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두 번째 경고
히 10:26~31
2024.02.11.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의 두 번째 경고의 말씀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책망과 경고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책망이나 경고는 지나간 옛날 방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권 의식도 많이 높아졌고, 교육 방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전문가는 다양한 문제를 가진 아이를 전혀 책망하지 않고 개선을 이루어 내는 것을 보여줍니다.
섣부른 책망이나 경고, 함부로 책망과 경고를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러나 책망과 경고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책망도 받고 경고도 받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 책망과 경고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달게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총 3번의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3번의 경고의 말씀에는 공통된 두려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불’입니다.
첫 번째 경고는 6장에 있습니다.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두 번째 경고는 오늘 본문입니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니라”
세 번째 경고는 12장에 나옵니다. 이 세 번째 경고가 히브리서의 결론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그런데 이와 같은 히브리서의 경고는 각각 다른 내용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가지 내용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같은 내용을 3번 삼중적으로 반복하면서, 신약성경 안에서 가장 강력한 경고의 말씀 중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 표현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이런 모든 생생한 표현들은 이 경고가 얼마나 큰 경고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은 모두 무엇을 경고하는 것일까요?
네, 그것은 바로 배도와 배교, 즉 예수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1세기 로마에서 예수님을 믿던 유대인 신자들은 사회적 불이익과 어려움과 박해를 피해, 안전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 앞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로마가 공인하는 유대교로 돌아가면 자신도 가족도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안전할 뿐만 아니라, 유대교로 돌아가는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굉장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것을 배교라고 경고합니다. 그것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중대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지금까지 왜 그것이 배교이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인지... 자세히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1세기 경고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1세기 로마교회 유대인 신자들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지식으로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지금 우리와 상관이 있고, 필요하고,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3가지입니다.
첫째, 믿는 자의 배교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닙니다. 칼빈의 구원론이나 예정론을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을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받아주셨지만,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칭의는 아닙니다. 칭의는 법정적 의미만이 아니라 관계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실한 언약 관계 속에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여러 번 의롭다하심을 받았고, 마침내 최종적인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내용을 6장에서 첫 번째 경고의 말씀을 살펴볼 때, “가시와 엉겅퀴”라는 설교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를 포함한 모든 성경 말씀은 신자의 구원의 확신과 안전을 말씀하면서도, 동시에 책망과 경고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최종적으로 받았고, 배교는 불가능하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계속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 배교는 오늘날에 실제로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안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신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유럽은 교회당이 텅텅 비었고, 미국의 교회도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신학교가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교회가 문을 닫고 신앙생활을 그만두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단순히 그들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칼빈주의 구원론은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실패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메마른 신학적인 생각은 궁극적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을 비난하고 방관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그런 사랑이 없는 예정론이 아닌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 것과 같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고 필요하면 책망하고 경고까지 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어느 날 이 무의미한 무신론적인 세상에서 신앙의 위기를 만나고 마음이 달라지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교회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목회자로 세워진 디모데에게 이런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에게도 믿음의 파선과 배교가 일어나고 돌밭이 되거나 가시떨기 밭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이 히브리서의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여기서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예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셨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지식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알 만큼 압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지식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서재에 만권의 책을 읽고 쌓아놓더라도, 그것은 한 줌의 지식에 불과합니다. 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요즘은 무슨 책을 보십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잡초에 대한 책을 보고 있습니다.” 참 쓸쓸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온전히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짐짓 죄를 범한다’는 말씀은 ‘고의로 죄를 범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범하는 일반적인 고범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알면서도 고의로 어떤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말씀대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과 맹렬한 불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부터 그럴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님을 오늘 말씀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래 26절 앞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그래서 이 말씀은 앞 문단과 연결된 말씀이지, 고의적인 죄에 대한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앞 문단은 ‘우리가 예수님의 영원한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생활을 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26절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배교’를 의미합니다.
이 사실은 28절에서도 확인됩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여기서 ‘폐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명백한 거역과 배교를 말할 때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 사실은 고의적인 범죄에 대해 말씀하는 구약 민수기 15장 말씀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 온전히 끊어지리라”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이라는 말씀의 원문 표현은 ‘손을 높이 들고 죄를 지으면’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어떤 단순한 고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노골적으로 명백히 죄를 짓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기에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이 단순한 고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죽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저버리고 유대교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말씀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은혜의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유대교와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은 성령의 은혜가 거두어집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영혼이 걱정되고 무섭지만, 정작 그 사람은 무섭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의 안식처가 되고, 그의 영혼을 취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히브리서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할 세 번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믿는 자라도 배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지금 배교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성경 말씀이 앞으로 박해와 미혹이 있고 그래서 큰 배교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7년 대환란... 이것은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해석할 때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초창기 우리나라 교회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도 7년 대환란을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종말의 마지막 특정 시기에 7년 대환란이 찾아오고,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그런 대환란 전에 휴거된다는 해석은 잦아들고 있습니다.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교회와 신자들에게 전반적인 박해와 미혹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박해와 미혹은 사탄이 역사하는 2가지 무기입니다. 사탄은 때로는 미혹하고 때로는 박해하면서, 교회와 신자들을 공격합니다.
