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십자가를 지고 (21.05.23)

믿음찬교회 0 96 2021.05.26 11:10
십자가를 지고
마 10:34~39
2021.05.23.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파송 설교를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파송 설교를 들으니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가 얼마나 좋았던지 알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우리에게 천국을 말씀해주시고,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 가르쳐주시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하시고, 또 구하면 주실 것이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그 아름답고 따뜻한 말씀과 너무나 다릅니다. 파송되는 제자들에게 어쩌면 그리도 차가운 현실을 말씀하시는지... 너희는 세상으로 가야 하는데, 거기서 너희는 잡히고 끌려가고 채찍질 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과 박해와 순교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마도 어떤 제자는 너무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나는 그저 예수님의 말씀이 좋고 구원받고 천국 가고 싶을 뿐인데, 왜 그런 험한 길을 걸어야 하는지...’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그런 사명과 숙명이 제자들 앞에 있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대개 우리는 나 중심적인 생각과 삶을 살기 때문에,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무척 낯설고 어색하고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왜 그런 길을 가야 하죠? 나는 예수님을 믿고 싶을 뿐인데 어째서 그런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살던 대로 자기 삶을 살고, 자기 시각으로 삶을 이해하고, 궁극적인 삶의 이유와 목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날이 기울고 밤이 되면 우리의 마지막이 찾아오겠죠.
그런 삶은 마치 하루살이의 하루 같고 메뚜기의 한철 같은 삶입니다. 우리가 하루살이를 보고 그 삶을 안타까워하죠. 우리가 메뚜기를 보고 그 삶을 안타까워합니다. 우리가 그 삶을 안타까워한다면, 그렇게 사는 우리의 삶도 당연히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우리도 짧은 삶을 살고 삶의 목적과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삶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영원한 삶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처럼 말이죠. 그는 어느 날 익숙한 자기 집과 마을을 떠나 힘든 천국으로의 순례 길에 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집과 마을에 그대로 살죠. 그러나 그 천로역정의 주인공은 자신의 집과 마을이 조만간 멸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힘든 길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길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한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운명과 부조리한 이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길과 제자의 갈을 가야 할 줄 믿습니다. 

힘든 예수님의 파송 설교는 이제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노라.”
여기서 말하는 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린 비슷한 말씀이 누가복음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12:49~51)
마태복음의 ‘검’과 누가복음의 ‘불’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싸움과 분쟁을 의미하죠. 우리가 제자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뜻이 부딪히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부딪칠 때, 마치 검의 불꽃이 튀듯이 싸움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검’과 ‘불’을 가지고 세상의 죄와 어둠과 거짓과 불의와 싸우며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세상의 죄와 어둠과 거짓과 불의와 싸우는 우리의 삶은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당연히 이 말씀은 사랑하는 가족의 의미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럴 경우에 결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지금보다 가족의 의미가 더 컸죠. 가족과 갈등하고 떠난다는 것은 당시로선 매우 감당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의 길은 그런 전통적인 가족 관계조차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특히 마가복음 3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온 제자들과 새로운 영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며...”(막3:13~14) 이어서 이렇게 제자들과 새로운 가족을 만드신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3~35) 

