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비전
히 11:20~22
2024.04.21.
히브리서 11장 말씀은 이제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아시다시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각각 창세기 말씀 안에서 많은 사건과 파란만장한 이야기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80세를 산 이삭의 생애는 비교적 짧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147세를 산 야곱의 생애와 110세를 산 요셉의 생애는 매우 상세하고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길든 적든...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주목하는 내용은 하나입니다.
- 믿음으로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믿음으로 야곱은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하고 경배하였으며
- 믿음으로 요셉은 이스라엘이 떠날 것을 말하고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렇게 이상하게도,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생애 가운데 믿음으로 산 많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을 믿고 여러 우물을 판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물을 양보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믿고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고생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극적으로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믿고 보디발의 집에서 집사가 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억눌렸던 감정을 풀고 울며 형들을 용서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모든 일반적인 믿음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만 이 세 사람이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했던 축복과 경배와 눈물 어린 당부에 대해서만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 신자들은 다가오는 박해를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두려운 현실만 보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 눈앞의 두려운 현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던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말씀하길 원합니다.
아울러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세 사람의 생애의 마지막 믿음의 모습과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유대인 신자들의 삶과 믿음도 이렇게 축복과 경배와 소망으로 마무리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어쩐지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늘은 우리가 이 내용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도 복을 많이 주셨지만, 이삭도 복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삭은 흉년 때에 블레셋의 그랄 땅으로 내려가 한동안 살았습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그때 큰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흉년 때에 그런 풍작을 거두었다면, 정말 대박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삭을 블레셋 사람들이 매우 시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그 땅에서 살지 못하고, 자기가 판 우물을 계속 양보하며, 다시 산지로 올라가 생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삭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라고 세심히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붙들어 주셨던 것처럼, 이삭도 동일하게 붙들어주셨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의 그와 같은 약속은 증거로 나타났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과 함께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화친을 제안하며, 서로 해하지 말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삭은 그들과 맹세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는 이삭이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아, 당시 그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인물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성공한, 그 땅의 유력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삭이 나이가 들고 눈이 어둡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이제 우리가 잘 아는 한 가지 일을 서둘러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아들을 축복하는 일이죠.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고 거부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자신의 가족을 하나의 큰 민족으로 번성케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일은 자신의 아들들을 통해서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남자다운 에서가 조용하고 얌전한 야곱보다 이 일에 더 적합한 인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삭의 큰 실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 이삭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도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네, 하나님은 이미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이루어가시는 이 큰 역사에 야곱을 사용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9장 말씀과 같이, 그 두 아이가 아직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고, 그렇게 야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최종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택을 불공평하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곱이 선택되었다고 해서 야곱이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도 아니고, 에서가 선택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에서를 아주 버리시고 그를 무조건 구원에서 배제하신다는 의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크신 구원의 역사에 야곱을 선택하시고 이제부터 야곱과 함께하시며 그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그때 누구를 축복해야 했을까요?
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야곱을 축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에서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몇 시간 뒤 이삭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이것을 알고 두려운 마음에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삭은 비록 에서가 애원했지만, 하나님의 그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축복을 취소하거나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축복에는 큰 실수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바로잡으셨고, 이삭은 그런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 믿음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야곱을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본래 창세기에 야곱의 축복은 2번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 48장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르우벤에서 벤야민까지 열두 아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2번의 축복 가운데 유독 첫 번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일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해서 바라본 믿음을 말하고자 한다면, 두 번째 축복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열두 아들에게 축복한 두 번째 축복이 그런 믿음의 비전을 말하는 데에 더 적합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의 두 번째 축복보다는 첫 번째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첫 번째 축복에 이삭의 축복과 같은 특별한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축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이 축복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생 야곱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은 장자인 므낫세가 야곱의 오른손으로 축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을 오른손으로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생 에브라임에게 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야곱의 두 축복 가운데 첫 번째 축복을 말씀한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우리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과 고난을 주시는지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방법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까지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에 대한 말씀까지 포함하여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믿음의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은 성공한 사람이고 부자이고 그 땅의 유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현실을 자랑하거나 거기에 도취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바라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야곱도 험한 세월을 살며 결국에는 영적으로 승리하고 육신적으로도 승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바라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임종 때에 ‘한평생 잘 살았다, 여한이 없다...’ 그런 과거를 돌아보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미래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들들을 축복했습니다.
