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21.06.06)

믿음찬교회 0 98 2021.06.07 15:30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 10:40~42
2021.06.06.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파송 설교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이 마지막 내용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따뜻한 말씀입니다. 파송되는 제자들을 자신의 대표자로 말씀하시고, 또 어려운 길을 가는 제자들을 환대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겐 상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죠. 그리고 제자들을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한편으론 파송되는 제자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런 제자들을 돌보고 환대하는 제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두 개의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의 두 개의 초점 중에서 한 초점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바로 제자들을 환대하고 돕는 제자의 입장에서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과 축복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의인을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제자를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선지자의 이름으로’ 라는 부분을 원어로 찾아보면 ‘에이스 오노마 프로페투’인데, ‘에이스’는 영어로 ‘into’ 즉 ‘~안으로’ 라는 뜻이고, ‘오노마’는 이름을, ‘프로페투’는 선지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이스 오노마 프로페투’를 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의 이름 안으로’가 됩니다. 네, 무슨 말인지 알기가 좀 어렵죠.
이럴 때는 영어성경을 찾아보면 도움이 됩니다. 많은 영어성경은 ‘선지자의 이름 안에서’라고 번역하고 있고, 일부는 ‘선지자로서’, ‘선지자이기 때문에’라고 좀 더 풀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대략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 사람을 환영하고 영접할 만한 인간적인 이유가 없어도, 예를 들어 초라하고 볼품없고 지위가 없어도, 그 사람이 선지자이니까 영접하고 또 그 사람을 선지자로서 인정하고 영접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그렇게 선지자를 영접하고, 의인을 영접하고, 파송 받은 제자를 영접하길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1세기 초대교회는 당시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순회교사들을 잘 영접했습니다. 그분들을 후원하고 숙소를 제공하고 가실 때는 전송하기도 했죠. 물론 그것을 이용하는 거짓된 자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대접을 당연히 여기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신자들 위에 함부로 군림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바울이 그런 거짓 사도를 영접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일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잘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오늘날에도 선지자와 의인과 제자들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누가 선지자이고, 누가 의인이고, 누가 파송된 제자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들은 우선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을 꼽을 수 있겠죠. 목사님들의 경우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대체로 잘 대우해 드리고 있습니다. 한편 선교사님들은 멀리 계시고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에 좀 더 교회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드려야 합니다.
그분들이 현지에서 사역과 삶을 잘 이루어가실 수 있도록 돕는다면, 우리는 선교사의 상을 함께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님들에 대해서 계속 관심과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목사님과 선교님에 대해서는 그분들을 잘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체로 모든 교회와 신자들이 잘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목사님과 선교사님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오늘날의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영접해야 할 이분들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선지자나 의인이나 제자는 누구일까요?
물론 오늘날에는 우리가 영접해야 할 선지자나 사도들은 따로 없습니다. 그런 역할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 교회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간혹 오늘날에도 사도나 선지자를 주장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일각에서 있긴 하지만, 그런 가르침이나 주장들은 올바르지 않고 건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영접해야 할 선지자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영접해야 할 의인이나 제자는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그분들은 누구일까요?
네, 바로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 이웃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수고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모든 분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곧은 길을 가며 고난받고 불이익을 받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비록 힘들어도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자입니다.
목사와 선교사를 떠나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려움 가운데 이렇게 살아가고 수고하는 분들은, 우리가 영접해야 할 의인과 제자입니다.

