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의 시작
행 18:1~11
2024.07.07.
여러분들은 지금 저와 함께 매주 말씀의 여정을 떠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설교하면서, 저는 여느 다른 목사님들처럼 매주 다른 성경 본문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매주 다른 말씀으로 설교하는 것도 좋지만, 성경을 권별로 한 권씩 설교하면 더 좋지 않겠나... 우리 교회는 작아서 목회를 위한 설교도 필요하지 않고 일부러 은혜를 끼칠 필요도 없고... 그리고 나부터 성경이 궁금하고 급하니... 그래 설교한다 생각하지 말고, 성경 말씀 자체를 매주 알아가도록 하자...’ 그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2017년 1월부터 매주 그렇게 말씀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성경은 로마서였습니다.
로마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신약성경의 중심이죠. 어떤 분이 로마서에 대해 이런 말을 한 것이 늘 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 안에서 진주와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로마서 8장은 진주 중에서도 흑진주와 같은 말씀이다.’ 그래서 저는 오래전부터 로마서 말씀이 얼마나 진주와 같은 말씀인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년 정도 로마서 말씀을 보면서, 복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선택한 성경은 요한계시록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모두가 궁금해하는 말씀이죠. 저는 청년 시절에 요한계시록 1:3 말씀을 밤에 혼자 읽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아니 지금 이렇게 때가 가까운데 나는 이 말씀을 제대로 모르니 ... 이거 정말 큰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다음으로 요한계시록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유학을 공부할 때, 천자문을 떼고 그다음에 명심보감을 떼고 그다음에 소학을 떼고 그다음에 사서삼경이라고 하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을 떼고, 그다음에 예기와 춘추를 공부하였죠.
그래서 마치 그런 것처럼 성경을 한 권씩 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로마서와 요한계시록을 떼고, 이제 급한 불을 끄고, 그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제 앞에 다가온 말씀은 복음서였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모르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그때부터 복음서 말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보고, 이어서 두 번째 복음서인 마태복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을 설교하는 가운데 제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여러분들이 불러주셔서 믿음찬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마친 다음에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일서와 히브리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요한일서와 히브리서 말씀을 선택한 이유는 이 두 성경이 어려움 속에 신앙을 지키는 귀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는 어려움 속에 거짓된 가르침과 맞서는 말씀이고, 히브리서는 어려움 속에 박해와 배도와 차가운 현실과 맞서는 말씀이죠. 우리도 지금 동일하게 그런 영적인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요한일서와 히브리서 말씀을 잘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 이 말씀의 여정은, 여러분과 함께 여러 성경을 거쳐 감사하게도 8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기세를 몰아서, 여러분과 함께 오늘부터 새롭게 보게 될 말씀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을 이번에 선택하게 된 이유와 계기가 무엇일까요?
첫째, 이 말씀이 사도바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 그간 오랫동안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살펴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고린도전서 말씀이 보물 상자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양한 주제로 많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으면, 우리 신앙의 다양한 문제와 주제에 대해서 많은 통찰과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믿음은 막연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과 싸우는 구체적인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그때의 고린도인들과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비슷하고, 그때의 고린도 교회 교인들과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고린도도 그랬습니다. 로마제국 안에서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문화를 형성하고, 장사하고 무역하고 돈을 벌고, 돈과 성공과 자기 과시와 신분 상승을 추구하고, 기존 전통과 가치를 부정하고, 다양성과 실용주의를 추구하고, 쾌락과 축제를 즐기고 타락하고... 오늘날 우리 시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의 고린도로 돌아가면, 어렵지 않게 쉽게 적응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는 한마디로 오늘날 이 시대의 축소판 같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으면, ‘어 이건 우리 이야기이고 우리 문제인데’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이번에 우리가 고린도전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와 유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고린도전서가 아니라 사도행전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이 사도행전 말씀에 고린도교회의 시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또 중요한 예루살렘 회의가 끝난 후에, 다시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이때 바나바는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도중에 무책임하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로 서로 갈라서게 되고, 결국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이 2차 선교 여행에서 바나바 대신에 중요한 동역자 두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그 두 사람이 누구일까요? 네, 바로 디모데와 누가입니다.
