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따르는 개혁적인 삶 (1)
막 7:14~23
2024.06.14.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왜 당신의 제자들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라고 문제 제기했고,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그들이 제기한 본래 문제인 사람의 정결에 대해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무엇이 참된 정결이고, 사람은 어떻게 참된 정결과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게 됩니다.
오래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 율법에 많은 정결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이 제단에 피를 뿌려 정결케 하고, 병자를 격리하여 진중을 정결케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상징적이고 의식적인 정결 행위인 할례를 행하고,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그 산모가 어떤 절차를 거쳐서 깨끗해지고... 이런 것들이 다 율법의 정결 규례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결 규례의 가장 큰 부분은 음식 규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정결한 음식을 먹도록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정결법을 만드신 목적은 그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결법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제단에 짐승의 피를 뿌린다고 제단이 실제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할례를 행한다고 사람이 그 할례의 힘으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고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지나고 또 제사를 드려야 실제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규례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규례 자체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규례를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마음과 생각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신봉하는 바리새인들은 그 규례 자체를 중요시하고 그 목적을 중요시하지 않는 외적인 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다고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마음의 악과 더러움이 진정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말씀은 참된 정결은 사람의 내부에 있고, 사람의 내부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네, 우리는 지금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예수님의 당연한 말씀이 율법과 계명을 외적으로 준수하던 당시로선 무척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슬람 종교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이슬람 종교도 율법과 계명의 외적 준수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하루 5번의 기도를 하고 라마단 금식을 하고 여성들은 히잡이나 부르카를 씁니다. 이슬람 종교가 그런 규례들을 폐지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들 내부에서 마호메트를 능가하는 인물이 나와 개혁하기 전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시 그들을 향해 하신 이 말씀은 대단히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문을 여셨기 때문에 교회와 우리는 율법적이고 외적인 신앙이 아닌 영적이고 내적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기독교 바탕의 서양 문명과 역사도 그렇게 발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보이는 외부보다 보이지 않는 내부를 더 중요시함은 오늘의 당연한 상식과 진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잠시 우리 역사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는 불과 일이백 년 전까지 그런 역사적 발전을 이루어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겐 과거 조선조 후기, 유교의 예학이 매우 중요시되고 강조된 안타까운 역사가 있습니다.
예학은 유교 및 유학의 한 부분으로 외적 예를 중요시합니다. 관혼상제라고 해서 관례나 혼례는 어떻게 하고, 누가 돌아가셨을 때 어떤 상복을 입고 몇 년 상을 치르고, 제사는 어떤 식으로 몇 번 드리고... 조선 후기 우리 선조들은 주자의 주자가례 등에 나오는 이런 내용들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왜 그때 우리 역사는 외적 형식에서 내적 의미로 역사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형식을 중요시하고 형식에 매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당시 지배층인 양반사대부들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와 백성을 유교의 예학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가 중요하고 중요하다고 믿어서 숭상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 때문에 숭상한 것이죠.
그래서 조선은 결국 힘을 잃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작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중요하고 형식보다 의미가 중요하다는 이와 같은 진리가 우리에게 진작 있었다면, 우리는 보다 발전된 사회와 역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내용을 오늘의 우리 삶과 생활과 신앙에 잘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진리를 간과하고 놓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나 정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향 중심과 형식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형식적인 기도, 형식적인 모임, 형식적인 예배, 교회나 사역에 있어서 외형과 양을 중요시하고, 보이는 은사를 선호하고, 큰 교회에 다니면 자부심을 가지고 작은 교회에 다니면 위축되고 ... 우리 신앙에 이런 모습들은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형식적인 관계, 형식적인 인사, 형식적인 말, 보이는 외형을 중요시하는 생활, 사치와 과소비, 체면치레와 겉멋... 이런 모습들은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평소에 좋은 정치나 성실한 의정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선거 때나 명절이 되면 시장을 찾아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고 시장 음식을 사 먹는 모습을 보이고... 그런 형식적인 정치도 이젠 그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형식적인 정치인을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사람의 정결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그 이상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외형과 보이는 것과 외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인 것과 내면과 본질과 의미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든 삶이든... 우리가 모든 면에서 그렇게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개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적절한 형식과 합당한 외형을 가지시되, 언제나 내면과 본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과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