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예수의 제단과 영문 밖

믿음찬교회 0 95 06.19 15:11
예수의 제단과 영문 밖
히 13:7~17
2024.06.16.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읽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은 잘 이해가 되는데, 전체 흐름과 문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읽으면 뜻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이 여기 있지?, 앞 말씀과 뒷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지?, 왜 제일 앞에 나온 말씀이 제일 마지막에 또 나오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는 방식이 확실히 그때와 지금이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마치는 이 시점에 다시 한번 ‘히브리서 기자는 누구일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정통 유대인이면서 정통 그리스도인이고, 목회자이면서 신학자이고, 신학자이면서 수사학자와 같은 분입니다.
그래서 지금 에필로그마저 평범하지 않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앞서 첫 번째 에필로그는 짝을 이룬 말씀의 잔치였습니다. 짝을 이룬 말씀들은 우리말로 읽어도 운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에필로그는 달걀과 같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에 대해 말씀하는 달걀의 흰자위 안에,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는 노른자위가 담겨있습니다.
첫 번째 구조는 교회 지도자에 대해 말씀하는 7절과 17절입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 2개의 말씀이 마치 달걀의 흰자위같이 오늘 본문을 감싸고 있습니다.
두 번째 구조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는 8~16절입니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10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13절 “그런즉 우리도...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이렇게 이 안에는 예수님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 영문 밖 새로운 예수의 제단, 예수님을 통해 드리는 새로운 제사...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은 마치 달걀의 노른자위같이 두 번째 에필로그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 번째 에필로그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전체의 최종 결론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이 말씀이 히브리서의 최종 결론인가? ... 돌아보면 히브리서의 서론은 예수님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이 아들은 만유의 상속자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 본체의 형상이시고, 우리 죄를 속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서론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결론도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그는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는 영문 밖 그분에게로 나아가고, 우리는 그분의 제단 위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이렇게 두 번째 에필로그이기도 하고, 히브리서의 결론이기도 한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말씀은 크게 2가지 주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부탁의 당부입니다.
7절은 이전 지도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된 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분들의 귀한 삶과 믿음을 잘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17절은 현재의 지도자를 말씀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로마의 가정교회들 안에는 여러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 중 한 사람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을 포함한 지도자들에게 신자들이 잘 순종하고 복종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지도자는 중요하지만, 당시는 더 중요했습니다. 1세대 사도들은 몇 사람 남아있지 않고 신약성경도 아직 없고, 흩어진 교회마다 위기 속에 2세대 지도자들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교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든 신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교회 지도자에 대해 사랑과 순종을 당부하는 오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7절과 17절로 나누고, 이 안에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굳이 이런 구조를 만들어서 이렇게 말씀할까요?
네, 아마도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근본 지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예수님의 위임을 받은 임시적인 지도자입니다. 사람은 부족하고 한계가 있고 죽기도 하고 순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라야 하지만, 그분들이 없어도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글의 구조 속에 이와 같은 숨은 의미를 의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근본 지도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르고, 또한 그분의 위임을 받은 합당한 인간 지도자를 잘 따르는 하나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되면, 교회는 박해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물리치는 승리하는 교회가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메시지는 새로운 신앙에 대한 당부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내용이 두 번째 에필로그의 노른자위이고, 동시에 히브리서의 최종 결론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7절에서 지도자에 대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8절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의 문맥적인 의미가 무엇이냐는 사실입니다.
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7절에서 고인이 된 인간 지도자를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순교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도자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계신 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 지도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말씀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잘못된 다른 교훈에 이끌리지 말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이 잘못된 교훈은 음식과 관련이 있는 어떤 교훈입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 제사와 각종 절기에 참여하여 먹는 음식에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편 104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절기를 지키면서 그런 축복의 식사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너희는 그런 은총에서 제외되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굳게 하는 것이지 음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음식에 무슨 특별한 은총이나 영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성찬식 포도주와 떡을 먹을 때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은총이나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찬식 포도주와 떡은 그 의미를 생각하는 상징적인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어느 사이비 교주는 자신의 얼굴이 붙은 우유를 비싼 값에 팔고, 어느 이단은 그런 생수를 팔기도 합니다. 어느 이단은 피갈음이라고 해서 자신의 성을 팔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10절부터 우리의 새로운 신앙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말씀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님,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 인간 대제사장보다 뛰어나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언약이 되시고 새로운 성소가 되시고 새로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말씀했습니다. 그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죄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고, 그분을 우리 믿음의 주로 삼아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또 이르러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여기 결론에서 다시 한번 그와 같은 우리의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방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3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제단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새로운 제단은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제단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짐승의 피로 드리는 옛 제단은 잊어야 합니다. 이제 거기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드리신 그 새로운 제단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적으로 먹으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제단은 놀랍게도 영문 밖에 있습니다.
