하셨다고 해서 의문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의문이 또 들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언급하시면서, 그 성취를 통해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말씀하시고, 동시에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시고, 또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세례요한을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이 아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세례요한은 일반 선지자와 달리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특별한 마지막 선지자였죠. 그리고 새 시대를 연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디까지나 율법과 구약의 인물이죠.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인물과 비교하면 구원의 질과 계시의 폭과 영적인 삶의 새로운 차원 등 모든 면에서 비교되지 않습니다. 수레를 타는 사람과 자동차를 타는 사람이 전혀 다른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세례요한에 대한 이런 상반된 말씀을 잘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한편, 예전에 어떤 이단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세례요한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못하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말했죠.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개인 세례요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죠. 그의 개인 구원문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위치하고 있는 공적인 세례요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가지고 그의 구원문제를 말할 수 없고, 또 그런 선지자와 순교자를 이 말씀 하나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이해와 상식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이단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기존신자들에게 의외의 성경적인 질문을 던져서 당황하게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게 하고, 결국 자신들의 모임으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이른바 미끼 질문이죠. 그 이단은 그런 미끼 질문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는 말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예언과 성취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누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구약 시대는 예언의 시대이고, 예수님 이후 신약시대는 그 예언의 성취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지금 예수님은 예언과 성취라는 두 의미로 역사와 시대를 구분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모르시고 뭔가 부정확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4)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말씀은 천국이 폭력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이 말씀하는 내용, 즉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간다는 말씀과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왜 이렇게 두 성경이 비슷한 말씀을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는지 그 전승 과정을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그 두 말씀을 별개로 해석하면 큰 문제가 없게 됩니다.
네, 오늘 본문에 있는 성경적 신학적 설명이 필요한 내용에 대해선 이렇게 말씀드리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고 넘어가는 이유는 오늘 마태복음 11장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1장은 이 말씀을 읽는 이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요?
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조금 높이 올라가서 마태복음 전체의 흐름 안에서 이 11장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산과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쪽 전체 모습이 잘 보이죠. 저기 강이 흐르고 여기 마을과 논밭이 있고 또 저기 숲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을 조금 높은 위치에서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4장 중반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죠. 그리고 5~7장에 제자의 삶에 대한 산상수훈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8~9장에서 예수님의 사역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장에 제자 파송과 파송 말씀이 있었죠.
그러니까 지금 마태는 예수님 공생애 이후 겨우 3가지 내용만 말했을 뿐입니다.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도 설교, 그리고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파송과 파송 설교...
그리고 이제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다음의 중요한 내용은 13장의 천국 비유입니다. 13장의 천국 비유는 마태복음의 한 가운데 있는 중요한 내용이죠. 마태복음 전체는 교차대구법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한 가운데 있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지금 11장과 12장 말씀은 그런 중요한 13장의 천국 비유를 앞에 두고 말하는 예비적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11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 한마디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한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 한마디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적대적인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11장에서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말하고, 12장에서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적대감을 말한 후에, 13장에서 씨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 등 천국 비유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와 같은 마태복음의 흐름 안에서 11장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죠?
따라서 이 11장이 보여주려는 것은 세례요한이 왔고, 예수님이 왔지만... 거기에 관심도 없고 반응도 없고 회개도 없고 이해도 없는 사람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세례요한의 모습도 그런 사람들 모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저분이 메시야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은 예수님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장터의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것은 장터의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아이들이 잔칫집 놀이를 합니다. 흥겹게 피리를 불면 거기에 맞추어서 춤을 추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피리를 불지만, 다른 아이들이 아무런 반응을 안 하는 겁니다. 그러자 이번엔 상갓집 놀이를 합니다. 한 아이가 슬피 울면 거기에 맞추어서 다른 아이들이 가슴을 치며 애곡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이 세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잔칫집 놀이를 하자고 한 아이는 예수님을 상징하죠.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같이 음식을 먹고 식사를 했습니다. 상갓집 놀이를 하자고 한 아이는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금식을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심판을 선포했죠.
그런데 당시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이건 세례요한이건 아무런 반응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누구를 보내시든... 그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유대 백성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그 유대 백성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사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거리는 바로 지금 우리들의 관심거리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바쁘게 살아가는 것에 제일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데 돈이 제일 중요하니... 돈에 가장 관심이 많죠. 정치도 중요하니...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과 관계와 인맥이 중요하니... 그런 관계 맺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죠. 건강도 중요하니... 건강에도 관심이 많고 맛있는 음식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또 미용이나 패션이나 스타일이나... 그런 것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든지, 사람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역사라든지, 삶의 의미라든지, 참과 진실이라든지... 그런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가는 것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거나 삶의 이유를 묻기 보다는, 사는 게 목적이고 잘 사는 게 목적입니다. 지금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 사는 세상에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될까요?
사람이 최소한 문학이나 예술이나 역사나 철학과 같은 진지한 것에 관심이 많은 시대에는 전도가 잘 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나마 찾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보다 위에 있는 종교를 추구하고 신앙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장터의 아이들 비유는 이와 같은 세상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모두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들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가버나움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거기서 권능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귀신들이 축출되고 병자들이 고침을 많이 받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별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보여주셨죠. 그런데 권능을 보여도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말씀만으로 믿기 어려우니 보여주신 것인데, 보여주어도 믿지 않으면 더 이상의 방법은 없죠.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을 책망하신 후 예수님은 매우 의미심장한 기도를 드리십니다. 25~26절의 이 기도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네, 이 기도는 누군가에게는 숨기시고, 누군가에게는 알게 하시고...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도에 이어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예수님의 기도와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에 반응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고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이적에 무관심한 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라는 설명입니다. 어떤 영적인 문제인가... 네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는 문제입니다. 계시 상실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에게 임하는 계시가 없기 때문에 또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보여야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 보이니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기에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계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임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임하지 않는 문제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예정인가? 아니면 우리의 반응과 결단도 개입되는 문제인가?... 그것은 개인 예정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체적 예정인가?...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한다면,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언지 모르는, 우리가 그분을 찾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넘어 구원을 바라는 영적인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때 갈릴리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는 최소한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실 때, 그 놀라운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을 깨닫는 마음도 우리가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마태복음 11장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11장 말씀은 사람들의 무관심을 말하고, 그 무관심을 그들의 책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강제로 구원하시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적 역사는 인간의 반응과 결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듣고 반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면, 반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에 반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그분 앞으로 결단하여 나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가는 우리의 최선... 그 두 가지가 어우러질 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말씀의 소리를 들으시고, 춤을 추시고 또 가슴을 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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