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히 6:13~15
2023.11.12.
히브리서 기자는 책망과 경고와 위로의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가 듣기에 둔하고 어린아이와 같다고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타락한 자가 되어 가시와 엉겅퀴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구원의 열매를 맺어 왔고 지금도 맺고 있고 끝까지 맺기를 바란다고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부분 4개의 권면 가운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말하면, 성경에 그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지금 말씀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개인을 위한 복이나 자녀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은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원대한 구원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그 약속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백성의 첫 사람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확실한 약속을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확실한가...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가 들어간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우리에게 그 내용과 과정을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로마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어려움에 빠진 유대인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말씀은 다른 성경에 비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고, 그중에서도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매우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사건이나 일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공적인 새로운 출발점으로 세우시기 위해 어떻게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고 완성하셨는지... 그런 공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우리의 아브라함 이해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창세기를 읽으며 아브라함을 우리와 동일시하고,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렇게 많은 복을 받고 잘된다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창세기 15장 말씀만 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믿음으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피상적으로 창세기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은 무조건 이신칭의입니다. 믿으면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조건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조건 성취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는 바는 그런 단순하고 간단한 내용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 말씀과 거기에 담긴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4절에서 창세기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많은 약속들 중 맨 마지막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처음 만날 때부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 같은 약속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침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 14절 말씀으로 최종적인 같은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계속 반복된 같은 약속... 참 이상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많은 약속 중에서 이 맨 마지막 약속을 지금 인용한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그 이상한 약속이 어떤 성격이고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아울러 히브리서 기자는 15절을 말씀하는데, 이 15절 말씀 역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성취되는 것이 당연하고, 더구나 그 약속에 하나님의 맹세까지 더해진다면 그 성취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두 말 하면 잔소리고 세 말 하면 입 아프죠.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15절에서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기 때문에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13,14절과 15절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면서 동시에 아브라함의 오래 참음을 말한다는 사실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쉽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무조건 성취된다고 믿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중 특별히 맨 마지막 것을 말하고, 또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말하면서 하나님만 중요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중요하게 말하는 걸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와같이 말씀하는가?... 네, 우리가 이 내용을 알기 위해선 창세기로 돌아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처음부터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그에게 큰 약속을 하시며 부르셨습니다.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약속과 복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노아처럼 그 시대 사람들과 다르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일생 동안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다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후 조카 롯과 헤어지게 되는데, 그때에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되리라”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거듭된 약속과 달리, 아브라함에게 자식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많은 일이 일어나고 계속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나타나신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이끌어 밖으로 나가 하늘의 뭇 별을 보여주시며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러나 그 약속도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다리던 아브라함은 86세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맙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13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신 것은 그의 99세 때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후손 사이에 세워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75세에 가나안 땅에 왔는데, 그 약속이 실현되어 아들을 보게 된 것은 100세가 되어서였습니다.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25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다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자라 나무 등짐을 메고 산을 오를 나이가 되었을 때에, 그래서 아마도 중학생 정도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한 산에 올라 이삭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 모리아 산이 바로 시온산이자 예루살렘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막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이와 같은 최종적인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게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완성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정리하면,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이후로 계속 같은 약속을 받았는데, 86세에 그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여 시련을 겪고, 그런 후 100세에 이삭을 낳아 그 성취를 맛보고,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삭이 자란 후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이 있고, 그 마지막 시험 후에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약 40년 정도가 걸렸고, 한 번의 약속이 아니라 여러 번의 약속이었고, 아브라함의 생애 중요한 순간에 반복적으로 나타났고, 조금씩 자라고 발전하는 모습이었고, 무엇보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실패와 순종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 신인협력적인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렇게 이해하면서,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어떤 은혜와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아마도 핵심은 이것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과정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만난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를 인도하고 구원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우리는 그런 많은 시간 속에 하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 믿음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도 알고 하나님의 은혜도 알고 하나님의 역사도 알고 응답도 받고 체험도 하고...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우리의 믿음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시지만, 아직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마음이 차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처럼 뭔가 결정적인 믿음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처럼,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져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눈이 먼 것처럼,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 완전히 안기는 사건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믿음의 선을 넘어야 합니다.
A.D와 B.C가 나누어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오래 참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며 안정적으로 계속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을 이렇게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이런 많은 과정을 생략한 채 신학적으로 쉽게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역사이다, 구원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거듭남이다...” 네, 물론 그렇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도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쉽고 간단한 하나님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가까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데, 구원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경을 올바른 마음으로 읽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이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간 아브라함을 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봅니다. 열왕기서를 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망한 이스라엘을 봅니다. 복음서를 보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과 그 길을 따라간 제자들을 봅니다. 바울서신을 보아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주의 종으로 최선의 삶을 산 바울을 봅니다.
이렇게 성경 어디를 보아도, 구원을 신학적으로 말하고 이론적으로 말하고 간단하게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는 요한복음과 바울서신 등 성경의 몇몇 구절만을 뽑아서 이론을 만들고 집을 지어, 하나님의 구원을 그렇게 인간의 지식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신학의 월권입니다. 그것은 신학이 성경보다 앞서가고 성경보다 더 큰 집을 짓는 잘못된 일입니다.
처음에 신학을 배우면, 뭐가 뭔지 몰라 배우기에 바쁩니다. 신학을 배우고 나면, 사역하느라 바빠 달리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배운 대로 가르치고 설교하기에 바쁩니다.
한국 사람 신학이면 비판도 하겠지만, 잘 모르는 외국 사람 신학이니까 비판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정통 신학이라고 하니, 더더욱 달리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보면 외국의 문물을 무조건 사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때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자의 성리학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지, 그것을 조금 달리 생각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부족하였고, 혹 그런 사람은 사문난적으로 몰려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나라의 신학계나 교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 것을 그대로 가져오고, 그대로 지키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이 우리의 안경이 되어 성경을 전부 그 안경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으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으로 성경을 보고, 하나님도 그렇게 이해하고, 구원도 그렇게 이해하고,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고... 그래서 성경을 새롭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이 히브리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탈락을 경고하는 말씀, 오래 참음으로 약속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이 말씀을 만지고 재단합니다. 이 말씀은 경고가 아니고 이 말씀은 탈락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빼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도 빼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시는 하나님도 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을 알아야 하기도 하고 배워야 하기도 하지만, 신학은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을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경을 벗고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의 길을 그렇게 걸어가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수고와 땀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영접 기도 한 번으로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도우심에 우리의 최선이 어우러지는 진지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 가운데,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칼빈의 신학을 말하고 구원의 확신을 말하면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 성경이 말씀하는 최종 구원을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삶과 신앙은 분리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오류에 얼마나 많이 빠져있습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이렇게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지나가는 바람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점점 약해지고, 참된 교회와 신자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의 역사가 어우러지는 신인협력적인 역사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신인협력적인 신앙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50을 주시면 우리가 나머지 50을 내어서 100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구원의 반은 우리의 공로가 되고 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신인협력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100을 주시므로 우리도 100을 내고... 그래서 마침내 100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신앙과 삶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노력하며 살고 전진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하면 기도에 그치지 말고, 기도를 바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 기도를 할 때에도 하나님께 해달라고만 하지 말고,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은사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은사를 받았으면, 거기에 그치지 말고,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고, 그만큼 겸손하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달콤한 말씀과 치우친 신학과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앉은뱅이로 만들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반쪽 신앙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일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살아가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분투하고... 우리의 믿음과 능력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삶과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받고 구원의 지평선을 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렇게 뚜렷하고 온전한 신앙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