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완악함 (2)
막 3:1~6
2023.12.15.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거부하는 그들 마음의 완악함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탄식하시고 노하셨습니다.
마음의 완악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마음의 완악함이라는 이 본질적인 인간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 답은 쉽습니다. 우리는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음만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마음의 완악함이라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선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조금 필요합니다.
몇 년 전 사람의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23 아이덴티티’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배우는 여러 명의 인격을 잘 연기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 영화의 후속작도 새로 개봉되었습니다. 제목은 ‘글래스’입니다. 관심 있는 분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이 영화들은 한 사람 안에 있는 다중인격을 묘사하면서 인간 내면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입니다.
해리성 장애라고 하는 이 다중인격의 실체에 대해선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 질환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과장된 허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발병 원인에 대해선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아직 그 정확한 실체에 대해선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여기엔 사람의 물리적인 뇌와 정신과 마음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화나 정신의학을 보면서, 인간 내면의 복잡성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영혼이 서로 어떻게 구분되고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미스테리합니다.
내가 이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또 다른 생각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내가 이런 마음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기도 합니다. 감정의 변화무쌍함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화를 볼 때, 영화가 말하는 다중인격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최소한 내 안에 이중 삼중의 생각과 마음이 있다는 사실엔 공감이 됩니다. 그것이 몇 개인지도 모르겠고 무엇이 진짜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내면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실체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과 마음은 우리 안에서 복잡 미묘하고 자기만의 힘과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거기에 속고 무작정 끌려다니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이런 우리 내면과 마음을 온전히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내용을 깊이 다 알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간단한 몇 가지 내용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선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결정과 선택을 내리는 우리 내면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선이나 악을 선택하고 의지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그래서 마음은 곧 의지이며, 또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심령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시143: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이렇게 심령은 우리 안의 영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마음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구분해야 할 것이 생각과 감정입니다.
생각과 감정은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이지만, 마음과는 다릅니다. 생각과 감정이 마음과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마음이 인간의 중심이기 때문에 생각과 감정은 마음의 통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생각의 지배를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생각을 하고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감정을 따라가는...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섣부른 생각을 행동에 옮기거나 순간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의 양이나 방향을 결정하고 감정의 기복이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른 마음은 생각을 바르게 이끌고 감정도 바르게 이끕니다. 다윗의 사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중대한 죄로 하나님이 자신의 아이를 치실 때에, 그는 아이를 살려주시도록 하나님께 금식하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7일 만에 그 아이는 죽고 맙니다.
신하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왕께 알리길 꺼려했는데, 그것은 왕의 상심이 너무 클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본 다윗은 아이가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아마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 자신의 슬픔을 정리했습니다.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아이가 죽은 후 오히려 슬퍼하지 않는 왕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까 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비록 힘들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이 특별한 사람이거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생각에 따라 올바른 마음의 결정을 하고, 그리고 감정을 그 밑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구분하고, 생각과 감정을 마음의 결정과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면, 우리는 좋은 마음과 절제된 내면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생각과 감정과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죠. 그 정신을 누가 차리게 합니까? 바로 우리의 마음이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고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마음은 의지적 결정과 지적 통찰과 영적 분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음이 흐려지거나 잘못되면 사람에게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진리를 보아도 볼 줄 모르고 진리를 들어도 들을 줄 모르고, 무엇을 알면서도 왜곡하고 거부하고, 자신마저 속이고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바르게 들어가지 않고 그의 마음에서 왜곡되고 굴절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날 우연히 교계 신문을 보니까, 장로교 통합 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목회자가 이런 말을 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제사장 아들이 제사장 되는 게 세습인가? ... 그런 교회 욕할 시간에 전도나 하라... 아들이 이어받아도 그것은 교회 사유화가 아니다.”
네, 한국교회는 아시다시피 많은 큰 교회들이 세습을 하고 병이 들 대로 들었는데, 이젠 이런 말이 총회장을 지낸 분 입에서 버젓이 나오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세습을 하는 교회나 목회자들은 비록 그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우리 교회만의 사정이 있고 불가피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아예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아들이 제사장 되는 게 세습인가? 교회 사유화인가?”
이게 과연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일까요? 목사는 제사장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교회를 물려받는 것이 세습도 아니고 교회 사유화도 아니면 그럼 뭘까요?
저는 그 총회장을 지닌 목사님이 모르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지만 스스로 속이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서 바른 길을 걷지 못해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변질되거나 잘못되면, 그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더 역사하실 수 없고 오직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진리를 듣고 바른 것을 선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상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변화와 진보는 내가 내 마음의 상태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바른지, 얼마나 건강한지, 얼마나 구부러져 있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잘 점검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악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잠했고, 이후 밖으로 나가 예수를 어떻게 하면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람들을 보고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늘 건강하게 지켜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