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하시고 맹세하신 하나님
히 6:13~20
2023.12.03.
설교를 오래 듣고 연구한 어떤 분에 따르면, 설교자는 대체로 같은 설교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매 주일 성경 본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메시지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주로 은혜를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주로 복음과 전도를 말씀합니다. 영혼 구원, 전도, 선교, 사명... 설교의 중심도 그것이고 적용도 그것이고 결론도 그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십자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 또 어떤 목사님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늘 말씀합니다. 예전에 이중표 목사님이란 분은 별세 신학이라는 것을 만드시고, 우리가 결국 죽어야 한다는 그런 영성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목사님들과 설교자들이 이렇게 늘 한결같은 메시지를 하는 이유는 본인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체험을 한 말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가 설교자 본인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렇게 설교는 인간 설교자를 통해 흘러나오기 때문에 설교자의 색깔이 많이 묻어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보시기에 저는 어떤 설교자인 것 같습니까? 저는 무엇을 늘 강조하고 말하는 설교자일까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우리는 다 처음에 색깔이 없습니다. 아기들은 하얀 종이입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자기만의 생각과 색깔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처음에 신학을 할 때, 아무런 색깔이 없었습니다. 직장도 다니고 선교단체 생활도 한 후 조금 늦게 신학을 했는데, 처음엔 신학적인 색깔이 없고 중심 메시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에 항상 마음에 큰 의문 하나는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 공부를 하던 2000년대 중반에 우리 한국 교회는 몸살을 앓던 시기였습니다. 아시다시피 1990년대부터 우리 교회들은 성장이 꺾이고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에는 그 꺾인 성장세를 회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들마다 방법을 찾고 시도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저런 세미나도 많고, 집회도 많고, 성령 운동도 많고, 목사님들 교수분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다양한 방법과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 모든 것은 성장에 문제가 생긴 한국 교회가 방법을 찾던 몸부림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시다시피 그런 시기도 지나고, 그저 잠잠하고 조용한 시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시끄럽고 우왕좌왕하던 그때에, 저는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장이 꺾인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 교회들은 그간 열심히 했는데 무엇이 잘못된 걸까?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말씀과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 공부를 하고 성경을 조금 알게 되면서, 우선 분명한 사실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말씀, 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말씀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 신앙의 중심에 대한 말씀, 성령에 대한 말씀, 교회에 대한 말씀, 기도에 대한 말씀... 우리가 알던 이런 말씀들이 성경과 어쩐지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우리가 알던 말씀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신학도 신학이지만, 신학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 신학을 접하고 성경을 배우면서, 결국 제 안에 어떤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제 나름의 중심 메시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한 단어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 바로 ‘삶’입니다.
우리 신앙은 삶, 곧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결국 그것을 원하시고, 성경 말씀도 다 그것을 가리키고, 교회의 목적도 그것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도 그것을 얻어야 믿음과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삶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이 하나로 꿰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삶이 되어야 구원도 받고 천국도 가고 복도 받게 됩니다. 신앙과 믿음이 삶이나 열매가 되지 않고, 천국 가는 방법이 되고 기술이 되고 요령이 되고, 복 받는 방법이 되고 기술이 되고 요령이 되고, 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고, 전도하는 방법이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범 교인이 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고 박사가 되어도, 그 배움과 가르침이 내 안에 들어와 생각이 되고 마음이 되고 삶이 되지 못하면,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배설물이 되고 맙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믿음과 신앙이 결국 삶이 되지 않는 분들은, 예수 믿는 중간에 결국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해도, 돈이 가장 중요하고 자기가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은 그 다음이고... 그런 분들은 결국 어느 날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 영적인 순간은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도 결국 이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간 뜨겁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많은 교회를 세우고 부흥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과 믿음은 삶이 되지 못하고 열매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이 되고 주일 신자가 되고 자기 욕심이 살아있고 성화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시간이 찾아왔고 성장이 꺾였고 문제가 발생했고 가라앉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 결론을 제 나름대로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저는 설교를 할 때 무엇보다 삶을 강조하는 설교자가 된 것 같습니다. 비록 완벽할 순 없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런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삶과 열매를 강조하다 보면, 조금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 저렇게 살아가야 한다... 이런 내용을 말하다 보니까 늘 설교가 어렵고 부담이 됩니다. 힘이 들고 은혜가 잘 안 됩니다. 여러분, 그럴 때가 많으시죠?
