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흘리신 우리 주님을 위하여
히 9:15~22
2024.01.14.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히브리서 말씀은 히브리서의 절정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등산을 하면 힘들고 지루한 산길이 있는 반면에, 비경이 나타나고 절경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구간이 있습니다. 한라산에 가면 관음사에서 올라가는 긴 코스가 있는데, 백록담에 도착하는 그 코스의 마지막 1시간에 그런 구간이 펼쳐집니다. 예전에 저는 백록담에서 내려오면서 그 길로 내려왔는데, 요즘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던 때라 혼자 내려오면서 그 구름에 싸인 절경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억에 한라산 이야기만 나오면, 늘 저는 거기에 한번 가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되실 때, 꼭 그 길로 한라산을 한번 올라가시길 추천 드립니다.
뜬금없는 등산 이야기를 드린 이유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히브리서 본문이 바로 그런 절경 구간이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말씀이 뭔가 어려운 것 같고 지루한 것 같고 자꾸 맴도는 것 같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대단히 깊은 영적인 말씀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저 구약 초창기부터 현재의 예수님을 지나 저 미래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신 저 하늘까지 올라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눈에 이런 히브리서의 말씀이 잘 담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히브리서는 새로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지나, 새로운 율법과 새로운 언약을 지나, 새로운 성소를 지나...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제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려지는 영원한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인류와 세상의 모든 죄를 구속하시고 회복하시는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절정의 말씀을 10:18까지 진행하고 마침내 큰 종을 울리듯이 종을 울리고 마칩니다. 10:19 이후는 그 울림의 여운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말씀의 이와 같은 길을 올곧게 따라가서, 그 마지막 자리에서 울리는 큰 종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10:18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 마지막 말씀으로 모든 구약이 정리되고, 우리는 영원한 자유와 속죄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앞서 9:11 말씀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새로운 제사에 대한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새로운 성소에서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피와 죽음이 어찌 우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
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으로 넘어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떤 내용인가...?
오늘 본문이 어떤 내용인지 알려면, 오늘 본문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첫 말씀과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면 됩니다.
첫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중보자라는 말은 중재자라는 말입니다. 둘 사이를 화해시키고 가깝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중보자시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 일을 어떻게 하셨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피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생각할 때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희생 제물이시니” 이렇게 시작한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은 유명한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정리하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이렇게 마칩니다. “그는 새 언약의 희생제물이시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따라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희생제물로서 죽으시고 피 흘리셨는데, 그분의 죽음과 피가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어떤 내용일까요? 네, 예수님께서 왜 죽으실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2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둘째는 우리의 새로운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보혈의 의미를 속죄 하나로만 알아선 안 됩니다. 속죄를 바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 그 피를 흘리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죽음과 보혈의 의미를 이렇게 2가지로 계속 강조 드리는 이유는 그 의미를 속죄 하나로만 이해할 때, 우리의 구원 이해에 자칫 엇나가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받았음을 기뻐하는 많은 신자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없거나 그것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속죄 하나로 구원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오래전 어떤 분이 “흰 손”이라는 제목의 시로 썼습니다.
