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영원한 제사
히 10:1~18
2024.01.28.
지금 우리 교회들은 새롭게 예수 믿는 분들이 적고, 대부분 성도님들이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믿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대체로 교회의 설교가 오래 믿으신 분들께 많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 열매 맺는 신앙, 주님과의 동행, 헌신의 생활... 이런 내용을 아무래도 많이 설교하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오늘 본문과 같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시작과 출발이 되는 말씀을 다시 보게 됩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 귀한 말씀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 때의 우물을 다시 팠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신앙의 근원을 다시 돌아보고 그 물을 마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그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귀한 말씀을 다시 살펴보고, 감사와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가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한, 성경신학적인 말씀의 마지막 절정 부분입니다. 참 벅찬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과 현대의 신자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까?’ 생각해 보면, ‘1세기 신자들이 느꼈던 그때의 감동과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조금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똑같은 글이고 똑같은 말씀이지만, 우리는 1세기의 신자들과 비교할 때, 2,000년이나 지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대인들이기 때문에, 이 말씀의 중요성과 감동을 그때만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재 무신론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때와 달리, 지금 사람들은 신이나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무엇을 잘못하면, 법을 어긴 범법자나 규범을 어긴 규범 위반자라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잘못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범법자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죄를 모르고 우리 또한 그런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과 같이 죄에 대한 용서와 해방을 말하는 말씀에 감명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우리의 죄를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되면, 오늘 이 말씀은 너무나도 귀하고 값진 복음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죄를 알아야, 와닿는 말씀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읽어지는 말씀입니다. 내 손에 피가 있고 내 안에 악한 본성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 은혜를 받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요즘 말로 소위 가스라이팅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스라이팅이라면, 저도 좋겠습니다.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서 죄가 사라진다면, 제가 제일 먼저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 7장 사도바울의 말씀에서 죄에 대한 한 인간의 깊은 고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죄를 모릅니다. 그리고 알아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민족과 인류 가운데 죄를 제대로 아는 민족과 인류는 이스라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죄가 무엇인지,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온 세상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다른 민족이나 인류는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른 채, 그저 신을 만족시키는 각종 제사나 인신 제사를 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죄를 이해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린 유일한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1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대속죄일 제사가 있었습니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7월 10일인데, 그런데 그전에 이미 7월 1일 나팔절부터 큰 나팔을 불며 대속죄일을 준비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력 7월은 오늘날 우리 태양력으로 9~10월에 해당하는 가을인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이스라엘 종교력 7월은 그들 민간력으로 1월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며 신년을 시작했는데, 신년을 시작하면서 그달 10일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대속죄일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인들은 한 해를 대속죄일로 시작하면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해마다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징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그렇게 오랫동안 그 전통에 참여하고 경험하면서,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속죄의 제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계시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황소와 염소의 피로 드린 그와 같은 오랜 옛 제사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영원히 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사들은 결코 죄를 없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나간 한 해의 죄를 처리할 뿐, 지금 현재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못하고, 미래의 그들의 죄용서와 구원을 보장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해마다 제사를 드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죄에 매여있고 죄를 기억하고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해마다 대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죄인이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늘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와 같은 불완전한 제사와 불완전한 영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는 영원한 한 번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히 이 사실을 구약의 여러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구약의 말씀 중 하나가 오늘 본문 5~7절에 있는 시편 40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다윗의 고백을 예수님께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자기 고백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의 많은 말씀을 그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구약 말씀 안에 새로운 제사를 예고하셨습니다. 그 제사는 우리 죄를 사하는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씀합니다.
“그들의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아멘... 이렇게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피로 영원히 사함을 받았습니다.
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복음의 진수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복음의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이 귀한 복음의 말씀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우리의 영원한 죄 용서를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 교만한 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 말할 수 없는 악하고 부끄러운 죄... 그 어떤 죄라도 주님 앞에 나아와 고백하고 주님을 믿을 때... 다 용서받습니다.
이 용서를 받기 위해 무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행을 할 필요도 없고, 선행을 할 필요도 없고, 금욕을 할 필요도 없고, 짐승을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값없이 용서받습니다.
