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병이어와 두 치유 (1)
막 7:31~8:26
(7:31~35, 8:5~9, 8:11~12, 15~18, 22~25)
2024.07.12.
오늘 본문의 범위가 넓습니다.
오늘 본문 안에는 따로따로 설교할 수 있는 적어도 4개의 사건이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 치유 사건, 이방인 칠병이어 사건, 바리새인과 제자들 책망 사건,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 이렇게 4개입니다.
이중 책망을 제외한 3개의 사건은 각각 개별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 나아가 죽음을 해결하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합니다. 이방인 칠병이어 사건은 이방인에게까지 확대되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갈릴리 사역의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지역이 이방인 지역이라는 점만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이 4개의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큰 의미를 말씀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4개의 사건이 굉장히 타이트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타이트한 연결은 이미 앞 본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결 논쟁을 통해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결론이 나왔고, 그 결론을 통해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치유가 나왔고, 또 거기서 이방인을 위한 빵과 부스러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빵과 부스러기는 오늘 본문의 이방인 지역의 칠병이어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이방인 칠병이어 사건은 유대인 오병이어 사건과 비교할 때, 더 적은 인원(남자만 5,000명 vs 4,000명)이 먹고 더 적은 조각(12광주리 vs 7광주리)을 남기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빵과 부스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과 칠병이어 사건... 이것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연결 구조입니다.
두 번째 연결은 칠병이어 사건과 책망 사건에서 보입니다.
칠병이어 사건에 이어서 곧 책망 사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칠병이어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떡에 대한 걱정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몰이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칠병이어 사건과 제자들의 몰이해 및 책망 사건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연결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 치유 사건과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병이 다르다는 점, 한 사람은 이방인이고 한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점, 한 사람은 한 번에 고치시고 한 사람은 두 번에 걸쳐 고치신 점... 이런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두 병자 모두,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와 치유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이동하십니다. 치유 과정에 침을 사용하여 고치십니다. 고치신 후에는 치유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것과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비슷한 질병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은 전체적인 내용과 의미가 유사해서, ‘서로 같은 의미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연결은 칠병이어 사건과 두 치유 사건입니다.
두 개의 치유 사건 가운데 칠병이어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치유 사건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전형적인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가운데에 있는 사건과 양쪽에 있는 사건이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몰이해와 책망을 포함한 칠병이어 사건을 두 개의 치유 사건이 감싸고 있다는 것은, 제자들의 그와 같은 몰이해와 두 개의 치유 사건이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으로 오늘 본문 구조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결론적으로는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두 개의 치유 사건이 칠병이어 사건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의 샌드위치 구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가는 어떤 메시지를 말씀하기 위해 이와 같은 구조로 글을 쓰는 걸까요?
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몰이해 문제를 중요하게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몰이해 문제도 조금 다루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외부인이기에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몰이해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내부인이라는 점에서 결코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각한 문제이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와 깨닫지 못함은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마무리되는 1부 마지막 부분에서 그것을 이런 구조 속에 의미있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칠병이어 사건을 몰이해 사건과 합쳐서 중간에 두고, 두 개의 치유 사건을 그 몰이해 치유의 의미로 양쪽에 배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두 개의 치유 사건은 단순한 병자 치유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의 그와 같은 몰이해를 겨냥한 치유 사건입니다.
이 두 개의 사건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주석가들의 공통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특히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은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한 번에 완전하게 고치시지 않고, 이상하게도 두 번에 걸쳐 고치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영적인 능력에 조금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어떤 예수님의 뜻이 있을까요?
학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이 치유만 독특하게 두 번에 걸쳐 행하셨는지 알고자 애써왔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 이유가 바로 앞 본문, 즉 제자들의 몰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런 구조가 뚜렷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의 1차 치유를 받고 뭔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현재의 영적인 모습과 상태라는 것이죠.
이에 예수님은 그를 한 번 더 안수하시고, 그가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바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바램이자 뜻이라고 해석됩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 치유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제자들은 영적으로 잘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잘 듣지도 못합니다. 그들의 귀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 치유 사건도 결국 영적으로 그런 모습인 제자들을 향한 것이라 해석됩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마가가 이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말씀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샌드위치 구조로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지 못한 채 어렴풋이 보고 어렴풋이 듣는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아직 제대로 그 나라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불완전한 신앙이 아닌지... 다음 주에 계속해서 이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