이와 관련 요한계시록 11장은 사탄의 그런 공격에 대하여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바깥마당이 유린당하고 짓밟힌다는 것은 교회가 그 생명력을 완전히 잃지는 않지만, 심각한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이 말씀의 해석에 있어서, 성전 바깥마당을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신자로 해석하여 참된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해석이 있지만, 그러나 그런 해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전 바깥마당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깥바당이든 안마당이든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점에서,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참된 신자와 형식적인 신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사탄의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는 공격을 받지 않는다, 택함 받은 참된 신자는 안전하다...” 그렇게 안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면, 넘어지는 불행한 자는 바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11장 말씀에서 두 증인이 나옵니다. 이 두 증인은 말세에 나타날 특별한 2명의 실제 예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그 두 증인과 전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그 두 사람은 개인이 아닙니다.
두 증인은 마지막 때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숫자 둘은 교회의 증언의 신실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말씀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인다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보고 기뻐한다고 예언합니다.
그러면 이 예언은 어떤 예언일까요? 네, 교회와 신자는 패배하고 초라해진다는 예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패배한 교회를 보고 기뻐한다는 예언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말씀하는 비밀 중 하나입니다.
이런 예언은 요한계시록 13장 말씀에도 나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여기서 말씀하는 짐승은 용이 권세를 준 첫째 짐승입니다. 첫째 짐승은 요한일서와 요한이서가 말씀하는 적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첫째 짐승이기도 하고 적그리스도이기도 한 이 존재 혹은 이 사탄적 국가는 성도들과 싸워 이긴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교회와 신자들이 패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패배한 신자들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되어 짐승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13장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두려운 요한계시록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와 신자들을 향한 마지막 때의 사탄의 공격과 미혹... 그러한 역사가 계속될 때,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배교입니다.
이와 관련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런 특별한 말씀을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사도바울이 말하는 불법의 사람, 즉 멸망의 아들은 요한서신이 말하는 적그리스도와 동일하고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첫째 짐승과 동일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사탄적 국가 혹은 그 국가의 정치지배자인데, 그가 종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교회에 손을 뻗쳐 역사할 때,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큰 배교가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과연 그런 배교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런 배교의 가능성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교회는 교단 차원에서 신사 참배를 의결했습니다. 그중에는 군복을 입고 설교한 목사도 있고, 예배 중에 천황을 향해 요배를 드린 교회도 있었습니다.
차라리 교회 문을 닫으면 닫았지, 그런 배교는 교회 역사 속에서도 흔하지 않은 배교입니다. 그런 배교는 우리 한국 기독교의 어두운 과거이자 지금도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배교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배교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흐려집니다. 신자들도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달콤한 설교를 좋아하게 됩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정치와 종교가 가까워집니다. 정치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옹호하고 선동하게 됩니다.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했듯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이 교회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그 결과 마침내 교회는 하나님이 아닌 적그리스도를 선택하는 배교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 한국의 교회들 안에 배교의 환경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많이 흐려져 있습니다. 한 예로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교회 안에는 긍정의 힘과 적극적인 믿음과 비전이 유행했습니다. 그 가르침은 성경적인 가르침도 아니고 그 시작도 교회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 성장과 부흥에 목마른 대부분의 교회는 그 메시지에 매료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그 메시지들이 사라졌습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기독교의 믿음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열풍이 잦아든 지금,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우리 교회들이 그런 세상적인 메시지를 이질감 없이 너도나도 받아들였나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의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 있는 교회와 신자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이 우리 삶과 생활의 변화와 열매라는 것을 교회가 일관되게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이단으로 넘어갑니다. 이단 교주들은 백이면 백... 삶과 열매가 없고 어지럽고 추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교회마다 신자들이 말씀을 잘 알고 또한 말씀의 결과는 삶과 열매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면, 그런 거짓된 교주들을 그렇게 많이 따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가지 현상과 일을 볼 때, 안타깝지만 지금 교회 안에 배교의 환경은 잘 이루어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지금 우리의 많은 교회와 목회자와 신자들이 정치에 매우 가까워져 있습니다.
정치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많고, 교회 안에 정치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선거 때가 아니라도, 정치가 교회와 신자들을 많이 흔들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한국의 보수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분들은 한국 정치에 있어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 그분들은 그런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들은 자신의 뿌리를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당과 야당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공평히 권면하거나 공평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 편에 서서 다른 한쪽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회가 세상 정치와 가까워져 있는 현실, 나아가 교회가 어느 한쪽의 정치와 가까워져 있는 현실... 이런 현실 속에 배교의 환경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겠지만, 슬프게도 어느 날 교회는 하나님보다 정치를 선택하고, 하나님보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의 적그리스도를 선택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예언된 이 말씀, 즉 ‘밖으로는 박해와 사회적 불이익과 유혹이 일어나고, 안으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배교가 일어난다’는 이 말씀을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히브리서 말씀은 1세기 성도들을 향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준비되지 못한 성도나 깨어있지 않은 성도는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떠나고 또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와 분별과 믿음 속에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배교를 말씀한 후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종말에 있을 신앙의 위험과 유혹에 대해 늘 경고하고 가르친 참된 사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의 경고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경고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사전에 ‘나는 하나님을 혹시 떠날지도 몰라...’ 그런 단어나 생각이나 상상은 온전히 지우시고, 반석 같은 여러분의 마음에 ‘나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거야...’ 그런 믿음을 온전히 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