요셉도 애굽의 총리가 되고 모든 것을 이루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자손 삼대까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그 현실을 자랑하거나 거기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임종 때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축복하고 자신의 유골을 그 땅으로 가져가기를 당부했습니다. 여전히 겸손히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믿음의 비전을 줍니다. 믿음의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말할 때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않고...’
이렇게 참된 믿음의 비전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약속과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꿈을 꾸고 야망을 가지고 소원을 품을 수도 있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비전은 그런 우리 인간적인 꿈이나 소원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믿음의 비전이 없었다면,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평범한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한 삶과 현실에 고무되어 그것을 자랑하며 일생을 마친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고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바라보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비전과 묵시가 없으면 우리는 방자하게 됩니다. 하늘에서 보여주시는 비전과 묵시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그 말씀의 부재 속에 무질서해지고 부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2가지 방향으로 부패하게 됩니다. 교만하거나 절망하거나... 교만하는 사람은 한없이 교만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한없이 절망합니다.
하나님 없이 잘 되는 사람은 부패하여 한없이 교만해집니다. 조금 비싼 차를 타고 조금 비싼 집에 살고 조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교만해지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하나님 없이 잘 못 되는 사람은 부패하여 한없이 절망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꿈이 무너질 때, 자기 삶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원망하고 절망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자살하는 사람이 안타깝게도 매년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OECD 회원국 1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전과 묵시가 없음으로 세상 속에 한편으론 교만하고 한편으론 절망하면서 부패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삭과 야곱과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과 약속과 말씀 안에서 믿음의 비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자녀들을 향한 믿음의 비전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단순히 좋은 직업 가지고 잘 살고 결혼 잘하는 것을 넘어서... 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속에 하나님을 아는 아브라함 같고 사무엘 같고 다니엘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고, 능히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영적인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보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 자신을 향한 믿음의 비전도 필요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와 이유를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과 모습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에 나의 달려갈 길을 아름답게 마치는 모습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비전이라고 해서 어떤 큰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믿음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과 은혜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비전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충만할 때 우리 앞길은 어둡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고 기도를 늘 하는 사람이 낙심하는 일은 없습니다. 어려워도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가 약해지면 우리 앞길은 어두워집니다. 어두운 마음이 몰려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비전을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를 향한 믿음의 비전도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참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와 신앙 자체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고 외적으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참된 교회라고 하고 다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목회자나 신자나 냉철한 말씀 속에 스스로 분별하지 않으면 세상에 사로잡히고 엉뚱한 것을 믿는 교회와 신앙이 됩니다. 잘못된 것을 말하는 사람이 많고, 잘못된 것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가급적 많이 해석합니다. 제가 성경을 많이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설교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분들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읽을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두세 사람이 모여도 능히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지금 어느 때보다 참된 교회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향한 그런 믿음의 비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부흥시키시고 성장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양적 성장만큼이나 질적인 성장도 허락하셔서, 우리를 참된 믿음의 공동체로 만드시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와 세상을 향한 믿음의 비전도 필요합니다.
구약 시대 예언자들은 그 시대에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있다면, 세상을 향해서도 올바른 믿음의 비전이 생깁니다.
시대와 역사를 보는 믿음의 비전, 세상의 영적인 현실을 보는 믿음의 비전,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믿음의 비전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 가운데 세상을 향한 올바른 믿음의 비전이 있는지... 적어도 저는 그리 밝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 총선이 끝난 후 이번 총선을 평가하는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좋은 말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 내용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 믿는 사람만 ‘아멘’할 수 있는 좁은 내용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좁고 가리어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세상과 시대를 올바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비전과 하나님의 시각을 허락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믿음의 비전을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시고 요셉과 함께 하시며 믿음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믿음의 비전을 주십니다. 그것은 더 확실한 믿음의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자녀들의 앞길도 봅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도 봅니다. 이 사회와 세상이 나아가야 할 미래도 봅니다. 그런 믿음의 비전 속에 귀한 기도가 나오고,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과 믿음의 비전을 주셔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보게 하시고, 부패한 이 세상 속에 함께 부패해지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