먼저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의인과 제자로 알아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인과 제자의 힘든 길을 걷는 사람을 알아준다면, 그보다 큰 격려가 없죠. 그래서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분들을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그런 사람들을 알아주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정의와 복음과 평화의 나라이죠. 사랑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누군가가 애쓰고 수고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그런 분들을 귀하게 알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에서, 또 우리 사회의 중요한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 또 의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분들을 귀하게 생각하고 영접한다면,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삶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고 항상 소망 가운데 꿋꿋이 살아갑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 자체가 훌륭한 제자의 모습이고, 최고의 제자의 모습이죠.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이 있다면, 훌륭한 제자의 삶을 사는 그런 분을 알아주고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회 속에서 직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자신의 일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에 동조하지 않고 옳은 말을 하고,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힘쓰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일을 처리합니다. 세상 속에서 지위가 높을수록 그런 삶이 쉽지 않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쉽지만, 올바른 길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이 있다면 또 우리 사회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의 상을 함께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을 폭넓게 이해하는 가운데 그런 분들을 영접하고 대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로서의 우리 의무 중 하나이죠. 그런 사람들을 알아주고 영접하라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과 주위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로서 훌륭한 삶을 사는 분이 있다면, 따뜻한 말 한 마디나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말 한마디나 냉수 한 그릇이라도 말이죠.
예전에 저는 선교단체 간사를 했는데, 매월 후원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를 알아주시고 후원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셨죠.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 갚아주시고 복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길 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때 그렇게 후원이 잘 안 되어 걱정과 근심 많던 어느 날, 저는 감기로 집 앞 작은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파서인지 그날따라 더 초라한 마음으로 병원에 들어가는데, 마침 나오던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유리문을 자기 쪽으로 당겨 열어주면서 저를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제가 고맙다고 말하며 들어갔죠. 그런데 얼마나 고맙던지... 그 작은 행동이 그때 소심하고 위축된 제게 큰 대접이 되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지금 군에 가 있는 저희 첫째 우주가 어릴 때, 치아교정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래 치아를 잡아주는 작은 철사를 치아에 넣어 고정시켰습니다. 그때 그 비용이 한 20만원 정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주가 한 달도 안 돼서 그 철사를 끊어먹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참 죄송하게도 저는 그때 돈부터 생각했죠. 또 20만원이 드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
착찹한 마음으로 우주를 데리고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담당 의사가 무척 젊은 분인데 살펴보더니,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신 지 얼마 안 되어서 따로 비용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얼마나 마음이 밝아지는지...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니 더 고마웠습니다. 제가 그 순간 체면을 잃고 ‘아이고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뻔 했습니다.
제가 지금 조금 창피한 제 이야기를 드린 것은 냉수 한 그릇 같은 작은 것이 얼마나 큰 건지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렇게 의인과 제자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신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기억하고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복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잘 알려진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 감을 수 있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대체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내게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시를 지은 함석헌 선생은 지인과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못 가졌다 했지만, 그 사람은 사실은 어디서 찾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제가 남에게 그 사람 노릇을 해주려 애써서만 만날 수 있는 것 아니오?”
네, 그분은 이 시를 그런 마음으로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시를 볼 때마다 나 자신이 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으로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저는 이 시에 나오는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군가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믿을 수 있고 또 나를 믿어주는 그 사람은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냉수 한 그릇을 내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려운 길을 가는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그렇게 실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그 냉수 한 그릇을 하나님이 꼭 기억하시고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은 먼 훗날 미래의 상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는 동안의 현재의 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9:27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여러 배를 받고...’ 마가복음에도 동일한 말씀이 있죠. 그런데 거기엔 ‘백 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그러므로 우리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는 동안에 갚아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리고 갚지 않을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작은 것 하나라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였다면, 하늘의 보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상과 하늘의 보상... 그런 말씀을 사도바울도 많이 하셨지만, 복음서 중에는 마태복음이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유달리 마태복음이 상을 많이 이야기할까요? 아마도 그때가 그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편,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기억을 의미하는 굉장히 강한 상징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거기에 기록하시고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한때 우리의 믿음과 수고에 따른 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상을 받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건전한 것이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은혜만 바라고 복을 원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언가 고생하고 희생하고 수고하신 분들에게 상에 대한 기대나 마음을 갖는 것조차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야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날에 온전히 받겠지만, 우리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꼭 갚아주실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시고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애쓰는데 누가 알아주겠나...’ 그런 마음 갖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천지 간에 내 사정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런 말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말들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은 알아주신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우리의 이기적인 삶을 바꾸어 주는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께서는 먼저 의인과 제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아가 그런 분들을 알아주고 영접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고마운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복과 상이 풍성할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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