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히 11:1
2024.02.25.
앞 본문에서 믿음의 길을 강조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본격적으로 믿음에 대한 말씀을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유명합니다. 오늘은 그 첫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첫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우선 여기서 말씀하는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소망이나 바램들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그런 우리의 개인적인 소망이나 바램이나 소원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소망들 즉 우리의 새로운 삶과 우리의 최종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이 주신 소망에 대한 실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위로와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실상이다’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참 좋은 말씀 같은데, 아쉽게도 선뜻 그 의미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에 있는 실상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실상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합니다. ‘북한 주민들의 실상, 피해 주민들의 실상...’ 그래서 일반적으로 실상은 ‘실제 상황, 실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실상이 그런 의미일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 상황 혹은 실제 상태이다... 여기서 실상을 실제 상황보다는 실제 상태로 보는 것이 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 상태이다. 그런데 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실상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원어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실상은 헬라어 원어로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아주 광범위한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에도 그런 말이 있죠. ‘정’이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정은 감정도 되고 정서도 되고 사랑도 되고 우정도 되고... 복잡한 말이죠.
그런 것처럼,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말도 그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사용하는 사람과 문맥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그래도 크게 2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실체, 실제, 실물, 그리고 본체, 본질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는 히브리서 1:3 말씀의 휘포스타시스가 이런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둘째는 확신, 신뢰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3:14 말씀의 휘포스타시스가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래서 휘포스타시스를 첫 번째 의미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두 번째 의미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 말씀이 많이 달라집니다.
첫 번째 의미로 생각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라고 해석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객관적 실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아주 강한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천둥과 번개는 하나이죠. 둘은 항상 같이 옵니다. 번개가 먼저 번쩍이면, 조금 뒤 반드시 천둥이 칩니다. 그런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앞서 우리에게 오고, 믿음이 오면 반드시 바라는 것들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한편 두 번째 의미로 생각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요’라고 해석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주관적 확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가 믿음에 대해 평소 잘 알고 있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느 것이 올바를까요?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객관적 실제일까요? 아니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주관적 확신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믿음을 강한 의미로 말씀하는 걸까요?, 아니면 평범한 의미로 말씀하는 걸까요?
네, 일단 이 말씀의 해석은 학자들이나 주석들이나 여러 성경들 사이에서 통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로 보기도 하고, 두 번째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한글 성경도 다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은 원어를 직역해서 그냥 ‘실상’이라고 모호하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첫 번째 의미도 될 수 있고 두 번째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어 성경은 첫 번째 의미로 번역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그러나 쉬운 성경은 두 번째 의미로 번역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영어 성경들도 비슷합니다.
영어 성경들은 두 번째 의미인 ‘확신’으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첫 번째 의미와 두 번째 의미의 중간 의미인 ‘보증’으로 번역하는 것이 많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보증이며...” 보증이라는 말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까지는 아니지만, 단순한 확신보다는 훨씬 큰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해석이 이렇게 나누어지는 것은 이 말씀의 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엘렝코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증거라는 의미도 되고 내적 증거, 즉 확신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앞 문장에서 믿음을 실체, 실제, 실물이라고 강하게 이해하는 분들은 뒷 문장도 믿음을 객관적 증거라고 강하게 이해하고, 반면에 앞 문장에서 믿음을 확신이라고 온건하게 이해하는 분들은 뒷 문장도 확신이라고 온건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객관적 실제인가?, 아니면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주관적 확신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강한 의미로 말씀하는가?, 아니면 일반적인 의미로 말씀하는가?
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학자들도 주석들도 성경들도 다 다르게 말하는 문제를 한 평범한 목사가 감히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네,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결론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둘 다가 가능하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방원도 아니고 황희 정승도 아니지만, ‘이것도 참 좋고 저것도 참 좋습니다’가 아니라, 둘 다가 가능하기 때문에 둘 다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이렇게 둘 다 해석이 대등하게 가능한 경우, 대체로 그 답은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일부러 그렇게 이중적인 의미로 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궁극적으로 기록한 성령님도 그런 이중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문맥을 생각하면 믿음은 주관적 확신이다’, 혹은 ‘아니다, 사용된 단어를 생각하면 믿음은 객관적 실체이다’... 이렇게 싸우거나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 믿음은 우리의 주관적 확신임과 동시에 객관적인 영적인 실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확신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확신입니다. 믿으십니까? 확신의 믿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시대는 믿음이 없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마지막 때가 될수록, 믿음은 점점 사라집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믿음의 부재는 이 시대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못하고... 그래서 영원한 것이 없는 이 세상 속에 우리가 무엇을 참 믿기 어렵습니다.
사람도 믿을 수 없습니다. 좋은 분들이 많지만, 그러나 우리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영원하지 못한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지만, 종교와 종교적 가르침은 늘 결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적 가르침을 구분하지 못하여, 중세의 마녀 사냥과 십자군 전쟁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과학도 믿을 수 없습니다. 과학도 늘 새로운 것이 나옵니다. 전에는 이런 이론이 맞았는데, 지금은 저런 이론이 맞습니다. 얼마 전까지 과학 트렌드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말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이미 결정 되어있다... 그런 결정론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이론이 나오고 있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시대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믿음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무엇을 믿고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을 매우 어리석은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심지어 매우 위험한 행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 속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확증 편향에 갇힌 것이라고 낮추어 봅니다.
