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를
히 9:1~14
2024.01.07.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의 가장 절정 부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우리 신앙과 구원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말씀하는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후의 말씀이고 최고의 뜻이고 우리 신앙의 전부이고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성경신학적으로 해석하고 논증하고 권면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히브리서를 잘 읽으면, 구약과 신약을 구별할 수 있고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고 정통 신앙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앞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새로운 대제사장이심을 말씀했습니다. 새로운 대제사장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율법과 새로운 언약을 낳습니다. 또한 새로운 율법과 새로운 언약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성소와 새로운 제사를 낳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제 새로운 성소와 새로운 제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렇게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새로운 대제사장으로, 새로운 율법과 언약으로, 새로운 성소와 제사로 말씀하는 이 부분이 바로 히브리서의 절정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구약의 첫 성소를 언급합니다.
구약에는 여러 성소가 있었죠. 모세의 성막,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에스겔 성전, 헤롯 성전... 그런데 히브리서가 여기서 말씀하는 성소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비록 그것은 첫 성소로 작고 초라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가장 온전히 담긴 성소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간단히 그 첫 성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지성소에 언약궤와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이것은 정말로 초기 모세의 성막입니다.
한편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에 하나 잘못된 내용이 있습니다. 금향로는 본래 지성소에 있는 것이 아닌데, 지성소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 들어와 금향로에 향을 사르고 등잔에 불을 켜고 끕니다. 그래서 금향로 혹은 금향단은 성소에 있지 지성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막과 성전의 역사는 오랜 역사인데, 후대 솔로몬 성전에서 금향단은 지성소에 속한 것으로 말씀하는 열왕기상 기록도 있습니다. 아울러 금향로와 금향단은 대속죄일에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를 그 향연으로 가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금향로와 금향단은 성소에 위치하고 있지만 여러모로 지성소와 관련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이 말씀이 그런 내용을 가리키는 의미와 의도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의 오류, 나아가 성경의 오류라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첫 성소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는데, 중요한 말씀은 8절입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성막과 성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였지만, 그러나 오늘날 성령께서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은 그때의 그 성소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완전한 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네, 비유라는 말은 실체는 따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런 것은 ...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육체의 예법이란 우리 몸과 겉을 새롭게 할 뿐, 우리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조선 말 성리학은 예를 무엇보다 강조했습니다. 부모의 상을 치르고, 예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고... 그런 예학이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예법일 뿐,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런 내용을 숭상하고 강조한 양반 사대부들의 마음과 정신은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말씀은 우리의 몸과 겉모습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하는 온전한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예법인 율법은 개혁할 때까지 임시로 맡겨 둔 말씀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첫 성소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온전한 통로가 아니라, 육체의 예법이자 임시적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온전한 성소는 무엇이고, 온전한 제사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11절과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리신 제사야말로 우리 죄를 사하는 진정한 제사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신 몸으로 들어가신 저 하늘에 있는 성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정한 성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히브리서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제사이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저 하늘 성소야말로 진정한 성소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그 제사와 성소를 이 땅에서 찾지 않고, 우리의 모든 예배와 교회는 저 하늘에 있는 영적인 제사와 성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저 하늘의 성소는 저 하늘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그 성소를 지금 여기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릎 꿇는 우리 마음에 그 성소는 임합니다. 참으로 예배하는 우리 가운데 그 성소는 임재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내 심령과 삶은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서 하늘의 참된 성소를 소유하는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으로 13절과 14절에서 짐승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를 말씀합니다.
피는 제사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죠. 짐승의 피는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능력이 클까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마음까지 깨끗하게 하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마지막 14절 말씀이 여러모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그분의 보혈은 그분의 죽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분의 피 자체에 무슨 마법적인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과 피는 2가지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하는 속죄의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마음까지 변화시키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의 죄를 잘 알지 못합니다. 지난 연말에 한 유명 배우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 배우가 죽게 된 안타까운 배경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도 있지만, 그에게 크고 작은 돌을 던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에게 작은 돌이라도 던진 사람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지금 자기의 잘못을 알고 반성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이번 주에는 한 정치인이 목숨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장면을 현실에서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어두움과 증오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저지른 그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알까요?
그러나 자기의 잘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오래된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은 자기 죄를 깨닫게 됩니다.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손에 지울 수 없는 피가 묻어있고,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왔다는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맥베스에서 맥베스의 아내는 왕을 죽인 자신의 손을 계속 씻는 강박증에 시달립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그 작품을 통해서, 또는 다른 작품이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죄 문제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설령 죄를 깨닫는다 해도, 더 큰 문제는 우리 죄를 씻을 수 없다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주님 앞에 정직히 서면, 그분의 피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돌이킨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보상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안에 흐르고, 우리는 그 속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속죄의 은총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실제적인 자유와 해방을 줍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는 물러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죄를 사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이와 같은 크신 능력을 늘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마음까지 변화시키는 은혜의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속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또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의 역사가 임할 때, 우리는 굳이 울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역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신비로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린 그 은혜가 믿어지고, 예수님이 내 마음에 주님이 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속죄 하나로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 마음을 그 사랑과 은혜로 변화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 찬송가에 있는 소위 보혈 찬송들이 대체로 속죄만 말하고 있는 것은 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속죄는 속죄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속죄만 이루어졌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14절 말씀은 그 2가지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속죄함을 받은 우리는 반드시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속죄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변화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그 보배로운 피는 우리를 속죄하고 동시에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깊이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잘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원죄와 타락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는 수없는 교회의 역사와 믿음의 세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 나에게 흘러온 것으로 압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뿌리 깊이 타락하여 예수님을 믿어도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잘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우리를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말하며, 변화된 삶에 대한 기대를 자꾸 부인하고 있습니다.
원죄와 타락 교리를 신학적으로 논하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원죄와 타락 교리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보다 결코 크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우리 주님의 보혈의 능력보다 더 능력이 있을까요? 우리의 타락과 부패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보다 더 능력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고 새 인생이 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에 대해 2가지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돌이키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 대해 한없는 부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이번 주 금요기도회 성경 본문은 마가복음 3장이었습니다. 거기엔 예수님의 극단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귀신 축출 사역에 대해 그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 말할 때에,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진리를 보지 않고 거부하고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도 동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전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닫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에 대해선 한없는 부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런 분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저는 한없는 긍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그 사람을 언제나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시간이 걸려도 그 사람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의식도 아닙니다. 오직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는 변화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안에 이것이 분명하면 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가?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우리 자신과 우리 믿음을 한없이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새로운 영적인 사람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고 우리의 삶은 어렵지만, 우리는 새로운 마음과 믿음으로 올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그 사랑의 능력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 참되신 능력을 따라가는 아름답고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