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경주를 위하여
히 11:39~12:3
2024.05.05.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한 긴 11장 말씀을 마쳤습니다.
11장 마지막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나 아직 약속된 것은 받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약속된 것이란 우리의 최종 구원,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합니다. 우리도 아직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약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하나님의 백성에 비해 더 좋은 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고, 성령님이 오셨고, 예언은 성취되고, 계시는 완성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요한복음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래서 지금 신약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의 성취와 계시의 완성과 속죄의 완성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전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있다면, 이 영적인 온전함 가운데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시선을 돌립니다. 구약 믿음의 인물들로부터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주된 말씀입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 그러기 위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자, 또 인내하며 예수님을 바라보자...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오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맨 먼저 생각할 내용은 ‘경주’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믿음의 삶을 이와 같은 ‘경주’로 말씀합니다. 우리 믿음의 삶을 ‘경주’로 말하는 분은 히브리서 기자만이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디모데후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이렇게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과 사역을 달려갈 길, 즉 경주와 같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나 사도바울이나 왜 믿음의 삶을 경주로 말씀할까요?
네, 그것은 ‘경주’라는 말에 2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결승점이 있다는 특징, 둘째는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는 특징... 단거리든 장거리든 모든 경주는 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주로 우리 믿음이나 구원을 표현할 때, 종종 ‘걸어간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고...’
그런데 사실 좀 더 성경적으로 좋은 표현은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달려가고, 구원의 길도 달려가야 합니다.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어가기에는 세상도 역사하고 사탄도 역사하고 영적인 상황도 어둡고...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결승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달려가는 믿음이 되어야 할까요?
100미터를 달리듯이, 1,000미터를 달리듯이... 그렇게 달려가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경주를 말한다면, 마라톤입니다. 우리는 마라톤 선수와 같이 한평생 꾸준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다가 잠시 쉴 수도 있습니다. 가다가 잠시 물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일어나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맨 먼저 이 내용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삶은 경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믿음의 삶을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최종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결승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가...’
그런데 물론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내 힘으로 열심히 달려서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최선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혹 오해나 혹 부담감이나 이런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믿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래 목회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열심히 예수 믿읍시다... 우리 열심히 모입시다...” 이런 말 하라고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목회자는 신자들을 조금 귀찮게, 조금 불편하게 하는 목회자입니다. 마치 양치기 개가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처럼 일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저 양들을 바라보는 양치기 개와 같아서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참석해 주시고, 열심히 신앙생활 해주시길 바랍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 신앙을 보면, 우리가 여러모로 믿음이 안일해지고 나태해지는 일이 많습니다. 주일 외에는 신앙생활 안 하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겨우 주일날 예배드리고, 평일에는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안 하고 어떤 말이나 생각이나 결정 속에 하나님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신상을 집에 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집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 신상에 정성껏 절하고 빌지만, 그 외에는 전혀 그 신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신은 그저 나의 안전과 복을 위해 거기에 모셔둔 우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그렇게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그 어떤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일만이 아니라 한 주간 동안 열심히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고, 정직한 말과 선한 결정 속에 한 주간을 살아가고, 믿음과 인내 속에 일 년, 이 년... 그러면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늘 어린이/청소년 주일인데, 우리 현민이와 주해도 아직 청소년이지만 지금부터 이와 같은 믿음의 좋은 경주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거치게 될 많은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마다 많은 믿음의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항상 가까이 계셔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믿음의 좋은 경주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할 말씀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라톤 선수들을 봅니다. 그분들은 최대한 간편한 복장으로 뜁니다. 가방을 메거나 짐을 지고 뛰는 선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을 마시고는 물컵도 던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삶을 뛰어가기 위해서는 이 삶에 걸림돌이 되는 무거운 것이나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어떤 특별한 말이 아니라 일반적인 무거운 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믿음의 삶에 무거운 짐이 될까요?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내면적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 돈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의지와 의존, 불신앙적인 불안과 염려, 지속적인 어리석은 생각, 무분별과 추종과 맹신... 우리 내면에 이런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잘 달려가지 못합니다.
이어서 생활적으로 우선순위가 없는 생활, 거짓된 생활, 분주한 생활, 정직하지 못한 소득, 성실하지 않은 가난, 부자로서의 교만... 이런 생활들도 우리 믿음의 삶을 방해합니다.
