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
고전 1:4~9
2024.07.28.
오늘 본문은 인사말에 이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합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4절은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고린도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5절 이후 말씀합니다.
5절~7절은 감사의 이유가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씀합니다.
먼저 ‘너희가 그분 안에서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기본적인 자질과 특성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언변에 뛰어나고 지식에 뛰어난 것은 좋은 자질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이해하고 나눌 때 그것은 좋은 도구가 됩니다.
또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좋은 능력과 자질 속에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견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가 잘 성장하고 신자들의 신앙이 잘 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고린도교회는 3~4년밖에 안 된 교회였지만, 그들의 좋은 자질과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모든 은사를 부족함 없이 받았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지금 고린도교회는 은사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여기서 그런 내용을 말하지 않고, 먼저 칭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다가가는 사도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사도바울은 갑자기 종말론적인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갑자기 종말론적인 말씀을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어색합니다. 그러나 그때 사도와 신자들은 그날을 매우 가깝게 느꼈고, 종말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신앙도 종말론적이어야 합니다. 그때의 신앙과 오늘의 신앙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임박한 종말론이나 시한부종말론이나 그런 잘못된 종말론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시작된 종말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이후 종말은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8절은 사도바울의 확신과 격려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사도바울은 그날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너희를 끝까지 견고하게 지켜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격려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4절~8절까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린도교회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9절은 사도바울의 찬양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상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도바울, 또 고린도교회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도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늘 말씀을 우리가 묵상하고 여러 번 읽으면, 사도바울이 오늘 말씀을 단순히 감사하고 찬양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배경에 매우 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앞서 인사말에서도 그랬습니다. 자신을 사도라고 말할 때 거기에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 너희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라고 말할 때에도 거기에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이기에, 오늘 말씀도 편지를 시작하면서 듣기 좋은 적당한 인사치레로 감사와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의 마음은 하나님만이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작게나마 오늘 말씀 안에서 사도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단서는 오늘 말씀에 너무나도 많이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언급입니다.
오늘 본문을 세어보면,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범위를 넓혀서 1절부터 10절까지 확대하면, 모두 열 번이 나옵니다. 거의 매 구절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말씀도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아울러 하나님에 대한 언급도 많이 나오는데, 1~10절까지 하나님은 다섯 번 나옵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을 열 번, 주님을 일곱 번, 하나님을 다섯 번이나 호칭하고 있습니다. 우연일까요?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도 짧은 본문 안에 이렇게 많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본문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도바울은 마치 융단 폭격을 하듯이 예수님과 주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귀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오랜 시간 기도하고 고민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문제의 근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는 고린도교회... 예수님의 주님되심이 없는 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의 근본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고, 공동체가 성장하고, 각종 은사가 나타나고, 많은 영적인 일과 현상들이 일어났지만,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그들 자신들로 가득한 사람의 교회였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영적인 시각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도하면 할수록, 고린도교회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마음과 영적인 시각 속에 이렇게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은 사도바울의 마음과 의중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예수님이 없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 오래되어서 예수님이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이 계셔야 교회가 됩니다. 큰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와 전도사가 있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멋진 설교와 찬양이 있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계셔야 교회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언제나 계시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예루살렘 성전도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몇 단계에 걸쳐서 성전을 떠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전 문에 서서 “너희는 이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고 예수님이 항상 계신다...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믿고 잘못 모이면, 고린도교회처럼 예수님이 없고 사람만 있는 교회가 됩니다. 아무리 예배하고 찬송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도, 그저 사람의 모임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계신 참된 교회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성경 말씀과 예수님 말씀을 나누고 십자가가 있다고 예수님이 계신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하고... 실천하면서 그 말씀이 우리 신앙과 정신이 되고... 그런 신앙과 정신과 순종 속에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 되실 때... 그 개인과 교회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 됩니다. 그런 개인이 모여 교회의 다수가 될 때, 그 교회는 예수님이 계신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쉽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평생 전한 목사님들도 그런 예수님의 신앙과 정신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 몇 년 전 사건이 커뮤니티에 올라와, 다시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한인타운의 한 카페에서 한 한국인 신사가 버블티를 주문해서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집에서 먹어보니 맛이 없고 쓰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매장에 전화를 했는데, 직원의 응대가 조금 딱딱하고 불친절했습니다. 화가 난 이분은 매장으로 가서 따졌습니다. 큰 소리로 따지면서 그 음료수를 직접 마셔보라고 요구하고, 급기야 그 음료수를 직원에게 던지려고 했습니다. 결국 신고를 받고 미국 경찰관까지 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신사분은 한국에서처럼 미국 경찰관에게도 따지면서 ‘나는 세금을 내고 있으니 당신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연락을 받고 영어를 잘하는 그분의 딸도 와서 아버지를 거들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의사라고 밝히면서 ‘이 일은 매장 측이 잘못해서 일어났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경찰관은 그의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직업이 무엇인지 이 사건과 무관하고 나는 관심 없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음료수 맛이 나쁘다고 당신이 여기서 이런 소동을 일으킬 권리는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가게에 오지 않으면 된다. 겨우 음료수 하나의 문제이다. 어른답게 행동하라.’ 경찰관은 그 신사에게 범칙금을 부과하고 그렇게 그 일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신사와 딸이 눈물짓는 그 어린 직원에게 사과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얼마 후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미국 애틀랜타 어느 한인교회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자꾸 목사님들의 안 좋은 이야기를 예로 들게 되어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사건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분을 단순히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평생 성경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도 저를 포함해서 우리가 이런 모습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라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정당하게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님으로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뜻과 정신을 올바르게 가졌다면, 그 사건을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안에는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낮추어 보는 비성경적인 시각, 자신의 화를 절제하지 못하는 지혜롭지 못한 모습, 자신의 항의가 얼마나 정당한지 깨어있지 못한 영적인 태도... 