나아가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은총은 내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내가 주님을 떠나지 않는 한, 계속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옛 제사는 이런 은혜와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피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영원한 은혜를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어떤 한 부인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참 세련되시고 성실하시고 다 좋으신 데 한 가지... 얼굴에 늘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지난 과거에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분이 결혼 당시 유부남이었습니다. 본인도 처음엔 그것을 모르고 결혼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이까지 있는 상황이라... 이 부인은 그 남편의 편에 서서 전 부인을 찾아가 헤어지도록 하고 그렇게 그 일을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불행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후 그 남편은 다른 불미스런 사건으로 감옥에 갔습니다. 이 부인은 다시 한번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감옥에 있는 남편은 이 부인을 붙잡으려고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이와 같은 힘든 상황 속에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부인을 보면서, 조금 더 가까워지고 마음의 문이 열리면 신앙적으로 이야기 나눌 기회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분이 신앙적으로 힘을 얻어 그 힘든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기회가 오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나중에 그 목사님은 그분이 남편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알게 된 사례를 말씀드리는 취지는 단순히 그 부인을 폄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분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안타까운 점은 있습니다. ‘그분이 그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예수님 안에서 새 출발을 했으면 어땠을까...’ 저도 일반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 남편을 다시 선택할 때 어떤 마음으로 선택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다시 가정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는지... 그 결정과 마음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는 그 부인과 같은 어려운 삶의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다말이나 라합이나 룻이나 밧세바나... 그들 모두에게 어렵고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 여인들에게 있었던 잘못된 일들을 압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삶의 오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그 부인의 사례를 들으면서 일반적인 생각으로 함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목사로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말씀을 지금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만약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잘못된 과거를 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알았다면, ‘혹시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과거의 죄의식과 그늘에서 벗어나 밝은 마음과 평안을 찾고, 새롭고 좋은 길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혹 불가피하게 그 남편을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그 남편과 함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용서와 회복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가피한 상황에 빠지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삶의 오점을 남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작은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실수도 없고 후회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죄는 작으니 나는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와 어두움 속에서, 오늘 이 말씀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히 사하신다는 이 말씀을 통해 진정한 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 모든 죄가 영원히 용서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영원히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모든 죄가 사라졌고, 우리 안에 있는 정죄와 죄의식과 후회와 분노도 다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용서받지 못한 죄인의 내면에는 정죄와 죄의식과 후회와 분노가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런 죄의 부산물들이 끊임없이 그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 그 사람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할까요? 이 세상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로, 그리고 죄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냉정한 사람들, 타인의 불행과 슬픔을 조롱하는 사람들, 악에 둔감한 사람들, 분노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은 용서받지 못한 죄의 결과들입니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그런 영적인 현상이 예수님의 죄사함과 죄용서를 확신하지 못하는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그런 신자에게 찾아옵니다. 사탄은 삼킬 자를 두루 찾고, 할 수 있다면 택하신 자라도 무너뜨리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복음의 말씀을 우리 마음 깊이 새기고, 우리의 영원한 죄사함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기쁘게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한 가지 오해를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 용서와 죄 사함은 영원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최종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용서와 죄사함을 받고, 이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우리가 거부하고 떠나지 않는 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오해하는 사람들과 이단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최종 구원과 최종적인 용서로 오해하여 ‘한번 용서는 영원한 용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리고 밖에도 우리의 구원을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거룩한 삶과 생활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성경 말씀을 볼 것 없이, 오늘 본문 다음 말씀인 19절 이후를 읽어보아도,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고, 그 길은 열렸고, 우리는 씻음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그와 같은 언약적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를 바탕으로 우리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영원히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영적인 신분과 정체성을 오늘 말씀을 통해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당시 신자들이 유대교로 돌아가 다시 죄사함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그들의 영혼과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죄사함을 확신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죄의식과 정죄에 빠지고 다른 길과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을 흔드는 이단자들과 악한 마귀에게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오직 예수님의 영원한 죄사함을 확신하시고,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시고, 언제나 자유와 평화를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