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믿음이 없느냐 (1)
막 4:35~41
2024.03.08.
우리는 종종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놀라운 내용이라서, 혹은 너무 이해가 안 되어서, 혹은 지금과 너무 달라서... 당혹감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도 2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당혹감을 안겨줍니다. 오늘은 그 내용 중 하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저물 때에 배가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금방 어두워졌을 텐데... 불빛 하나 없는 갈릴리 호수 가운데 갑자기 돌풍이 불고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가득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구조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캄캄한 밤에 돌풍이 불고 풍랑이 치고 물이 들어오고 위태로우면 정말 겁이 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어부 출신 제자들이라도 ‘지금 정말 큰일 났다, 지금 우리 죽을지도 몰라’ 이런 말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모르시는 것처럼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무서워한다고, 또 믿음이 없다고 말이죠.
한편 예수님만 이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설교자가 제자들을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이죠. 자신들은 캄캄한 밤에 호수 한가운데에서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도 않고, 마치 자신들이 예수님인 양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당혹감을 느낍니다.
제자들은 정말 무서워서 무서워했는데 왜 그렇게 책망하셨을까?... 예수님은 사랑과 이해가 크신 분이신데, 어쩐지 그날 밤 호수 한가운데에 계셨던 예수님은 다른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것은 마가가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이런 모습으로 기록해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가끔씩 성경은 친절하지 않다 말씀드리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친절하지 않아서 우리의 작은 궁금증들을 무시합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나는 내 할 말을 하겠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 모습이 대체로 경전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날 밤 함께 떠난 다른 배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 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가는 일절 그런 얘기를 안 해줍니다. 그래서 ‘아니 그러면 얘기를 안 할 거면, 처음부터 다른 배들 얘기를 하지 말든지’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마가는 왜 이렇게 글을 쓰는 걸까요?
네, 아마도 마가가 그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내용을 일일이 다 쓰기가 어렵기도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내용에 집중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차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이 사랑이 없으시겠습니까? 왜 예수님이 그때 제자들의 마음과 어려움을 모르셨겠습니까? 그러나 마가는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과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글을 쓴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을까요? 무서워하는 그 불쌍한 제자들을 왜 그렇게 냉정하게 책망하셨을까요?
네, 예수님은 제자들의 어려움을 보셨지만, 그러나 제자들을 책망하셔야 하는 이유와 뜻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첫 말씀에 있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 여러분, 그날이 어떤 날이죠?
마가에 의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나눈 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그 해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다스림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영적 현실이 이 땅의 현실 속에 임하고 자라는 것을 하루 종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날 해가 저문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호수 가운데 돌풍과 풍랑이 몰아치자, 제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위기가 닥치자, 영적 현실은 사라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망은 그들의 당면 현실과 어려움을 모르는 일방적인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는 책망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살아선 안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의 현실로만 살지 않고 초월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삶의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살아가는 것이죠. 제자들은 조금 전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바람과 풍랑 앞에 들은 말씀을 모두 잃어버리고 두려워하고 우왕좌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통치와 다스리심을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과 태도를 보셨기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면서 현실을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기대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어려움이 자꾸 생기고, 현실이 나를 압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비록 보이는 현실이 그렇지만, 영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가운데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과 믿음이 있는 한, 하나님은 나를 언제나 지켜주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이 다이고 전부라 믿는다면, 아직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언제나 어떤 자리에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결과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고 요동치 않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결과는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응답은 지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런 믿음이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변화될까요?
네,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존감이 있고 무게감이 있습니다. 어려워도 너무 걱정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이 방법 저 방법 찾지 않습니다. 내가 범사에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을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부족한 목사이고 인간적으로 연약하고 가벼운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깃털 같은 가벼움과 연약함이 제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다스리심이 임할 때, 제 안에 믿음의 평안과 위로가 넘칩니다. 하나님이 제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저를 늘 인도하신다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캄캄한 밤과 풍랑이는 바다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만약 현실 속에서 어쩔 줄 몰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 예수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준엄하게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사시고 너무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 산다면... 여러분의 일과 길,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고민과 어려움... 구할 때마다 그리고 일일이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그런 은혜와 믿음이 언제나 가득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