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과 그림자
히 8:1~6
2023.12.17.
8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히브리서를 잠시 돌아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는 처음에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했습니다. 그다음에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레위 제사장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레위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가? ...
첫 번째로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모형을 따른 제사장의 원형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새로운 율법의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7장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7장과 8장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아직 대제사장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인 8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레위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네 번째 내용을 말씀합니다.
네 번째 내용은 예수님은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섬기시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그는 지상의 성소나 이 땅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참된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드리시고 하늘에 오르사, 이제 하늘의 참된 성소에서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대제사장 사역을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개의 차원을 대비하면서, 이 땅에 있는 레위 제사장들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이어지는 3절과 4절 말씀도 레위 제사장들과 예수님을 계속 비교하는 말씀입니다. 3절과 4절은 이 땅의 성소에서 예물을 드리는 레위 제사장들과 이 땅의 성소에서는 예물을 드리지 않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에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이 더해집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오랜 세월 동안 레위 제사장들은 수많은 제사와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틀림없는 실체이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제사장들은 제물을 잡고 제단에 피를 뿌리고 불로 살랐고 백성들은 그것을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때론 함께 그 제물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 모든 것이 단지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씀합니다.
원형은 따로 있는데, 원형은 바로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드린 영적인 제사이며 그 성소는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의 제사를 원형으로 알아선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건축물의 모형이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어도, 거기 들어가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림자가 아무리 선명해도, 그것을 손으로 만지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의 제사는 그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그러나 그 제사들은 바람을 잡고 구름을 잡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의 죄를 일시적으로 씻어 줄 뿐, 온전케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것이 모형이고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신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레위 제사장들의 제사가 그런 모형과 그림자임을 깨닫고, 그리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비교할 수 없는 원형적인 모습을 네 번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절인 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탁월성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 신자들이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어선 안 됩니다.
예수 믿어도 자꾸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예수 믿어도 아무 득이 없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더 잘 산다고... 우리는 그렇게 약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깊이 붙드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와 같은 의미는 지난주에 살펴보았기 때문에 다시 살피지 않고, 오늘 우리는 시선을 돌려 오늘 본문의 한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5절 말씀인데, 이 땅의 것을 모형과 그림자로 말하고 하늘의 것을 참된 실체와 현실로 말하는 말씀입니다.
본래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 땅의 것을 보고 듣고 만지며, 이 땅의 것을 현실과 실체로 알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거나 특별한 체험을 하거나 환상을 보거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 이 현실이 진정한 현실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만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과학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래전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를 말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동굴 안에서 이데아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의미로 형상과 질료를 말했습니다.
요즘의 과학도 이런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이 우주는 실체가 아니라 홀로그램이다. 물질은 파동으로 존재한다...” 물론 이런 내용은 아직 확인되지 않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의미와 차원은 다르지만,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늘 그와 같은 영적인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이런 많은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의 현실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5절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래서 이 히브리서 말씀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비슷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말씀이 플라톤에서 온 것이 아닌가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 땅의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부정적으로 보았죠.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의 현실을 그림자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이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율법과 제사입니다.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에는 시간과 역사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 모형과 원형 사이에는 시간과 역사의 개념이 있습니다. 처음에 모형이 오고, 시간이 지나 때가 차매 모형은 낡아지고 원형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차이점이 많아서, 플라톤의 철학이 히브리서 기자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5절에서 모형과 그림자를 말씀하는 것은 이 땅의 삶과 현실을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말씀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더 진정한 현실, 더 진정한 실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이 땅의 성소와 성전은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체는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오래전 북이스라엘 왕국에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늘 아람 군대의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들어오는지 알아서 이스라엘로 미리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아람 왕이 엘리사 선지자를 잡기 위해 밤에 군대를 보내게 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도단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그러자 엘리사는 그의 사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그 청년의 눈을 여시어, 엘리사를 둘러싼 불 말과 불 병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불 말과 불 병거는 온 산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진정한 현실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또 남유다를 52년간 태평성대로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는... 그런 위태로운 시기에 큰 환상을 보게 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천상 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모시고 선 스랍들의 찬양과 화답하는 자의 소리와 연기로 충만한 그곳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때 거기서 2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다...’ 북이스라엘은 망하고, 앗수르의 위협은 시시각각 남유다를 향해 다가오고, 웃시야 왕은 죽고... 그런 왕의 부재와 국가적인 위기의 현실이지만 그러나 대주재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 보좌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구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지금 유다 백성을 어떻게 보시는지 발견하였습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되리라...” 유다 백성들은 웃시야 왕의 부국강병과 태평성대 속에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진정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과 사명 속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 어려운 시대 속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다니엘에게도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유다를 70년 동안 징계하신다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신과 유다 백성의 지금 현실은 이방의 포로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자신들을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진정한 현실이 다가오고 있음을 놀랍게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 약속과 진정한 현실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두려운 현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간다는 왕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현실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정한 현실을 선택하였습니다. 거기에 모든 것을 헌신하고 그것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아직 제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을 때에,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그날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동행하셨습니다. 그들은 그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안타까운 죽음과 부활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성경에 쓰여진, 자기에 관한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사이 때가 저물고 날이 기울어, 그들은 함께 그날 밤을 묵을 장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떡을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실 때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발견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분이 이 땅의 현실을 초월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자신의 현실을 버리고, 곧 그 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그 사실을 나누게 됩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이 땅의 현실에 충실하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진정한 현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나타나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현실에 압도된 바울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바로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그 시각 이후로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를 쓰면서 그림자와 실체에 대해 말씀하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여기서 마지막 말씀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진정한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성경 안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이 땅의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발견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영안이 열렸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이 땅의 현실은 이제 더 이상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실만 진정한 현실이 됩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히브리서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복음의 2세대로서 복음의 전함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와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특히 구약의 말씀들이 예수님을 깊이 가리키는 것을 발견함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영안이 열렸습니다. 모세를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고,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고, 율법과 제사와 성소도 모형이고, 원형과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은 귀한 영적인 진리를 알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보이는 현실은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다 낡아지고 사라집니다. 우리는 모형의 집과 그림자 같은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만이 영원한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과 은혜만이 진정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너무 마음을 졸이고 애타고 힘들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지만, 이 세상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방인으로,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기쁨과 슬픔도, 즐거움과 아쉬움도, 성공과 실패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모두 다 믿음과 소망으로 승화됩니다. 미움도 용서로 승화됩니다. 나이가 들고 약해지고 초라해지는 것도 감사와 평안으로 승화됩니다. 우리는 진정한 현실인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형과 그림자를 떠나 영원한 집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렇게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진정한 현실을 바라보시고, 언제나 감사하고 평안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