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희를 보리라
히 13:18~25
2024.06.23.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의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
여기엔 히브리서 기자의 기도와 기도 부탁,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언급과 인사말, 그리고 마지막 축도가 나옵니다.
오늘은 먼저 본문을 짧게 설명하고, 이어서 우리가 주목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 부탁을 하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라고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단지 문학적 복수형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17절에서 말한 자신을 포함한 로마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 확신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양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우리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정직한 양심으로 성도들을 인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어떤 배경에서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성도들 앞에서 자신을 포함한 지도자들의 선한 양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한 가지 중요한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속히 로마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2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들 가운데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들에게 지금까지 권면한 히브리서 말씀을 잘 받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위해 간단히 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의례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 주어져서, 또 다른 귀한 말씀을 남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23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디모데를 언급합니다. 디모데가 최근까지 감옥에 갇혔는데, 얼마 전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목적은 신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박해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긍정적인 소식과 기대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디모데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는데, 그가 오면 함께 로마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역사적 사실인데, 아쉽게도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이 내용 이상 알기가 좀 어렵습니다.
24절은 문안 인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은 이 편지의 수신자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죠.
‘이달리야’라는 말은 사도행전에서 ‘로마’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서를 통해, 히브리서의 수신지가 로마의 가정교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히브리서가 예루살렘이나 혹은 다른 지역에 보낸 편지라면, 로마에서 온 사람들의 문안 인사를 따로 언급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2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짧은 축도로 히브리서를 마칩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일반적인 설교 본문으로 삼기엔 조금 어려운 말씀입니다.
여기엔 어떤 가르침이나 교훈이나 은혜가 될 만한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성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 정도가 살펴볼 만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쓰인 당시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볼 때, 여기에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절과 23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속히 로마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정 때문에 여의치 않아서 지금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디모데가 풀려났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디모데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데, 그가 오면 함께 로마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이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상황 속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생각과 신앙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시 시기와 상황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추정하고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를 대략 60년대 중반, 네로 황제의 박해가 본격화되기 전에 기록된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시기를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12:4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네로 황제의 본격적인 박해와 순교와 관련된 말씀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아직 피흘리지 않았다고 말씀하기 때문에, 이 시기는 아마도 64년 7월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난 후 아직 박해가 본격화되기 전인 시기로 추정됩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의 대화재 후 곧바로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네로 황제는 대화재 당시 로마에 없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조금 떨어진 휴양지에 있었는데, 대화재 소식을 듣고 급히 로마로 돌아와 복구작업에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대화재 이후 여러 가지 수습책을 발 빠르게 실시했습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식량을 배급하고 이재민의 임시거처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화폐를 개혁하고 로마시의 재건 계획을 수립하고 새로운 획기적인 도시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기 전 이와 같은 수습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최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의혹과 소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네로 황제가 궁전의 불탄 곳을 재건축하면서 주변 땅을 헐값에 사들여 더 크게 황궁을 지으려고 하자, 황제가 거대한 황궁을 새로 짓기 위해서 일부러 불을 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네로 황제는 그 소문에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로마 대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대화재와 기독교 박해 사이에는, 비록 정확한 시간은 알지 못하지만, 그와 같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히브리서는 그 시기에 쓰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기록 시기와 당시 상황을 좀 더 정확히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의 투옥과 그가 풀려난 사건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디모데는 바울서신 안에서 투옥된 일이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디모데후서 시기까지,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디모데가 투옥되고 그가 풀려난 사건은 분명 디모데후서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디모데에 대한 이 사실을 기록한 히브리서는 아직 예루살렘에 성전이 존재하던 시기, 즉 70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 두 시기를 종합하면, 디모데가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시기는 아마도 그가 사도바울로부터 디모데후서 편지를 받고 로마의 감옥에 있던 사도바울을 만나러 간 그 시기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편지를 받고 드로아를 거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바울의 겉옷을 가지고 로마로 갑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겉옷이 필요한 이유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략 그 시기는 64년 겨울로 보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를 보면, 그때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곁에는 누가만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사도바울에게는 로마에 유력한 지인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에 1차로 감옥에 있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무도 바울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찾아가면, 그때에는 자신도 체포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사도바울을 찾아갑니다. 