편안한 삶을 넘어, 죽음을 넘어, 가족을 넘어... 도대체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넘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 걸까요?
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를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시기에 이런 절대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일이 쉬울 수 있을까요?
그건 일반적이고 평범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걸 내려놓고 모든 걸 상대화시키고 비상하게 나아가야 하는 절대적인 일이죠.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이고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에 그런 절대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고 그 빛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죠.
예전 아마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갑사 가는 길’이라는 짧은 수필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수필이 인상적이어서, 작년 겨울에 갑사라는 절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계룡산에 가면 산 이편에 갑사가 있고 산 저편에 동학사가 있습니다. 그 수필은 눈이 내리는 겨울에 한 사람이 일행들과 함께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면서 쓴 내용인데, 그런데 사실 그 수필의 주요 내용은 그 길의 고개에 있는 남매탑에 관한 내용입니다. 거기에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두 개의 오래된 탑이 있는데, 그 탑에 얽힌 전설이 있죠. 그 전설은 한 여인과 한 승려에 대한 전설인데, 그 승려가 여인의 사랑을 뿌리치고 평생 남매 관계로 지내며 구도에 정진한다는 내용입니다.
불교도 구원의 종교이고, 그런 점에서 그 수필은 그 승려가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모습을 그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요즘의 정서는 그 수필을 읽고 ‘그럴 가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신앙과 종교의 깊은 자리에는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과 제자의 길은 우리의 가족이나 목숨을 넘어서는 더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검과 가족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드디어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라는 말이 마태복음 안에서 지금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의 파송 설교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십자가라는 말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오랜 시간 사용하고, 또 오랜 시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가 실제로 무엇인지 잊을 때가 많습니다. 제 뒤에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만, 실제 십자가는 아시다시피 잔인한 사형도구입니다. 그것은 주로 흉악한 범죄자나 특히 국가나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반역자나 정치범을 대상으로 극단적인 고통과 수치를 주기 위해 고안된 사형방법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반국가적이고 반체제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 참혹한 죽음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이렇게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롭고 평화롭게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수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을 통해, 진정한 신앙은 죽음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있으면서 이런 각오와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실제적인 의미를 넘어, 보다 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대주제이자 대원리라고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십자가의 도’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이냐... 네, 그것은 십자가의 길과 원리와 방법을 말하는데, 이 십자가의 길과 원리와 방법이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이 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고난, 희생, 헌신... 십자가는 그런 의미가 될 수 있겠죠. 고난을 견디고 희생을 무릎 쓰고 헌신을 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 대답은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견디고 희생을 무릎 쓰고 헌신하는 것이 어떻게 기독교만의 것이 되고, 그런 일반적인 원리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대주제와 대원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네, 한 마디로 십자가는 자기부정입니다. 자기부정은 자기 부인이고, 그 개념을 쉽게 말한다면 자기 마음의 왕좌에서 자기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16장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이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3~24)
사람은 자기를 부정하기 어렵죠. 자기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물론 그렇게 살아야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있죠. 그러나 우리 인간의 생활이 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든지, 예수님을 따른다든지’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신앙적으로 개념적으로 정립되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예수님을 믿어도 제대로 된 신앙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 개념이 정립되고 또한 그 실천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제대로 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자기부정에 대해 여러 번 그리고 여러 방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마18:0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자기를 낮추는 것)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물질과 소유에 대한 탐심을 버리는 것)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앞자리를 포기하는 것)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잘 계승한 사도바울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삶의 목적)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정과 욕심을 내려놓는 것) (정= 감정, 열정, 정욕 등)
이상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정을 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자기부인과 자기부정이 안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네, 그건 우리의 육이라고 하는 옛사람 즉 인간적인 자아가 살아있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자기주장을 하고 서로 다투고 분쟁을 일으키고 누군가를 지배하고 시기하고 경쟁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교회나 직장이나 가족이나 어느 곳에서 분란이나 문제의 원인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로 다투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경쟁하는 것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특성으로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물건을 사고 소비생활을 할 때에도,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돋보이는 많은 물건과 값비싼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높이는 그런 세상의 허영과 물질문화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자기부정이 무엇이고 그런 생활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이 주제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자기부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건 바로 성숙함입니다. 즉 자기부정은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넘어 다른 사람을 보고 역사를 보고 전체를 보고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숙함이라는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점검하면, 한국교회는 성숙하지 못한 목회자와 신자가 많습니다.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점은 교회가 복음의 초보만 반복해서 가르치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열심과 뜨거움은 있지만 성숙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사회의 지탄을 많이 받고 있죠. 그런데 우리 교회들은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핍박이나 박해나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와 신자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주된 이유는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건축을 하고 전도와 선교를 하고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할 때, 성숙하지 못한 실망스런 모습을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공관병 사건이 있었죠. 그 병사는 한 예수 믿는 장군의 공관병이었는데, 부당한 대우와 갑질을 당했다고 해서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 장군은 기독교인으로서 훌륭한 분이고, 특히 군복음화를 위해 오랫동안 애쓴 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건이 우리 기독교의 성숙함의 문제를 보여준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왜 성숙하지 못하는가? ... 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 자기부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 자기부정이 무엇인지... 충분히 생각하시고 고민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십자가를 지고”이죠. 이것은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박해이든 죽음이든 자기부정이든 여러분이 직접 그것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지시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대속의 십자가이죠.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고백하고 찬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부분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지고 나도 못 박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사도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예수님만이 지시는 대속의 십자가로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시고 또 그 마지막 자리까지 함께 하시는 분들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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