피는 들었다면서 네 손이 희구나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피는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나는 영원히 일하는 영 사는 영
흰 손 가진 너희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시는 아는 사람만 알 뿐, 우리 교회들 안에 널리 받아들여지거나 회자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속죄는 우리가 거저 아무 공로 없이 은혜로 받는 쉬운 것이지만,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그분과 새로운 언약 관계에 신실한 것은 우리의 힘과 정성이 필요한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마치 성경책을 보다가 우리 마음에 드는 속죄와 은혜를 발견하고는 그만 거기서 책을 덮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온전히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서 영적인 미아가 되어선 안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했지만, 누구보다 주님을 위해 수고로운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매 맞고 쫓겨나고 자기 손으로 일하고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사도 바울은 속죄와 은혜만 아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속죄의 의미와 은혜의 의미를 알고, 그 이상을 알고, 그 온전한 의미를 아는 사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만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언약과 언약적 삶을 위해 그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그 속죄의 은총을 기뻐하면서, 동시에 그 속죄를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언약에 신실한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를 우리 마음에 새기면서, 이제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매우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설교도 자주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 말씀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은 예수님의 죽음과 피흘림 자체보다는 그 결과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의 피흘림을 통해 우리 죄가 사해졌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 중에 한 분은 이 피흘림을 통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몸과 마음의 질병도 치유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아주 영광스럽고 죄에서의 승리가 느껴지는 설교이고, 그래서 그런지 다른 많은 설교들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왠지 그런 말씀과 설교에 마음이 조금 서운합니다. 그것은 마치 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얼굴은 보지 않고, 그분 손에 들린 선물만 보는 느낌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내가 또 보니...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우리는 죽임 당하신 예수님과 흘리신 피는 보지 않고, 그 결과 얻은 속죄의 은총만 보고 기뻐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더라도 그 기쁨은 날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보고 눈물 흘리는 슬픈 기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간혹 우리 믿는 분들 중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니까... 우리 위해 돌아가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권리처럼 말하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자’고 말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과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주장이나 말은 성경이나 신학이나 신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논하기 전에,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대하는 마음 바탕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그 속죄의 은총만이 아니라, 그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과 그런 상징적인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시려고 죽으사...”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와같이 피를 장막과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구약에서도 우리의 속죄는 짐승의 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우리의 죄를 전가시키고, 그 짐승은 우리를 위해 죽습니다. 그 일을 행할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우리의 속죄는 이제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집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당연한 죽음이 아닙니다. 신의 의무도 아닙니다. 우리를 생각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주에 많은 분들이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보셨을 것입니다. 거기에 양규 장군을 비롯한 고려 병사들이 백성들을 안전하게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분들은 얼마든지 죽지 않을 수 있었죠. 전쟁 때에 사람이 죽고 백성들이 죽는 것은 보통 일인데,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죽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그들이 다 죽고... 나중에 한 사람 한 사람 그 시신이 수습되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커뮤니티에는 ‘그 장면을 보고서 나도 눈물이 났다’라는 많은 글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돌아가셨다는 오늘 본문의 많은 말씀을 보면서 동일한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이 말씀은 기쁘면서도 참 슬프고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잠깐 슬퍼하고 가슴 아프게 예수님을 묵상하고 끝나면 될까요?
우리는 예수님 앞에 생명의 빚을 진 자로 살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 은혜와 빚을 다 갚을 순 없지만, 그중에 하나라도 갚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강요도 아니고 의무도 아닙니다. 그 사랑을 체험하셨다면, 그렇게 사시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유명한 안티 기독교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날 위해 죽었다고 하고, 나에게 채무 의식을 불어넣고 자신을 섬기기를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네, 그분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그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건 우리 교회가 하는 말이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우리 교회는 전도하려고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당신에게 나타난다면 피 묻은 손을 보여주실 뿐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을 것이다”
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아무런 강요를 안 하십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그 사랑에 반응하여, 주님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들에게 그 결단을 권면 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그 은혜를 하나라도 갚는 사람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예수님을 믿고 온실의 화초처럼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가난하게 성장한 저는 예수님을 믿어도, 날 위해 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움 속에 예수님을 만나고 선교단체 간사가 되고 신학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하고 나니 제 앞에 교회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비전의 사람들이었지만, 저는 본래 제 마음 속에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에, 그때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면, 잘 할 자신은 없지만 혹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모르오니 제가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아닌 것 같으면, 얼른 그만두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우리 예수님의 사랑에 겨우 하나만 갚는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마음을 드리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래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비전도 능력도 없는 저를 인도해주시고 늘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주님의 사랑에 하나라도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먹으시면 좋겠습니다. ‘무슨 큰일을 해야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드릴 수 있는 작은 것... 무엇이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 소년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먹으려고 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소년은 그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어 큰 역사의 재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 작은 것이라도 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지금 하셔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리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고...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어둡고 부패하고 불의한 모든 곳에 그 존재만으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사실 우리 믿는 자들 앞에는 하나님의 큰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누구도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누구도 자기 힘으로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목사도 선교사도 사역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큰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작은 것을 우리 주님께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죽으시고 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피흘림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과 저를 권고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무쪼록 성령님께서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우리 믿음의 고민을... 각각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해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