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3개의 말씀
히 12:25~29
2024.06.02.
지난주 말씀은 히브리서의 절정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인도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곳을 7가지로 묘사한 내용은 그곳을 바라보는 우리 믿음을 영원토록 든든하게 하는 귀한 내용이었습니다.
절정의 말씀이 지나고,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이 땅과 우리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현실로 돌아온 사람은 감동과 여운이 남습니다.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단테의 신곡 천국편 맨 마지막 문장도 그렇게 끝납니다.
“여기서 나의 환상은 힘을 잃었다. 하지만 일정하게 돌아가는 바퀴처럼, 내 소망과 의지는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이미 이끌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감동과 여운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동일합니다. 오늘 말씀은 감동과 여운의 말씀입니다.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히브리서 기자는 그 감동과 여운 속에 마지막 3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이것은 3개의 말씀이 아니라 3개의 생활입니다.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이제 이렇게 3개의 영적 생활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둘째는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일견 이것은 우리가 제목만으로도 알 것 같은 평범한 내용이지만, 그러나 여기엔 하늘을 보았던 영적인 여운과 감동이 배어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운 마음을 깊이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언어를 잊고, 삼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첫 말씀인 25절은 그런 배경과 의미 속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여기에 말씀하신 이와 경고하신 이가 나옵니다.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많은 시간 동안 많은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여기엔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가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들을 통한 땅의 경고와 예수님을 통한 하늘의 경고를 들으면서, 그 말씀을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네, 그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선지자들도 그것을 말씀했고, 예수님도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그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에 무관심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은혜를 받지 않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믿음을 저버리는 것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 그 길로 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것은 단순히 크고 작은 죄를 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죄를 지으며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거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참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평소 나의 시간표와 계획표에 늘 계셔야 합니다.
누구도 갑자기 좋은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갑자기 좋은 딸이 될 수 없습니다. 갑자기 좋은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갑자기 잘 믿지 못합니다. 갑자기 좋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어느 순간 한 번에 올 수 있어도, 믿음은 언제나 생활과 시간 속에 아름답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듣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은 이것이지만 하나님을 생각하여 저것을 선택하고, 내 마음은 이것이지만 하나님을 생각하여 저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생활 속에 우리가 보았던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점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는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내용은 2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그런데 여기에 ‘은혜를 받자’라는 말씀의 아래 각주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하자’네, ‘감사하자’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본래 이 말씀은 원어로 ‘에코멘 카린’입니다.
여기서 카린 즉 카리스는 은혜라는 말도 되고 감사라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이 카리스가 에코멘 즉 가지다라는 말과 함께 사용될 때는 대부분 감사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영어 성경도 ‘감사하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감사하자” 즉 감사하는 생활을 하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늘 흔들리고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로마제국도 그렇습니다. 대영제국도 그렇습니다. 미국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나라를 보여주시고 우리를 그 나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치유와 기적과 귀신 축출과 죽음과 부활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와 현실 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물어 가는 세상과 세상 나라에 소망이나 기대를 두어선 안 됩니다. 우주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사람들 속에 우주에 대한 기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도 세상도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잘 모를 때,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겪게 되고 들여다보게 되면, 어디나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과 같이 의인 열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시선은 항상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깨닫고 보니, 이미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분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조금만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밀면, 하나님의 손길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은 우리를 감싸시고, 우리는 하늘의 노래 소리를 듣고, 하늘의 예루살렘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하늘을 본 사람으로서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의무적인 감사나 종교적인 감사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번지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 나의 본향 집을 이미 소유한 믿음에서 나오는 소박하고 비밀스러운 감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 영적인 감동과 여운이 우리에게 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올려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예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내용은 28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
여기서 ‘섬길지니’라고 말씀하는 말은 ‘섬기다’ 혹은 ‘예배하다’라는 말입니다.
앞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감사하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예배하자고 말씀합니다.
네, 그렇죠.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히브리서 기자가 임의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을 그대로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96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자’라고 권면하는 오늘 말씀은 이 시편 말씀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내용에 대해 권면할 때,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경을 바탕으로 깊이 권면하는지 새삼 알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보고 하늘의 예루살렘을 본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런 의미를 가졌기에 중요합니다.
저는 예배를 싫어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합니다.
저는 인간적인 거짓된 예배는 싫어합니다. 장사를 하듯이 듣기 원하는 말씀을 나누고 축복하고 헌금을 걷고,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고 손님처럼 온 사람과 각종 종교의식과 인간적인 목적으로 가득한 예배는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골방에서 혼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는 얼마나 귀하고 중요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행위입니다. 아이가 부모님을 향해 활짝 웃으며 기쁘게 안길 때, 부모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기쁘게 예배하고 섬길 때, 큰 기쁨과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 참된 예배는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귀중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배에 대한 큰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체성의 상실이고, 강요된 숭배이고, 종교적인 틀과 프레임이고, 종교적인 장사라고 생각합니다. 헌금까지 내는 예배는 더더욱 싫습니다. 헌금은 교회 목사가 다 가져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런 모든 부정적인 이유들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예배하게 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의미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자발적인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존재도 그렇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그런 경배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요성을 모르고 예배를 싫어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배를 의무라고 느끼고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예배는 넓게 보면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 의식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우주 전체를 예배당으로 삼아, 우리 삶과 시간 속에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말씀의 영적 예배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래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오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래서 예배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한 주간 동안 자기 뜻대로 살다가 주일 날 예배당에 나와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예배자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선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훌륭한 영적인 예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삶을 살다가 주일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면, 최고의 예배가 됩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예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나님은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바로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그런 최고의 예배자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렇게 히브리서의 본론 마지막 3개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의 절정이 지나가고, 우리에게 조용히 임하는 감동과 여운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3개의 말씀을 각각 살펴본 결과,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생활,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예배하는 생활... 이것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생활입니다. 우리 삶과 생활 전체를 향한 포괄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기술이 아닙니다. 요령도 아닙니다. 비결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섬기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에 이미 도착한 성도로서, 이와 같은 신앙과 영적인 생활 속에 늘 기쁨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