그리고 이 2차 선교 여행에서 또 특별한 점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선교 방향을 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바꾸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3번 역사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을 막으시고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가려고 하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밤에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드디어 선교의 방향을 바꾸어 그리스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로 넘어간 바울은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를 거쳐 베뢰아를 거쳐 아덴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고 베뢰아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들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덴 즉 아테네로 내려왔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아레오바고 언덕에 서서 전도하였습니다. 바울은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을 등 뒤에 두고 아덴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큰 결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아테네가 철학의 도시이고 대학의 도시이고 학문의 도시이긴 했지만, 그런 기존 철학과 우상과 신전에 갇힌 영적으로 활력이 없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런 곳에서 꽃을 피우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서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아덴에서 길을 잃은 바울... 바울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2차 선교 여행을 소아시아 땅이 아니라, 이곳 그리스 땅으로 인도하셨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 17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8장에 들어서면 1절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네, 아덴에 있던 바울에게 누가 고린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하루 이틀 정도만 가면 고린도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거기 한번 가보세요. 그곳은 요즘 새로 뜨는 도시이고 활발한 도시이고 유대인들도 많이 있어서, 거기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일지도 모릅니다.” 네, 이것은 제가 한 번 상상해 본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라는 도시에 대해 알았을 것 같습니다. 로마를 모를 수 없듯이, 고린도를 모를 수 없죠.
그래서 바울은 아직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으로 오지 않았지만, 혼자 고린도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지금은 차로 1시간이면 아테네에서 고린도에 갈 수 있는데, 그때는 이틀 정도 걸려서 고린도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고린도 성을 둘러보았습니다. 고린도 성은 뒤로 600미터 정도 되는 산을 배경으로, 바로 앞에 레카이온 항구를 그리고 오른쪽 6km 정도 떨어진 곳에 겐그레아 항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카이온 항구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배들이, 겐그레아 항구에는 소아시아에서 온 배들이 북적이고 있었죠. 또 많은 배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바깥의 깊은 바다를 둘러 가지 않으려고, 레카이온에서 겐그레아까지 육상으로 배를 옮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거기 운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그렇게 상업과 무역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였습니다. 지금 고린도는 인구 4만 정도의 작은 관광 도시에 불과하지만, 그때의 고린도는 약 9만 명 정도의 큰 도시였습니다. 그때 인구를 감안하면, 매우 큰 도시였죠.
로마제국은 고린도를 BC 146년 정복하고 파괴했는데, 이후 그곳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BC 44년 다시 그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나 성장하고 있던 고린도는 신선한 활력이 넘쳤습니다.
이런 고린도 성을 둘러보면서, 바울은 어떤 생각과 어떤 영적인 느낌을 받았을까요? ‘뭔가 열려 있고 영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도시이구나...’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번 2차 선교 여행에서 나를 결국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밝히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옷을 털고 그들에 대한 선교를 포기합니다. 대신 이곳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시어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도시의 이방인들을 위해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기서 1년 6개월을 체류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때가 AD 50~51년 경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선교할 수 있도록, 좋은 동역자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 부부입니다.
이분들은 얼마 전 로마에서 왔고 이미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이었습니다. AD 49년 로마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 로마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오기 1년 전쯤 고린도에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부와 함께 살며 평일에는 같이 일을 했습니다. 천막도 만들고, 차양도 만들고, 배의 돛도 만들고, 샌들도 만들고, 허리띠도 만들고... 그때 고린도에는 큰길을 따라 양쪽에 쭉 늘어선 작은 가게들이 많았습니다. 1층은 영업장이고 2층은 작은 방이 있는 그런 가게입니다.
