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의 첫 번째 말씀
히 13:1~6
2024.06.09.
지난 주일 히브리서 본론이 끝났습니다.
그동안 약 1년간 어려운 히브리서 말씀을 잘 들어주신 성도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 매번 성경 본문을 놓고 어떻게 설교해야 하나 고민할 때 잘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자랑스럽게도 히브리서 마지막 13장 1장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금 제 생각으로는 6월 마지막 주일까지면 히브리서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히브리서를 통해 큰 은혜와 교훈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히브리서 13장은 이 서신의 에필로그입니다. 에필로그는 ‘맺는말’이죠.
그래서 에필로그에서는 주된 말씀이 다 끝나고, 몇 가지 간단한 권면이나 부탁이나 인사말이 나오는 편안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이 13장 말씀을 읽으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이 에필로그 말씀 역시... 결코 가볍거나 쉽지 않은 말씀의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도 두 개의 짝을 이룬 말씀이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형제 사랑과 손님 대접,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 결혼과 침소,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자는 자, 돈과 있는 바,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떠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나 자신... 이렇게 많은 말씀이 정교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오늘 본문의 1차적인 특징은 두 개의 짝을 이룬 말씀들입니다. 두 개의 짝을 이룬 말씀들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은 명령형의 향연입니다. 오늘 본문은 대부분 명령형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에서 명령형은 좀처럼 드물었습니다. 명령형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3장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4장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6장에서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10장에서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11장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2장에서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저는 다리로 하여금 고침을 받게 하라.
이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짧은 본문 안에 대부분 명령형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래서 이렇게 명령형으로 확고하게 쓰였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2차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들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반적으로는 중요하기 때문에, 명령형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명령형으로 한다는 것은 그분이 이 편지를 받는 신자들에게 신뢰와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로마의 가정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신자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형으로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말씀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신자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유대적인 말씀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히브리서 기자도 유대인이고, 듣는 신자들도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은 그분들에게 너무나 합당하고 당연한 말씀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명령형으로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의 이와 같은 특징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잘 다듬어진 정교한 말씀입니다. 또 오늘 말씀은 서로 충분한 신뢰와 공감이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귀한 말씀의 관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왜 이와 같은 오늘 말씀을 갑자기 말씀하는 걸까요?
이제 본론이 끝나고 에필로그가 되어서, 그저 편하게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말씀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 본문이 12:28 말씀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12:28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 가운데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 원리이고 원론적인 말씀이었죠.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 신앙 원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로마교회 신자들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오늘 말씀을 이해하면서, 이제 이와 같은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단 2가지입니다.
첫째는 믿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둘째는 성과 돈에 대한 깨끗한 삶입니다.
첫째, 오늘 말씀은 믿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1~3절을 통해, 당시 작고 소박하고 어려웠던 로마의 가정교회들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가정교회들은 로마 제국의 심장부 로마에서 피어난 이름 없는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신자의 집에 20~30명 정도 모였습니다. 작고 소박한 공동체여서 서로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와 종교, 전쟁과 정복, 사치와 부유함, 신전과 각종 숭배의식, 축제와 이교적인 문화 속에서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를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작은 숫자였지만, 그 우상의 시대 허영의 도시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생명과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형제 사랑이었습니다. 서로 돌아보고 도와주고 지켜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가장 절실했던 현실적인 필요였습니다.
또 당시 교회는 공동체 안의 믿는 형제뿐만 아니라, 교회를 찾는 손님들도 잘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때에는 그런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사도들이나 사도의 제자들, 순회 교사들, 자발적으로 복음 전하는 분들, 편지를 전달하는 분들, 박해를 피해 도망 온 분들... 그런 분들이 교회를 힘겹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는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헌금을 하거나 연보를 하거나 십시일반 돈을 내어서 그런 분들을 도왔습니다.