영문 안에는 여전히 성전과 성전 제사가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그런 실제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영적이면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영문 밖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문 안에는 여전히 무엇이 있습니까?
네, 영문 안에는 여전히 성전과 성전 제사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아직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았고 여전히 성전과 성전 제사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곳을 떠나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단이 있는 새로운 영적인 장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일까요?
네, 그곳은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고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그곳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이제 그 새로운 영적인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거기에서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 새로운 제사는 이제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아닙니다. 속죄는 예수님의 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 완성된 속죄를 따라 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온몸을 물로 씻은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제사는 이제 찬송의 제사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감사와 찬송의 밝은 예배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그 새로운 제사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옛 제사가 아닙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새로운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자신에게 드리는 제사와 동일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새로운 제사와 예배가 됩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상 속에서 우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런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 또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랑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마지막 말씀에서 우리의 새로운 신앙을 3가지로 제시합니다. 영문 밖으로 나가 예수의 제단 위에서 찬송과 사랑의 제사를 드리는 신앙... 이렇게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제단으로 새로운 제사를 드리는 예수의 공동체... 이것이 히브리서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신앙은 먼저 새로운 장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를 버리고 성전을 버리고 율법과 제사를 버리고 영문 밖으로 나가 그분이 피 흘리신 곳에서... 우리는 예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만 가진다고 저절로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라고 말하지만, 구약적 선민의식과 그와 비슷한 결정론적이고 선택론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외적으로 지키고, 보이는 성전과 보이는 의식과 외형을 중요시하고, 종교적 열심과 참된 신앙을 늘 혼동하고, 내적인 변화와 거듭난 삶을 추구하지 않고, 구약적 물질 축복과 전쟁과 정복과 승리를 선호하고,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님처럼 알고 믿고 기도하고, 제사장 같은 목사가 있고 그런 제사장에게 순종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교회가 되고 그런 옛 성전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자꾸 성전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면 교회 건축이라고 하지 않고 꼭 성전 건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히브리서 말씀을 보았기 때문에, 결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우리 신앙은 이제 예수의 제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제단은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신 영적인 제단입니다. 우리는 이 제단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와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과 정신을 영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룬 속죄의 완전성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죄로 인한 방황과 실패가 없고, 무엇보다 그 제단 위에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과 정신을 깊이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예수의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상과 싸우고 잘못된 사람들과 싸우셨습니다.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제단에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과 정신을 깊이 배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오랜 시간 예수님을 믿어도, 그분의 모습과 정신과 가르침에 동화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의 제단과 무관한 사람이고 그 제단에서 제사하지 않는 사람이고 거기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래 믿은 목회자와 직분자들 중에 예수의 냄새와 향기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는 그분의 살과 피를 그대로 먹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 새로운 제사는 기쁨과 감사의 제사입니다. 우러나오는 찬양의 예배입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죄를 의식하며 엄숙하게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드릴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쁘고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언제나 예배하고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예배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또 세상 속에서의 영적인 삶으로 확장됩니다. 주일 예배만 예배로 아는 사람은 구약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과 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일주일을 보내고 주일 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삼류 신자입니다. 거짓말하고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께 부끄럽고... 그런 일주일을 보낸 신자는 좋은 예배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고 그 삶과 생활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새로운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한 히브리서가 예수님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영문 밖으로 나가 예수의 제단 위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옛 장소 안에서 죽은 예배를 드리는 신앙이 아니라, 그런 살아있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이름인 ‘들에핀’이라는 말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 들과 광야에서 예수님만 붙들고 하나님을 만나는 용기 있는 새로운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히브리서는 우리 신약 신앙의 교과서와 같은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선명한 새 신앙이 되어,
그런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고 어려움을 이기고 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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