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고 너희는
고전 1:1~3
2024.07.14.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은 지면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당연히 그렇지만, 또 현실적으로 값비싼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쓰인 성경은 지면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영어 paper의 어원이 되는 파피루스도 당시로선 귀하고 비싼 재료였습니다. 파피루스를 파는 상인들은 당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편지를 파피루스 위에 쓸 때, 지면을 낭비하는 이런저런 불필요한 말이나 미사여구나 꾸미는 말 등을 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고린도전서 인사말은 인사말치곤 좀 길고 복잡합니다.
그때에도 편지를 시작하는 인사말은 간단했습니다. ‘아무개가 아무개에게 편지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그렇게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도 예전에 편지를 쓸 때, ‘누구에게...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건강히 잘 지내시죠?’ 그렇게 인사말을 쓰고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바울의 다른 편지들도 대개 인사말은 간단합니다. 다만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인사말이 예외적으로 길고 내용이 복잡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인사말이 길고 내용이 복잡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지금 사도바울이 비싼 파피루스 위에 편지를 쓰면서, 그만큼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면서 또 앞으로 하게 될 말을 생각하면서... 여기에 서론처럼 미리 중요한 말씀을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인사말에는 중요한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그것은 모두 4개입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둘째, “너희는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
셋째,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넷째, “너희는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 중 하나이다”
이렇게 이 인사말 안에는 자신에 대한 1개의 말씀과 고린도 교회에 대한 3개의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써 내려가면서, 계속 언급하고 강조하게 될 말씀들입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공식적으로 편지를 보낼 때, 대체로 자신을 사도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그냥 바울이라고 한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 또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한 빌립보서를 제외하고, 바울은 자신을 늘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전엔 많은 분들은 그 이유를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빈도 그렇게 주석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대해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을 말한 철학자 니체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 언뜻 보면 그렇게 생각됩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많은 책망과 권면과 바로 잡는 말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면서... 이제 많은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이 짧은 인사말 안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말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언급하는 말도 3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생각하면, 사도바울은 지금 자신의 권위를 말하거나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사도바울을 감히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스스로 그런 마음을 한시도 품은 적이 없는 신실한 사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 한때 ‘기독교를 만든 인물은 예수가 아니라 사도바울이다’라는 주장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도 그런 말을 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그 시대에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말을 외친 젊은 청년에 불과하다. 그때는 그런 개혁적인 인물이 많았는데, 예수는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사도바울이라는 탁월한 인물이 나타나 그의 말을 잘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사실 바울이다”
예수님을 폄훼하고 기독교의 출발을 왜곡하는 이런 주장은 지금도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큰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직접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기업체에 취업해서 연수를 받는데, 저녁 시간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사도바울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그런 유의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런 책을 읽어보지 못했고, 성경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성경적으로 대답한다면, 오늘 말씀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생각하는 인물치고는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을 너무 많이 말씀하지 않습니까? 이 짧은 인사말 안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런 분이 어떻게 자신이 기독교를 만들고 교회를 세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여담이지만, 요즘은 예전보다 방송이나 매체에 잘 나오지 않는 도올 김용옥 선생도 예수님과 기독교에 대해 그런 왜곡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일부 신학자나 위인들이 말하는 그런 왜곡된 이야기를 마치 큰 진실인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본인이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얕은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보다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신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을 사도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말할까요? 사도바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의미를 크게 2가지로 이해합니다.
첫째, 그것은 자신의 사명을 가리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사명이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내가 사도이다’라고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명령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과 은혜로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금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사도’가 아니라, ‘그분의 사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은 예수님처럼 낮아진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단순히 선생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의 정신과 모습까지 본받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사도는 그분의 모습을 본받고 그분의 모습이 나타나야 비로소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을 예수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마음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일까요?
네, 이제 곧 말씀하게 될 것인데,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예수님은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이시기 이전에, 십자가를 지신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조금 후 십자가의 도에 대해 말씀하게 되는데, 그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리고 4장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고...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고 비천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이 4장 말씀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낮아진 정체성과 그런 낮아진 정체성을 만든 복음의 진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라는 말은 교회의 구조나 권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로 인해 만들어진 자신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자신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말하고 자신의 사명을 말하고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말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네,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 천년의 교황제도가 다 거짓입니다.
