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

믿음찬교회 0 101 02.06 14:02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
히 10:19~25
2024.02.04.

예수님에 대한 히브리서의 성경신학적인 말씀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영원히 사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을 말씀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구약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말씀과 의식과 제도와 신앙은 거룩하지만, 그것은 모두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잘 이해한 사람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과 제사와 구약 말씀의 집에 살던 사람은 이제 복음과 영적 예배와 예수님 말씀의 집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삶과 신앙 생활과 사고 방식에 엄청난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히브리서는 우리의 새로운 삶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이것을 말할 때, ‘우리의 새로운 삶과 신앙생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와 신자들 앞에 있는 어려운 상황과 현실을 알고, 거기에 맞추어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히브리서는 신약의 예수 신앙을 가지고 세상의 박해와 어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고 어떻게 새롭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권면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구약 성소와 지성소는 매우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외인이 가까이 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른 불을 드린 제사장도 죽었습니다. 언약궤나 성물을 함부로 만진 사람도 죽었습니다.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소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열렸습니다. 이제 믿는 자는 작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일반인이나 제사장이나 누구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뵈올 때처럼 정결해져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제단 숯불로 정결해졌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이렇게 누구나 세례를 받고 주님을 믿기로 하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런 성령의 세례와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워진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하나의 동전과 같습니다. 앞면에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다’가 적혀있습니다. 뒷면에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가 적혀있습니다. 앞면은 ‘은혜’이고, 뒷면은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뒷면을 ‘우리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을 ‘의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끄럽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의무와 짐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의무와 부담’으로 들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닫힌 문과 가리어진 길에 절망했지만, 이제 그 문과 길이 열려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오직 제사장만의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만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제사장적 특권을 깨달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고, 우리 인생의 답을 알고, 영원한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누리길 원하십니까? 이것은 한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가장 차원 높은 소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체적인 생활과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진지하게 들을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23절 이하에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이 무엇인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생님처럼 잘 정리해서 교과서적으로 말씀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이 무엇인지 그 뜻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첫째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고...’입니다.
이것은 무슨 생활을 의미할까요? 네, 믿음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은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생활은 믿음입니다.
이와 관련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우리가 잘 아는 귀한 말씀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평소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손과 발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최선 속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작은 것이나 나의 소원성취나 길흉화복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미신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며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울 때도 믿고, 잘 안될 때도 믿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동행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서, 뭔가 내 삶에 도움이 되고 내 앞길에 유익이 되고 내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세상적인 신앙을 가져선 안 됩니다. 오래전 제가 잠시 일했던 과일가게 젊은 사장님은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덕 볼려고 교회 다니지... 아무것도 없으면 교회를 왜 다닙니까?” 그런 말을 제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을 80년대와 90년대까지 많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잘 되고 성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바위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 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사람, 사람 만나러 교회 오는 사람... 다 와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우리가 어려워지고 힘들고 일이 잘 안되자, ‘하나님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면서 하나님을 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두 사람 교회를 떠나고... 지금 우리 교회들은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모습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이 걷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않고, 잘 된다니 너도 믿고 나도 믿었다면, 그런 거품은 걷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런 세상적인 믿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는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고아처럼 이 세상에 던져져 내 힘과 능력으로 살며 날 위해 하나라도 득 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쁘나 슬프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사랑의 믿음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길을 나서며 저녁에 집에 온다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약속을 합니다. ‘밥 먹고 놀고 있으면 저녁에 엄마 아빠가 올 거야...’ 부모님의 그 말을 믿는 아이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잘 놉니다. 어둑어둑해지고 노을이 지고 산그늘이 깊어져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저 멀리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은 그런 사랑의 믿음입니다.
세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 속에서 언젠가 믿음을 잃어버리지만, 이와 같은 사랑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그날에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믿음을 굳게 잡고 언제나 하나님께 나가는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입니다.
이것은 무슨 생활을 의미할까요?
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랑과 선행의 아름다운 삶, 소금과 빛이 되는 삶, 불의하지 않은 의로운 삶... 우리에게 이런 아름다운 삶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신이 아니시기에, 자기 앞에서만 잘하고 제물을 차려 놓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롭고 아름다운 삶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는 나중에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이제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나가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곳에서 새로운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우리 입술로 드리는 찬송의 제사입니다. 또 우리 몸과 삶으로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새로운 영적인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 신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주일날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내가 하는 한 주간의 일 속에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아~ 나는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도 간신히 나오는데... 일주일 동안 세상 속에서 살면서 영적인 제사를 드리라니...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워도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일날만 신앙생활 해선, 하나님께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는 아름답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선행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나눔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턱대고 선행을 한다고 나눈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메마른 세상 속에 한 줄기 생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짐승 소리 가득한 캄캄한 골짜기에 불 밝힌 작은 오두막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삶과 생활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안에서 산상수훈의 열매로, 열 처녀의 기름으로, 혼인잔치의 예복으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 기름이 떨어진 다섯 처녀,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삶과 생활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큰 선행을 하고 큰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하여,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면 됩니다.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그 사람을 나의 능력 안에서 도우면 됩니다. 그리고 이웃에 악을 행하지 아니하면 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간단한 24절 말씀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를 말하고,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우리의 자격을 말씀합니다.