이렇게 지금 이 세상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도 믿을 수 없고 종교도 믿을 수 없고 지식도 믿을 수 없고 과학도 믿을 수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믿음을 모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도 참된 믿음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어두운 세상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이 세상에 참된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거기엔 반드시 아름다운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를 낳고 기르면, 거기에도 아름다운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많지만,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정직하고 귀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에 참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사랑과 신뢰를 통해 누군가를 믿고 무엇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가 인격적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참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올바르고 합당한 일입니다. 그것은 어리석거나 미숙한 행위도 아니고, 종교적인 확증 편향에 빠지는 잘못된 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차적으로 믿음에 대하여 불신하지 말고, 이차적으로 믿음이란 확신인 줄 알고... 이와 같은 이해와 바탕 속에 하나님을 깊이 확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과 같이, 믿음은 확신입니다. 마지못해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적당히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고 저것은 안 믿고... 선택적으로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확신입니다.
비록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다 믿을 수 없는 생각과 갈등이 있고 우리밖에는 엄연한 현실이 있지만, 우리가 그것과 싸우며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독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이 주신 소망에 대해 전적으로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의 복된 사람이 됩니다.
둘째,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의 성취를 보증하는 영적인 실체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확신이지만, 그러나 믿음은 한 사람의 주관적 확신에 그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놀라운 믿음을 선물처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직장을 다니다가 처음 선교단체 간사가 되었을 때입니다. 간사가 되면 맨 먼저 모금훈련을 받습니다. 후원자를 찾고 후원요청을 어떻게 하는지... 2박3일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을 잘 받고 믿음이 충만해져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를 탔습니다. 급하게 타느라 입석표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영등포역을 지날 때 저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기차역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 IMF시기에 누가 날 후원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이제 내 힘으로 살지 못하고 후원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자리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무 자리에 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웅크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는 사람도 많이 없고, 도와줄 사람도 많이 없습니다...’ 그런 기도를 천안인지 대전인지 도착할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등에 무언가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냥 제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그냥 끝나버렸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창피하게 기도하고 있었지’ 하는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천안역 인가에 도착하고 좌석 주인이 왔습니다. 저는 세련된 표정으로 ‘아 네~’ 하고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특별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믿음을 영적인 실체처럼 받고 10년간 간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제가 신학교를 다니고 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금요기도회 시간에 어른들이 기도회를 하는 동안 몇몇 아이들이 예배당 바깥 휴게실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아이가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목사님이 얼른 나가셔서 그 아이를 안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위 성도님들도 다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아이를 봤을 때, 제 생각엔 빨리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눈이 뒤집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도를 하긴 했지만, 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할 텐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정말 놀랍게도 제 머리에 “이 아이는 괜찮다” 라는 생각이 음성처럼 들어왔습니다. 그건 정말 제 생각이 아니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대체 이런 괴상한 생각이 어디서 왔지?’ 하면서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아이가 괜찮아졌습니다. 눈이 돌아오고 호흡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성경 안에서 당연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에게 그렇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한나는 아이가 없어 괴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가 기도할 때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엘리 제사장이 볼 때,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이 마치 취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기도하는 한나에게 ‘당신이 언제까지 이렇게 취해 있겠느냐’고 하면서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하였습니다.
한나는 기도를 중단하고 자기 사정을 설명하였죠. 그러자 오해를 푼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축복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평안히 가라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그다음 성경 말씀이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이 말씀을 보면, 한나에게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나의 기도와 엘리 제사장의 축복과 그리고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대화 사이에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아직 아무런 바뀐 것이 없었지만, 얼굴에 근심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나에게 믿음이 임했고, 그 후에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는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망명 생활을 하던 때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그들이 살던 성읍이 아말렉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돌아와 보니, 아말렉이 성읍을 불태우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다 사로잡아 갔습니다. 소리 높여 울던 그들은 갑자기 모든 원성이 다윗에게로 향하였습니다. 고달픈 망명 생활, 원치 않는 전쟁, 처와 자식들의 불투명한 생사... 이 모든 것이 다 다윗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급기야 다윗을 돌로 치자는 선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다윗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 역시 아내를 빼앗겼는데, 백성들은 자신을 원망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 상황을 사무엘상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런데 그런 위기의 상황 속에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다음 말씀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믿음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아멜렉을 추격하여, 아말렉을 물리치고 사로잡힌 가족들과 자녀들을 다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다윗의 믿음은 자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너무나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놀라운 실체로서의 믿음이었고, 그리하여 그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가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면 실체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내려오는가?, 우리의 확신이나 믿음은 실체로서의 믿음이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실체로서의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의 소망과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못해도, 하나님을 간절히 신뢰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실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실체로서의 믿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와 확신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은 단순히 우리의 주관적인 확신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으로 이와 같은 실체로서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그런 귀한 실체로서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렇습니다. 외조모 로이스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단단한 믿음이 그분 안에 실체처럼 만들어졌습니다. 일희일비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믿었다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 믿었다가...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결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의 믿음을 보고 어머니 유니게도 동일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유니게도 어려움 가운데 그렇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실체가 되고 유산이 되고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영적인 눈으로 본 사도바울은 그 믿음이 지금 디모데에게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우리가 가지자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확신이지만, 그것은 자라서 영적인 실체가 됩니다.
물론 실체가 되었다고 다 이루어지고 다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를 하나님과 소망으로 인도하는 큰 능력이 됩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과 우리 교회가 그런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