교황은 화려한 관을 쓰고 찬란한 옷을 입고 어마어마한 성전 안에서 왕들 위에 군림하고 면죄부를 발행하고 자신을 라틴어로 papa 영어로 pope 즉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물론 지금 가톨릭의 교황은 그런 모습을 많이 없앴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약해졌느냐 혹은 많이 개선되었느냐와 상관 없이, 그런 제도와 정서 자체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교황은 예수님의 사도가 아닐뿐더러, 겨우 사도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계승자와 대리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높아질 수 있을까요?
우리 개혁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당회장이나 총회장이나 신학교 총장이나 이사장이나... 이 모든 것은 사도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인간적인 지위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위에 있으면서 자신을 대단히 높게 생각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지위에 앉아서 사도보다 높은 권위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행합니다. 조그마한 능력이라도 나타나면, 대단한 주의 종인 것처럼 자신을 높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절에 지교회의 목사들을 교회 당회장실에 불러 합동 세배를 받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요?
그러나 우리 신앙과 본래의 기독교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의 사도라고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사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는 권력도 아니고 권위 주장도 아니고, 사명과 복음의 진리와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자신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 받았다고 고백하는 이 말씀을 혹 오해하지 말고, 우리 역시 우리의 사명과 복음의 진리와 새로운 정체성을 늘 고백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두 번째 말씀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입니다.
조금 복잡하게도, 여기에 두 개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다’, 다른 하나는 ‘너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입니다.
우리는 이 두 말씀을 잘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간혹 이 말씀을 설교하면서, 이 말씀의 전체 의미를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이미 거룩해진 성도이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성도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이미 성도가 된 것이다. 좀 문제가 있고 잘못되어도 우리는 이미 성도가 되었고 이미 구원받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과연 그런 의미로 말씀했을까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구원론과 그런 예정론을 알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이 말씀은 분명 완료형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거룩하여졌다’는 의미는 ‘구별되어졌다, 성별되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하게 하다’는 이 동사는 일차적으로 그런 ‘구별’과 ‘성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우리 존재나 성품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는 부족하고 흠이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속에서 구별되고 성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구원과 연결하여 이야기하면,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구원의 완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피로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두 번째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너희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입니다.
여기서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의식적으로 ‘구별된, 성별된’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일차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이차적인 의미가 나옵니다. 그 이차적인 의미가 도덕적 및 성품적으로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교회가 되었고, 나아가 이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과 거기에 합당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사도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처럼, 우리 역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그 길을 걸으면, 우리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부르심을 받았어도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거나 그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성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말씀을 종합하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 되었고, 이제 그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너희는 이미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고 이미 성도이다...’ 그렇게 말씀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또 이 편지의 흐름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맨 마지막 13장에서 이런 안타까운 말씀을 하게 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구원받은 성도라면, 이런 말씀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서 섣부른 구원의 확신을 찾아선 안 됩니다.
우리는 현재 구별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귀한 부르심을 잘 지켜나가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런 확신이 있고, 그것이 올바른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 구별됨과 부르심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우상을 믿고 일반 종교를 믿듯이, 겉으로 믿고 속으로는 믿지 않고, 필요할 때 믿고 결정적일 때는 믿지 않고, 그 구원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지 않는 사람은 최종적인 성도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별하시고 성도로 불러주신 그 부르심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성도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콜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목사나 선교사나 공무원이나 자영업자나 교사나 체육가나 예술가나... 그런 개별 직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선교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사업가나 부자나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어느 자리에 있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람들이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선교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후원이 있건 없건 어려움이 있건 없건 개의치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동역자가 떠나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예수의 사도로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자신에게서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사도바울의 모습 속에서, 부르심에 순종하는 우리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그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변명은 필요치 않습니다. 불만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돈이 없어서 예수를 잘 못 믿었습니다. 제가 좋은 교회가 없어서 예수를 잘 못 믿었습니다. 제가 너무 바빠서 예수를 잘 못 믿었습니다. 제가 지적으로 방황하다가 예수를 잘 못 믿었습니다. 제가 환경이 열악해서 예수를 잘 못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변명이 될 것입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이 유일한 부르심에 최선으로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구별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세상을 따라 살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잘못된 길에서는 얼른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어둠 속에 작은 빛이 되고, 거짓 속에 한 모금의 진실과 정직이 되고, 더러움 속에 더럽혀지지 않는 깨끗함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무언가 좀 다른 것 같애... 그런 평가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분의 거룩한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흠이 있어도, 세상에서 나와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그런 귀한 성도가 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