그런 것들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이 주님으로 우리 마음에 계시고, 우리는 그런 주님으로 인해 낮고 겸손한 정체성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보다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고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알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사람을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옳고 그름과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고,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죄가 되지 않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회개의 영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다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사과하고 용서하고 잘 끝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원망을 남겨둔 채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예수님을 믿을 것이 아니라, 속 깊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속 심령과 정신과 마음으로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주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는 예수님의 주님되심이 없는 고린도교회를 본받지 말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깊이 모시는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번째로 특별한 말씀은 9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교회를 깊이 생각하는 사도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해 이와 같은 특별한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어 그분의 귀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교제한다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단어,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 사귐, 함께 함, 함께 참여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여기서 이 말씀을 하는 의미는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선, 영적이고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고린도전후서는 물론이고 사도바울의 모든 서신을 깊이 살펴볼 때 알 수 있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살려 이 9절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그의 아들됨에 공동으로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네, 여기서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교제와 사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아들됨에 공동 참여, 공동 상속’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와 같은 그분의 아들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아들 됨의 공동참여자와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신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모든 면에서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들이고 예수님은 맏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 첫 신호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 그날에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분의 아들됨에 함께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여러분, ‘종의 기독교’와 ‘아들의 기독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코이노니아를 모르면 종의 기독교에 머무르고 맙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종의 기독교’에 머물러 있습니다. 엎드려 절하고 바치고 기도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 기뻐하고... 제단 앞에 엎드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장소에 가게 해주시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무한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의 기독교’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나니...” 요한복음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왜 그렇게 위대하시고 예수님은 왜 그렇게 놀라운 분이실까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시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죄 많은 한낱 피조물인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광스러운 자신의 자리에 앉히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만 있어도 행복하고 더 바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의 자리에 앉히시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시고...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예수님의 기도는 코이노니아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를 절로 찬송하게 됩니다.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이지만, 사도바울은 이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와 같은 귀한 내용을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이렇게 코이노니아를 말씀하면서 고린도교회의 분란과 분쟁의 문제를 말씀하게 됩니다.
아울러 고린도교회의 분란과 분쟁을 말씀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처럼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코이노니아의 의미는 영광의 의미뿐만 아니라 고난의 의미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코이노니아를 말씀하는 9절 말씀에서 영적인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로 이 말씀은 우리를 그분 앞에 당당한 아들이 되게 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느 신과 우상 앞에 엎드려 굽신거리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런 원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들로서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예배에도 당당하게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도 당당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악한 영이 우리를 위협해도 당당하게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됨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귀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우리를 그분의 고난에도 참여하게 하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떡에 참여하는 것처럼 그분의 피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6에서 다시 코이노니아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이 사실을 알고 좀 더 책임감이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좋은 일만 생기고 나쁜 일은 없고... 그런 신앙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소원성취의 신앙은 좋은 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세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겠다는 아들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목회하던 한 젊은 목사님이 갑자기 암에 걸리셨습니다. 몸이 안 좋고 조금 이상했지만, 사역이 바빠서 병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몸이 너무 나빠지고 피도 나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말기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 일을 당하고 이 목사님의 생각과 신앙에 혼란이 왔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이 없다면 왜 하나님은 지금 이 소중한 때에 내게 이런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 목사님은 혼란을 겪으며 상심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 끝에 이분은 성경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음성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한 가지 조금 아쉬운 면이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그 목사님의 신앙은 귀한 신앙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쳐왔다고 신앙적으로 낙심하고 힘들고 혼란을 느끼고... 그럴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들의 신앙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과의 온전한 코이노니아 가운데 있다면, 어려움이 온다고 힘들거나 혼란스러울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따라 어디든 가는 신앙입니다. 예루살렘으로도 올라가고 골고다로도 올라가고 감람산으로도 올라가고 시온산으로도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면 우리도 고난받고, 예수님이 죽으시면 우리도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우리도 부활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떡에도 참여하고 피에도 참여하는 신앙입니다.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는 신앙입니다. 슬플 때도 있지만,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아들의 신앙과 코이노니아의 신앙을 가지고, 이 땅의 모든 희노애락과 대소사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인사말에서 사도바울은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평강은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변화가 옵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그러나 그 평안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무 문제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늘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갑자기 어려움이 생겼다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그런 말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아니라,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은혜와 평안을 누리는 장성한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감사와 찬양에서 특별히 2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이름과 예수님과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도 늘 넘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