또 교회는 3절 말씀과 같이, 누가 예수 믿다가 감옥에 갇히면 그런 분들을 부지런히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감옥에서는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나 아는 지인이 그들을 찾아오지 않으면, 마냥 굶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와 신자들은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가서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성경도 읽어주고... 기록에 의하면 어떤 분들은 간수에게 부탁하여 감옥에 갇힌 형제와 거기서 하룻밤을 같이 자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당시 교회는 작은 공동체였지만,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어려운 신자들을 도왔던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교회는 제가 어느 분으로부터 배운 표현대로, 캄캄한 골짜기 불 밝힌 작은 사랑이 오두막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교회들은 그런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감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대체로 큰 교회들이 많죠. 서로 잘 모르고, 인사만 겨우 나눕니다. 길에서 마주쳐도, 같은 교회 다니는지 모릅니다. 저의 친척 목사님 한 분은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목사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비록 큰 교회였지만 자신은 성도들을 다 안다고 자부했는데, 도무지 그분을 교회에서 본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때 큰 충격을 받고 회의가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캐나다에서 교회를 개척하시고 작은 교회 목사님으로 행복하게 사역을 마쳤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목사님의 자녀분들이 그 신앙을 본받아 다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럴 일이 없어서 행복합니다. 언제나 인사 나누어 주시고 아는 체해주시고 기도 제목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서로 얼굴도 모르는 지금의 대형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많은 교회가 오늘 이 말씀과 다르게, 서로 얼굴도 모르고, 사랑도 없고 정도 없고, 주일날 예배 한번 드리고 돌아가고, 담임목사 중심에 소수의 사역자와 신자로 운영되는 모습이 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물론 지금 큰 교회들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작은 소그룹 모임을 많이 활성화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고 소박하고 아름답고 사랑과 생명이 넘친 공동체를 되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도 히브리서 말씀 같은 말씀이 살아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그 권위는 종교적인 권위가 아니라 말씀과 모범의 권위여야 하고, 동시에 신자들은 서로 알고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신앙을 몸소 실천할 줄 아는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지도자와 신자가 있다면, 우리는 어느 시대나 그런 아름다운 교회의 원형을 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 우리 시대는 서로 그렇게 깊은 관계를 갖기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네, 모든 분들이 다 그렇게 참여하기는 쉽지 않겠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마음에 그리며 잘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3절을 통해, 당시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웠던 교회와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어려운 시대와 그 어려운 장소에서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진정한 사랑과 생명과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정치와 종교와 우상과 부패와 문화와 박해 속에서도 계속 성장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 사랑에 대한 이 말씀 속에서 그런 아름다운 초대 교회와 초대 신앙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작은 우리 교회도 이 시대 속에 진정한 주님의 교회가 된다면, 그런 아름다운 피난처와 영적인 보금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오늘 말씀은 성과 돈에 대한 깨끗한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절에서 몸에 대한 말씀을 잠깐 하였습니다.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혹은 ‘너희도 그런 몸을 가진 것처럼’, 그런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라...
그래서 이렇게 몸에 대한 말씀이 잠깐 나왔기 때문에,
또 우리의 몸과 경제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깨끗한 생활에 있어 가장 치열한 영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또 히브리서 기자는 타락한 도시 로마 한가운데에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있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4절과 5절 말씀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할 줄로 알라...
깨끗하고 성결한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표지와 같은 삶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더럽고 때가 묻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깨끗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잘 지켜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우리가 깨끗하기 어려운 영적인 영역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우리 몸과 돈입니다.
로마는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구석구석 신전과 우상 숭배의 현장마다 음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사회적 환경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 환경은 오늘날에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의 자유화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고, 이성보다 몸을 더 중요시하는 세계관과 몸 철학이 나오고,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가 성의 자유를 외치며 그 길을 터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적인 자유의 물결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밀려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전까지는 정절을 지키고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지금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환경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데 거기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바로 4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성은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성 윤리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분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이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너희는 왜 유달리 그렇게 살아가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깨끗한 삶을 살 때 기뻐하십니다. 그런 깨끗한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한편, 우리가 깨끗하고 거룩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영역은 돈입니다.
우리는 돈을 위해 얼마든지 모든 일을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을 위해 못 하는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돈 앞에 다 약해지고, 돈 앞에 체면도 얼굴도 다 내려놓습니다.
우리가 돈에 있어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정직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소득은 정직한 소득인가... 우리는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거나 돈에 매이지 말고... 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잘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큰 부자를 제외하고, 대체로 우리는 경제적으로 빠뜻한 생활을 하고 큰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을 잘 사용하는 일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여유가 있는 부유한 사람이라면, 돈을 사용하는 문제는 큰 영적인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 좋은 부자의 모범이 되는 사람은 룻기의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인색하지 않은 좋은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자라면, 그런 좋은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5절과 6절 말씀을 보면, 돈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은 매우 짧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이 말씀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 뒤에 나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일까요?
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때 로마교회 성도들의 사정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핍박과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히고 재산이나 집을 빼앗기고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런 직접적인 어려움이 아니더라도, 예수 믿는 자라고 하면 상인회 같은 곳에서 밀려나고 이런저런 경제적 불이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자들에 돈은 큰 시험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같은 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명기와 시편에 있는 귀한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보살피신다는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빵과 떡과 현실적인 필요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내 가난한 밥상에도 함께 하시고 내 지갑과 호주머니의 사정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의 그릇을 기름으로 채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벳새다 들판의 가난한 사람들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마도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아직 이때에는 돈과 재물과 우리의 필요에 대한 예수님의 최고의 말씀이 널리 퍼지지 않은 때인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곤란한 시간을 살아갈 때에,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영육간에 잘 살아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신앙적 고난이 오거나 믿음을 지키기 위한 가난과 어려움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일부러 가난하고 궁색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이든 핍박 중이든 평상시든, 우리의 필요와 돈과 재물과 경제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복과 공급하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적 탐욕이나 욕심이나 교만이나 인색한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잘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에필로그의 첫 번째 말씀... 히브리서 기자는 로마 가정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향해 2가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성과 돈에 있어서의 깨끗한 생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생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도 이 말씀과 같이, 믿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