편지를 받고 아무리 빨리 가도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약 한 달 정도 걸렸을 겁니다. 디모데가 로마에 도착해서 바울이 사형 당하기 전 만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디모데가 거기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면, 바울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때 디모데도 감옥에 갇히게 된 것 같은데, 다행히 디모데는 얼마 뒤 풀려나게 됩니다. 당시 박해는 로마 안에서만 일어난 소규모 박해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때 순교했는지, 아니면 디모데가 풀련 난 뒤에 순교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정이 맞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를 기록한 보다 구체적인 시기와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때는 로마의 대화재 이후 기독교 박해가 본격화되기 시작하고, 그래서 비록 아직 순교자는 없지만, 그런 위험이 매우 고조되고 있던 64년 말 혹은 65년 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주보에 사도바울이 갇힌 감옥과 그가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교회에 대한 자료를 올려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지하 감옥에서 나와 사진에 보이는 그 길을 걸어 순교지로 갔습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은 로마시민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덜 참혹한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분들이 그곳을 방문하여 사도바울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마지막 그 길을 같이 걸어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매우 혼란스럽고 위험한 시기에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대화재 이후 피폐하고 갈수록 흉흉해지는 로마의 분위기, 네로 황제에 대한 의심과 불만의 고조, 기독교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권력의 움직임, 사도 바울과 디모데에 대한 체포와 투옥... 즉 이제 로마에는 큰 박해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기에 히브리서 기자가 로마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십중팔구 체포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의 가정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기독교인을 잡아다가 심문하여 고구마 줄기 캐듯이 한 명씩 한 명씩 체포했습니다. 그러니 심문에 못 이겨 히브리서 기자의 이름을 대는 것은 시간 문제이고, 어쩌면 로마 당국은 벌써 히브리서 기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 이 마지막 부분에, 자신이 로마로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오면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네, 이 말씀은 나도 그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그와 같은 생각과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18절에서 자신이 선한 양심을 가졌다고 말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나는 여러분이 있는 그곳으로 곧 가겠다... 나는 여러분이 있는 그곳에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이 아무리 훌륭한 말씀이라 해도 만약 멀리서 편지로 신앙을 지키라고 말만 하는 것이라면, 히브리서 기자는 좋은 지도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의 신앙도 위선이고 가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고난 받고 있는 로마 가정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리는 죽어도 맨 먼저 죽고, 감옥에 갇혀도 맨 먼저 갇히는 자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과 23절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의 그런 신앙과 생각을 말씀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지도자가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을 회피한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그의 신앙도 거짓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나 오늘날에나 그런 사람을 봅니다.
이번 주에도 그런 사람에 대한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한 병사의 사망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장군과 중대장...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박해의 문이 활짝 열린 로마를 향해 기꺼이 나아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로마로 돌아갔을 것이고 아마 순교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주던 로마 원로원의 두 딸도 순교하는 상황이라면, 히브리서 기자도 피하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신자들도 이 편지를 받고 고난을 향해 나아갔고, 히브리서 기자도 이 편지를 쓰고 고난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이 히브리서 말씀을 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지... 말씀이 어려워서...? 아닙니다. 구원의 탈락과 경고의 말씀이어서...? 네, 그것도 중요한 이유이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이 슬픈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피와 히브리서 기자의 피가 배어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도 흐르고, 신자들의 피도 흐르고, 히브리서 기자의 피도 흐르고... 네, 이것이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어떤 적용을 해야 할까요?
네, 우리는 그분들을 생각하며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순례의 길을 떠나 영적으로 그분들과 마음을 같이 하며,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예루살렘에도 가보시고 로마에도 가보시길 바랍니다. 그 현장에서 기도하며 그 신앙을 깊이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히브리서를 마치면서, 이와 같은 예수님의 피와 믿음의 사람들의 피를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분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런 때가 만약 오게 되면, 우리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반은 영광의 승리이고 반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크고 작은 영적인 싸움과 어려운 고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박해받았던 신자들의 신앙을 생각하면, 우리 고난의 객관적인 크기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어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기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맨 먼저 잡혀갈 일도 없는데,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을 믿기에 아무 어려움이 없는 오늘날... 하나님을 잘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의 은혜를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어려움 중에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신앙이 다 되시길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