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
막 6:1~6
2024.04.19.
지난주 마가는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죽음과 질병을 넘어서는 나라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가는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빵과 떡을 넘어서는 나라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빵과 떡...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는 어쩌면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중요한 당면과제이죠. 하나님 나라는 최종적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절정의 문제를 말씀하기 전에, 잠시 흐름을 끊고 몇 가지 부수적인 사건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사건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사건입니다.
셋째는 침례요한의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이 내용들은 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각각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부와 확산과 위협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거부하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가버나움에서 약 5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나사렛에 도착한 예수님은 그곳 회당에 초대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마가는 그 내용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그 내용은 누가복음 4장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건네받은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런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그리고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그것은 이사야서를 해석하시는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던 나사렛 사람들에게서 이상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웅성거리다가 급기야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이 사람이...’ 그들은 계속 이런 무례한 표현으로 예수님을 부르면서 예수님의 설교를 중단시키고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은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한 말씀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때 온 땅이 흉년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의 사렙다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네, 이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신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흥분했고 예수를 급기야 동네 밖 낭떠러지로 몰고 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런 과격한 내용을 다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거기서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고,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얼핏 우리는 그 상황이 이해가 가긴 합니다. 예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동네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모친과 동생들이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을 떠난 그에 대해 놀라운 소문이 들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늘은 드디어 제자들을 데리고 나타나 회당에서 설교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그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 설교의 내용도 무척 놀랍고 파격적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그 놀라운 메시아 예언이 지금 자신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 자가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는가?, 이 자가 어디서 이런 지혜와 권능을 가지게 되었단 말인가?’ 하면서 강한 거부감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에 그런 그들의 반응과 거부감이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과 달리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을 이상히 여기셨을까요?
우리는 그들을 이상히 여기시는 예수님이 더 이상한데... 이럴 땐 원문을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상히 여기셨다’는 원문의 정확한 표현은 ‘놀랍게 여기셨다(에다우마젠)’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들의 불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의 예상치 못한 불신에 놀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놀라셨을까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제법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통해 많은 놀라운 말씀과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주신 명백한 하나님의 역사였죠.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 마을을 방문하시면서, 고향 사람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도 들을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은 그들의 변하지 않은 생각과 굳은 모습에 놀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보여주면 하늘을 믿어야 하죠. 하나님을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하죠. 그게 정상입니다. 하늘의 역사도 보고 하나님의 역사도 보았는데, 그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닫힌 모습입니다.
앞서 마가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말씀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믿고 내가 그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절망했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고향 사람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놀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정상적인 사람은 슬픈 일에 슬퍼하고 기쁜 일에 기뻐하고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워합니다. 또 놀라운 일에 놀라고 올바른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슬퍼도 슬퍼하지 않고 기뻐도 기뻐하지 않고 부끄러워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놀라도 놀라지 않고 아무리 올바른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이 악과 거짓과 무지와 불신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일은 안 된 일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그것은 안타깝고 끔찍한 일입니다. 내가 미워하거나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내면은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면 양심에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누가 옳은 말을 하면 들어야 하죠.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아무리 아이라 하더라도, 옳은 말과 바른 말을 하면, 그 말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악한 세상에 그런 정직한 사람은 점점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이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닫힌 모습, 진리를 거부하는 완악한 모습, 믿을 수 있는데 믿지 않는 불신의 모습... 마가복음이 이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과 같이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이 선한 자와 정직한 자와 참된 것을 믿는 자에게 임하는 나라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마음과 정직한 본성을 지켜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