그래서 2층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사용하고, 바울은 1층 가게 한쪽에서 잠을 자고... 그렇게 생활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사람들을 만나고, 강론도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선생들과 연사들은 그런 험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돈을 받고 좋은 대접을 받았죠.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사도로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곳에서 지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도바울을 고린도의 유대교 유대인들이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리오라는 인물이 그 지방의 총독으로 새로 취임하자 바울을 고소하여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갈리오는 그 문제를 유대교 내부 문제로 인식하고 바울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법정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거기서 기독교로 개종한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구타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이제 고린도를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형제들에게 고린도교회를 부탁하고 마침내 고린도를 떠나게 됩니다.
그후 사도바울은 여러 곳을 다니며 사역하다가 에베소에서 머물며 사역하게 되는데, 그때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는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지 약 3~4년 지난 때이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고,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교회가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에 편지도 쓰고 사람도 보내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아 있는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지 3~4년 지난 모습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세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우리가 고린도전서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론과 배경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사전에 이해하고 말씀을 보아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을 고린도로 인도하시고 고린도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역사와 손길 속에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고린도로 인도하신 뜻과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왜 고린도를 특별히 선택하셨을까요? 무엇보다 아덴과 비교해 볼 때, 왜 하나님은 아덴이 아니라 고린도를 복음의 베이스와 선교의 전략지로 선택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당시 아덴은 영적으로 활력이 없고 닫힌 도시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기존의 철학과 사상과 지식에 젖어 있고, 그것을 자랑하고 교만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이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서 그 귀중한 사도바울의 시간 속에 그곳은 복음의 장소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고린도로 인도하셨습니다. 고린도는 새로운 도시이고, 그리스 철학과 사상이 강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 속에 어우러진 도시였습니다. 물론 고린도는 어두운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치와 향락과 문란한 도시였죠.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고린도를 선택하신 이유는 고린도가 영적으로 열려 있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보실 때에도 다르지 않다는 영적인 교훈을 받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 닫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를 닫고 눈을 닫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에 갇혀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연 만물과 개인의 인생과 좌절과 실패 속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때의 사람들이 우상과 신전과 철학과 일과 매일 매일의 삶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사람들도 이 시대의 철학과 지식과 트렌드와 핸드폰과 매일 매일의 삶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닫혀 있습니다. 똑똑하지만 다 영적으로 닫혀 있습니다. 찾아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나 교회의 잘못된 것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도 그때의 아덴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과 생각이 닫혀 있고 관심이 없는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회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이 역사할 수 없는 곳에서 복음은 역사할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찾으시고, 만나고자 하는 사람과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 역시 복음의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영적인 교훈과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의 과정 가운데 있는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영적으로 자라고 있는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구원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의 시간 속에 영적인 아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30년을 예수 믿었는데, 40년을 예수 믿었는데, 모르는 말씀이 없고 못 들은 설교가 없고, 다 알고 하나님도 다 알고, 무엇보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 그렇게 영적으로 닫히면 안 됩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경 말씀과 구원과 영적인 세계와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목사님들이 그런 신자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자기 신앙으로 굳어진 분들... 그런 분들은 구원의 시간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결국 넘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고, 하나님도 중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최근 그간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해외 선교를 하던 한 선교단체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단체를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단체의 대표가 그 선교회의 많은 재산을 자신의 개인 명의로 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뜨거운 가슴으로 선교하던 그분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영적으로 그 원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중단되고, 하나님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떠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부유하고 교만하고 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고 이미 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물가의 여인처럼 문제가 많고 죄가 많아도, 하나님을 찾는 영적인 사람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맞으면 맞다고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고, 달면 달다고 하고, 쓰면 쓰다고 하는 영적으로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의 기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나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문제가 많고 죄가 있어도 영적으로 고린도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처럼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고린도처럼 영적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고린도의 그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손길로 고린도교회를 세우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닫힌 아덴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열린 고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고린도같은 우리 위에도 예수의 교회를 세우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