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안식일 논쟁 3가지 말씀 (1)
막 2:23~28
2023.11.24.
우리는 지금 마가복음 2장을 통해 예수님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보고 있습니다.
그 갈등과 대립은 처음에 인자의 죄를 사하는 권세로 시작되어, 예수님의 죄인들과의 식사로 확대되고, 그리고 금식 논쟁으로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갈등과 대립은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과 안식일 치유 사건입니다.
아시다시피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신앙 전통입니다.
금식 전통보다 훨씬 중요한 중요성과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십계명 제4계명이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대대로 지킬 표징(출31:13~14)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할례 및 음식 규례와 함께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과 유대교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대립의 절정이 되고, 그 결과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논쟁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며 밀밭 사이로 지나갔는데, 그때 제자들이 무심코 이삭을 먹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왜 그랬을까요? 마가는 그 이유를 기록하지 않지만 마태는 그들이 시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요?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가 곡식을 따먹은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율법에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맨손으로 이삭을 따거나 포도를 먹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문제 삼은 걸까요?
24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네, 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않아야 할 일과 노동을 했고, 그것이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이 위반이라고 하는 근거는 정확히 말해 구약 율법이 아니라, 할라카라는 그들의 유대법입니다. 할라카는 모세오경의 율법에 랍비들의 해석과 세부 규정을 더하고 거기에 그들의 관습법을 합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할라카는 나중에 미쉬나와 미드라쉬와 탈무드로 더 크게 발전하게 되죠. 아무튼 거기에 보면 랍비들이 정한 ‘안식일의 39가지 금지 행위’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탈곡’입니다.
추수 자체야 명백한 노동이므로, 율법이 금지하는 안식일 행위(출34:21)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추수 관련 세부 규정이 없지만, 할라카는 세부 규정이 있어 손이나 도구를 이용한 탈곡도 안식일에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네, 당연합니다. 추수할 때 하는 탈곡은 넓은 의미로 추수 행위이므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탈곡’ 이야기를 길게 드린 이유는 제자들이 바로 이 ‘탈곡’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을 때, 그런 탈곡에 해당하는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 동일한 사건을 말할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눅6: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누가 보아도 추수를 위한 탈곡이 아니죠. 그러나 율법과 할라카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이유 불문하고 그것을 율법 위반으로 판단하여 제자들을 고발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때나 지금이나 소위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사람을 억울한 죄인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25~28절까지 3가지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다윗의 사례입니다. 둘째는 안식일의 본래 취지입니다. 세 번째는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3가지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에게 제자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설명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예수님의 3가지 말씀 중 첫 번째 내용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다윗의 사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면서 왜 이삭을 잘라먹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할라카로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이 과연 죄를 저질렀느냐 아니냐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것으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공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그들은 타락했고 율법 괴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도 귀한 대답을 하시는데, 그 첫 번째 대답이 바로 하나님의 뜻의 우선순위입니다. 사람이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은 작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 예수님은 과거 다윗의 사례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다윗과 그 일행은 사울을 피해 급히 도망하느라 식량이 없었고 매우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때 성막이 있던 놉을 지날 때, 놉의 제사장에게 만약 떡이 있으면 있는 대로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사장은 일반 떡은 없고 물려낸 진설병만 있다고 하면서 그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본래 안식일에 성막의 진설병을 교체하게 되는데, 물려낸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그 진설병은 하나님께 드린 거룩한 것이므로 오직 제사장과 그 가족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은 다윗에게 그 떡을 주었죠.
제사장은 다윗의 위급한 상황을 율법의 계명보다 더 중요하게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사장의 결정은 비록 명백히 율법을 어긴 일이지만, 구약 성경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과 이후 하나님의 다른 말씀이 없다는 점에서 승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그 다윗의 사례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도 그와 같은 구약 전통에 동의하시고, 나아가 그 사례를 통해 율법과 하나님 말씀의 우선순위와 그에 따른 예외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조건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며, 특별한 상황에서는 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을 감안하여 달리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위기에 빠진 사람의 생명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진설병을 제사장들만 먹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상황의 일반적인 율법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특별한 상황이 더 중요하고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귀한 설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사람인 우리들을 위해 문자적인 율법과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문자적인 율법 및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엄밀히 말해 서로 다릅니다. 엄밀히 말해, 주어진 문자적인 율법과 말씀은 사람의 차원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우리는 주어진 율법과 말씀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비유로 말하면, 율법과 말씀은 손가락이고 하나님의 뜻은 높이 뜬 달입니다. 우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통해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달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인 달은 보지 않고 율법과 말씀이라는 손가락만 보았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만든 할라카라는 손가락만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망치는 길에 기진하여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안식일이라고 해서 배를 쫄쫄 굶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지나가는 길에 시장하여 길가의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이 안식일 날 하나님께 크게 잘못한 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한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론 우리 사정도 모르시고 우리를 억압하시는, 그런 이상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이해할 때 그분의 뜻을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높은 것이 무엇이고 낮은 것이 무엇인지 우선 순위를 가지고 이해한다는 의미이죠. 마치 오늘날 우리가 법을 이해할 때 헌법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일반법이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시행령이나 세부 규칙이 중요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체계적인 성숙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답을 잘 찾을 수 있고 특별한 상황과 특별한 경우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율법과 말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위급한 이 사람의 생명을 위할 것인가?’ 우리는 답을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숙한 이해는 진리의 자유와 유연함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정죄와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닌, 사랑과 은혜의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율법 대신 우리에게 주신 신약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그 뜻의 중심을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소한 작은 것을 가지고 다투거나 매달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기독교를 떠나서라도 본래 무슨 진리든,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자도 유연해서 무엇을 고집하는 법이 없었고, 할 만하면 했고 할 만하지 않으면 안 했습니다. 해골 물을 마신 원효도 그랬습니다. 그 물을 마시고 중국으로 가는 길을 돌아섰죠.
그래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작은 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넓고 높은 시야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진리와 중심에 있어서는 한없이 엄격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한편으론 넓고 자유롭고 다른 한편으로 깊고 엄격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심으로, 자유롭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