세 번째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입니다.
이것은 어떤 생활을 의미할까요? 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교회 생활을 의미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교회의 중요성을 말할 때 조금 주저하는 면이 있습니다. 저는 헌금 이야기 잘 안 하고, 교회 이야기 잘 안 합니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아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교회에서 녹을 받는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 생활도 중요하고, 교회 생활도 중요합니다. 특히 교회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공동체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전에 그런 사진이 많이 인터넷에 있었습니다. 서울 도시의 밤 야경 사진을 찍으니, 무수한 십자가가 보이는 사진입니다. 다 교회이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교회가 편의점 보다 많다...’ 그런 말을 하며 싫어합니다.
네, 저도 교회가 그렇게 우후죽순처럼 있고, 너무 많고, 그러면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현실에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교회를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니진 않아도 좋은 곳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 눈에, 마치 교회가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고 돈을 걷는 장사하는 집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도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 싫어서 헌금 생활의 중요성이나 교회 생활의 중요성을 가급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명백히 교회의 중요성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로서 성화의 공동체로서 중요합니다. 구원의 밤은 깊어지고 그날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영적인 시간 속에 우리는 함께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너무 많고, 좋은 교회가 별로 없고, 교회 다녀도 문제가 많고...’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싶지 않은 101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함께 이루어가고 함께 모여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이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선교단체 훈련도 받았습니다, 안수도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도 웬만큼 압니다... 그러나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고 저희 가족만 예배를 드리고 아직 공동체가 되지 못했을 때 무척 힘들었습니다. 신앙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교회를 사임하고 맞이하는 첫 주일에 우리는 예배 대신 야유회를 갔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약해졌습니다. 교회를 준비하기까지 1년, 그리고 교회를 시작하고도 1년... 그런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우리가 동물의 세계를 보면 가끔 그런 장면을 봅니다. 약하고 지친 동물이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다른 동물과 새들... 아마 그때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그런 상황에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작은 아이 한 명, 몇 명의 아이들, 그리고 한 가정 두 가정 보내주셔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공동체라는 영적인 울타리가 없으면, 아무리 목사 장로 권사라도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혼자 있는 영혼은 악한 영의 대상이 되기 좋습니다.
‘나는 신앙이 좋아서 어설프게 교회 생활 안 하고 내 믿음 내가 지키겠다... 그런 교만한 마음을 먹으면... 마귀가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해도 같이 찬송을 부르고, 같이 기도를 하고, 같이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공동체로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고, 작은 공동체라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동체이고,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입니다. 큰 교회를 다닐 수도 있고, 다른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내게 맞는 교회를 다녀야 하고, 그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택하고 정한 교회를 다닐 때, 우리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고 안부를 나누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대체로 큰 대형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은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죠. 그러나 그런 분들도 출석하는 교회를 자신의 교회로 생각하고, 교회와 목사님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손님이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주신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네, 아마도 로마 교회 안에 있던 일부 신자로서, ‘지금 교회가 모이기 어렵고 사회적 불이익이 있고 핍박이 있으니 당분간 모이지 말고 혹은 가급적 모이자 말자...’ 아마도 그렇게 주장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그런 사람들의 말과 주장을 습관이라고 말한 것이 조금 특이합니다. 이 단어는 습관도 되고 관습도 되고 관례도 되는 말인데, 제 생각엔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성향이나 생각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만나면 늘 자신의 오랜 방식과 성향대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이 있으면 모이지 말고, 어려움이 있으면 하지 말고, 힘들면 안 하면 되고...’ 그래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습관’이라는 단어로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본능적인 생각이나 습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앙생활에는 항상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때는 사회적 차별과 핍박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무신론적인 세상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돈과 물질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지 않은 영적인 상황 속에서도 함께 모여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가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3가지 영적인 생활에 대해 권면하였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랑의 믿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선하고 의로운 생활입니다. 우리는 그런 산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셋째는 교회 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모이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귀한 생활을 통해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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