이어서 사회적으로 잘못된 관계와 교제, 잘못된 제도와 관습, 잘못된 정치와 권력 아래에 있다든지, 신앙적으로 잘못된 신학과 성경 이해, 잘못된 의무와 율법 아래에 있다든지...
이렇게 우리 내면과 생활과 사회와 신앙적으로 다양한 것들이 우리 믿음의 삶에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죄가 아니지만, 죄를 낳고 자라게 하는 토양과 환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내면과 삶과 신앙에 이런 무거운 것들이 혹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지... 늘 살펴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내 믿음의 삶을 방해하고 누르고 있는가?...’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무거운 것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면, 이제 그것은 죄가 됩니다. 죄는 우리 믿음의 삶을 단지 무겁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삶에 실제적인 지장을 초래합니다. 죄는 영적으로 우리를 묶고 결박하고 차꼬에 채우고 쇠사슬로 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풀려면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회개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실천과 진실한 모습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는 기도해서 뚝딱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인정과 사과와 보상과 회개 기도와 회복과 돌이킴이 다 포함되는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믿음의 경주는 큰 방해를 받게 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교회 전체도 그렇습니다.
종종 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이런저런 불미스런 일과 뉴스를 접합니다. 많은 죄들이 나타났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네, 믿음의 경주가 심각한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전도도 되지 않고 성장도 되지 않고, 희망이 없다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개교회와 개인 신자로서 한국교회 전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나 한 사람만큼은 또 우리 교회만큼은 죄에 매이지 않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영원한 생명과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는 다 다릅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주의해야 하지만, 그래도 작은 죄는 우리를 약하게 매고, 큰 죄는 우리를 크게 맵니다. 또 크면서 오래된 지속적인 죄는 매우 강하게 우리를 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크고 작은 죄에 얽매이지 마시고... 아무쪼록 계속해서 달려가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말씀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새롭게 말씀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미 11장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이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고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는 ‘십자가와 같은 믿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와 같은 믿음, 십자가를 닮은 믿음, 조금은 슬프고 외로운 믿음... 이런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계속해서 바라볼 때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말씀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죠.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11장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렵고 힘든 믿음의 현실을 살았던 많은 선진들을 본받고 또 그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아, 이제 우리가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인내하며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내는 계속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불굴의 인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인내를 놀랍게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내입니다. 어려워도 어렵지 않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는 놀라운 인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거운 것을 벗고 죄를 벗고 인내해야 하는데, 결정적으로 그 놀라운 인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내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하고 능욕을 받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드디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고난받게 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 기쁨 가운데 인내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내의 모습은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입이 끊어진 그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한 사람을 구하는 좋은 일을 했는데, 지금 그들은 초라하고 괴로운 신세가 된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나올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요? 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장면은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아서,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렇게 사도들과 바울과 실라... 초기 예수님의 사도들은 아주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고난과 복음의 어려움을 기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놀라운 기쁨과 감사로 그들은 인내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놀라운 체험을 우리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 이 말씀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핵심을 말씀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오늘 우리의 이 차가운 현실을 이겨나가는 것... 믿음의 고난과 고통을 오히려 기뻐하는 것... 그 안에서 감사하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의 오리지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악합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과 돈과 성공을 이기적으로 추구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죄악된 세상에서 잘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여기서 잘 되고 성공하고 명예를 얻고 안락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렵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번 주 금요기도회 말씀에 세례 요한이 나왔는데, 세례 요한도 그런 길을 갔습니다.
그 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헤롯과 헤로디아의 한낱 정치적 희생물이 되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한낱 춤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것이 선지자의 현실이고, 또 그의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너무 초라하고 차갑죠. 그것이 우리 믿음의 현실이고,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운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은 이와 같은 믿는 자들의 초라함과 죽음과 패배에 이상하게도 기쁨과 승리를 줍니다. 감사를 주고 인내를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운명 같은 슬픔과 고난을 승리와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최종적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네, 십자가의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을 간직한 믿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앞으로 기독교가 타락하거나 잘못되는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여기서 타락하거나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가 되면, 우리는 타락하게 됩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과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사실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와 교회가 그런 타락의 길을 걸어가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품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경주를 위하여’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듣고마치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와 같이 믿음의 경주를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이 믿음의 경주를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하고 거기로부터 오는 인내가 필요하고 죄와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과 은혜와 삶을 우리 모두에게와 우리 자녀들에게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