제가 일전에 한 방송 설교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제목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4가지” 그런 제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 주시고, 건강 주시고, 복 주시고, 구원 주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설교하시는지... 우리는 그냥 그 모든 것들을 값없이 다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멘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네, 그런 말씀만 듣고 신앙 생활하면 인간적으로 너무 좋죠. 예수 믿으면 좋은 일만 가득하고, 하나님 다 도와주시고 다 인도하시고, 모든 것이 은혜로 다 되면... 설교자도 좋고 듣는 신자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소위 잘 나가는 목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팔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팔고 하나님을 파는 능력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고 주의 사자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목사를 해도 될까요?’ 라는 심정으로 겨우 목사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신자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설교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유목사님께서 일찍이 목견 운동을 하셨는데, 저는 목견도 못되고 그저 신학교를 나온 여러분과 똑같은 양일뿐입니다. 저의 목회적 소명은 그런 작은 모습인데, 다만 고린도후서 말씀처럼 그런 저의 연약함 속에 주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고 많은 일을 행하신다는 말씀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주로 이런 내용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설교가 본의 아니게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설교인,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마침내 약속을 받았다는 설교도 여러분이 들으시기에 힘들지 않을 수 없는 설교입니다. 하지만 우리 입에는 쓰나 우리 배에는 달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제가 주로 삶과 열매를 강조하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목사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모르는 목사는 아닙니다. 인본주의 목사도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시고 주도하시고 앞서 나가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오늘 지난번에 이어 오늘 본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안에 아브라함이 나오지만, 그러나 오늘 말씀의 더 많은 내용은 사실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3가지 내용으로 매우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우리 신앙의 반성하고 고뇌하는 시선을 돌려,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흔들리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3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맹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 위해 앞서 나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맹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약속이 필요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곧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그분의 뜻을 성취하고, 헛되이 돌아오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그런 신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귀찮게 약속하는 신도 없고, 사람에게 가까이 와 약속하는 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실까요?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친히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잘 살고 돈 많이 벌고 시험에 합격하고 사업 잘 되고... 그런 세상적인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영적인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따라간 사람은 다른 삶이 됩니다. 세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냄새나는 옷을 벗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옷을 입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은 바로 그런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에 맹세를 더하십니다. 약속도 하나님답지 못한 일이라면, 맹세는 더더욱 하나님답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맹세하셨습니다. 그 맹세는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신 특별한 맹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 말씀에서 그런 특별하신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의 구원의 확실성을 하나님의 그 특별하신 맹세로 말씀합니다.
예전에 저는 어느 날 특별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고, 마치 휴거처럼 제 몸이 천사의 도움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휴거가 성경적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모습과 비슷하게 제 몸이 올라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물 밀듯 찬란한 기쁨과 영광이 제 마음에 밀려들었습니다. 그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찬란한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 절로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마지막 날에 그렇게 구원해주실 거라는 확신과 감격이 들었습니다.
그 꿈은 제게 귀한 체험이지만, 그러나 이제 제 안에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그 꿈이 계속 저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이나 꿈보다 천 배 만 배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그분을 따라갈 때,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맹세하시는 하나님... 이보다 더 큰 구원의 확실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로마교회의 위태로운 신자들을 향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신자들은 그 박해의 어려운 시간들을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오늘날 이 말씀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못할 만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없어도 무슨 상관인가?, 기도해도 무슨 소용인가?, 믿어도 무슨 소용인가?, 신앙은 환상이 아닌가?, 내가 잘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큰일을 당하면, 그만 낙심이 되고 회의가 들고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구원을 이끌어가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구원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이끌어가십니다. 꺼질 듯 연약한 우리의 작은 믿음을 강한 손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저도 본래 무엇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이고, 보이지 않으면 더더욱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의 짧은 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이 어려울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정말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리석고 기도도 부족하고 열정도 부족하고 열심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저의 부족함 속에도 하나님을 순진하게 믿는 마음을 보시고 지금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도, 그저 하나님을 믿었죠. 하나님 외에 다른 믿을 구석도 없고 사람도 없었습니다. 내가 길을 걸어갈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다른 이는 근본적으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내 삶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았습니다. 철학책도 읽고 문학책도 읽고 과학책도 읽고 여행도 가보았지만, 나를 채워주긴 해도 나를 사랑하고 구원해주시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떠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조용히 저를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라갈 때,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 삶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똑같고, 우리 인생도 똑같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마냥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건 힘들고 우울하기도 하고 재수도 없고 똑같습니다. 노력 안 하면 실패하는 것도 똑같고, 죽는 것도 똑같습니다. 얼마 전 춘천에서 새벽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세분이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오히려 초라하고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시고 맹세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믿고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새 생명이 자라고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이 생기고, 세상 사람들과 어쩐지 다른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다듬어 가며 계속해서 성취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는 신자 각 개인의 삶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에게는 자녀와 가정을 통해서, 누군가에게는 생의 목표와 일을 통해서, 누군가에게는 건강과 불행을 통해서, 누군가에게는 성공과 실패를 통해 그런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간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시고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확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한 마귀는 이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없고, 하나님의 약속 같은 것도 없고, 우리의 구원도 없고, 보이는 현실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치 마루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여러분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면, 하나님은 언제나 귀하신 손길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믿으시고, 항상 평안하시고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