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따르는 개혁적인 삶 (2)
막 7:17~19
2024.06.21.
오늘은 우리가 19절 하반절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와 파장이 굉장히 큽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개혁적인 말씀이지만, 특히 이 말씀이 유독 개혁적이고 파격적입니다. 한 마디로 문제적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가복음 이후에 기록된 마태복음은 이 말씀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정결법의 핵심인 음식 규례를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레위기 11장에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의 구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시며 이런 구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면 그 말씀을 정면으로 뒤집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오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만 본다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 같은 과격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적 구절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음식물은 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 깨끗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생활을 위해 처음에 음식을 구별하도록 하신 것이지, 그런 구별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그래서 여러분, 술 취하는 것이 문제지, 술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루의 노동 끝에 또 음식의 일환으로 조금 술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 말씀의 의미와 파장이 매우 큰데, 그렇다면 우리가 다음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이 교회 안에 그후 어떻게 정착되었나?’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 쉽게 정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AD49년경 예루살렘 회의에서 비로소 음식에 대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을 폐지하게 됩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이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에 이방인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점점 이 문제는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황급히 자리를 뜬 것을 비난한 사건, 베드로가 환상 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담긴 각종 생물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들은 사건, 베드로가 이 환상 후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 어떤 이들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이방인 신자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한 사건 ... 이런 사건과 문제들이 계속 생겨 결국 사도들과 교회 대표들이 참석한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는데, 그리하여 마침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음식 규례를 비롯한 율법의 제반 준수 의무가 철폐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역사적 과정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내용이 교회에 정착되는 데에 이렇게 오랜 시간 논쟁과 논란이 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왜 교회와 사도와 유대인 신자들은 계속 음식을 가리고 구별하고 그에 따라 이방인을 차별하다가 논쟁 끝에 겨우 철폐하게 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입니다. 새로운 개혁이란 쉽게 정착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개혁은 쉽지 않습니다. 오랜 관행과 습관과 전통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개혁이란 예수님 삶의 특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그분을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죠. 그러나 예수님의 그와 같은 구원은 개혁 속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개혁 없이 구원은 없습니다. 개인도 개혁이 되어야 구원을 받고, 교회도 개혁이 되어야 구원의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말로 개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개혁이란 말을 편하고 친숙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언어도 아닌 바로 우리 믿음의 언어입니다.
무슨 사회운동 하는 사람이나 정치인들이 쓰는 말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말입니다. 개혁은 우리들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혁을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분의 말씀을 배우면 그것으로 내 삶과 생각을 개혁하고... 그분의 뜻을 깨달으면 그런 개혁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앞서 술을 먹는 문제를 잠시 말씀드렸는데, 술을 많이 먹고 방탕하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이지만, 음식의 일환으로나 또 고된 하루 끝에 조금 드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회식 자리에 가서, 술 한두 잔 정도 받아서 함께 어울리는 것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사람들과 편견이나 차별 없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술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도 개혁적인 신앙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음식을 가리면서 이방인을 차별했습니다. 그들과 식탁의 교제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젊었던 바울이 그런 베드로를 보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부와 재산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하는 일과 지위로 사람을 차별하고, 힘과 권력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그런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제일 높고 장로와 권사가 그 다음으로 높고 집사는 그 다음으로 높고... 그런 모습은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잘 깨달아 그것을 잘 따라가는 것이 개혁 신앙입니다.
헌금에 있어서도, 자기 형편에 알맞게 헌금하고 의무적 십일조나 기복적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개혁 신앙입니다. 신약의 교회를 구약의 성전으로 되돌리지 않는 것도 개혁 신앙입니다.
기도에 있어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도 개혁 신앙입니다.
한국교회가 기도에 대해 주로 가르치는 내용은 ‘기도를 많이 하라’ 입니다. 기도를 오래 하고 많이 하면 좋은 기도이고 좋은 신앙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도 많이 한다고 무조건 신앙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샤머니즘에 바탕을 둔 생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내가 설득한다고 설득 당하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내가 강청한다고 강청 당하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를 개혁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과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일상의 일에 대해선 성실한 노력과 적절한 판단이 기도보다 중요합니다. 시험 합격 기도만 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집이 빨리 팔리도록 기도만 하지 말고 싸게 내놓고,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지 말고 사업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길든 짧든 기도한 대로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만 하고 삶이 없는 신앙을 싫어하십니다.
요한일서에 중요한 기도의 비결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분에게서 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개혁적 삶은 신앙 영역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상생활과 일, 지식과 문화, 정치와 역사 ...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추구하는 개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것을 계속 좋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무의미한 전통과 관습에 채찍을 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성전의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거세게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새 성전을 사흘 만에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점점 나쁜 방향으로 보수화되고 개혁에서 멀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개혁적인 삶을 늘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교회들은 영적으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나쁜 방향으로 보수화되고 있습니다. 시대 및 세상과 떨어지고 격리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유신 진화론을 말한 교수가 신학교에서 해임되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일본과는 관계 개선을 하고 화해를 해도, 북한과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최근의 이슈들은 지금 우리 교회가 개혁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와 믿는 자들은 주 안에서 늘 청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은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둔해지고 기득권에 안주하려 하지만, 우리 마음과 생각은 주님과 함께 진리를 따르는 영적인 청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늘 새롭게 살고, 잘못된 것을 버리고 개혁하고 전진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와 복을 주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