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보를 버리고
히 5:11~6:3
2023.10.15.
히브리서 기자는 앞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떤 대제사장인지... 성경 신학적인 해석을 말씀했습니다. 조금 어렵고 딱딱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잘 알고 예상할 수 있듯이, 권면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이와 같은 특징을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해석과 권면을 번갈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순서대로라면,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멜기세덱에 대한 말씀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대한 성경 신학적인 해석을 7장으로 미루고, 오늘 본문부터 6장 마지막까지 총 4개의 권면의 말씀을 진행합니다.
그 4개의 권면 말씀은 첫째는 책망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둘째는 경고입니다. 6:4~8입니다. 셋째는 따뜻한 격려입니다. 6:9~12입니다. 넷째는 약속입니다. 6:13~20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대한 말씀을 잠시 멈추고, 책망과 경고와 격려와 약속이라는 총 4개의 권면의 말씀을 진행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4개의 권면 가운데 첫 번째인 책망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멜리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지금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아직 그들의 생각은 구약 신앙과 제사 제도에 익숙하고 그만큼 구약에 매여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있는 옛 신앙과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예수 신앙을 가지려면,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특별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에 대해 좀 더 충분한 말씀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구약의 레위 제사장은 하나의 모형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의 원형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은 발견하고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듣는 것이 둔하므로 어렵습니다.
여기서 ‘둔하다’는 말은 ‘둔하다, 무디다, 게으르다’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단어가 6:12절에 한 번 더 나옵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그래서 이 ‘둔하다’는 말씀의 의미는 너희가 지적으로 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가 기꺼이 듣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이 없어서 둔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둔하고 닫혀있고, 그래서 이해가 어렵고 그래서 설명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콩 밭에 가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죠. 그래서 지금 많은 유대인 신자들은 다가오는 핍박을 피해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멜기세덱에 대한 말씀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대한 말씀을 잠시 멈추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와 같은 히브리서 기자의 염려와 책망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내 삶과 내 일과 내 상황이 항상 우선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둔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고 들리지 않고... 그래서 내 안에는 내 생각만 가득하고... 그래서 성령님께서 근심하시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가을은 열매를 생각하고 결실을 생각하는 시간이죠. 나는 한 해 동안 말씀의 결실을 많이 맺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내 안에 들어왔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팔복의 하나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책망은 12절로 이어집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일전에 한 교계 신문을 보니까, 교단장을 역임하시고 은퇴하신 한 목사님이 신문에 작은 칼럼을 썼습니다. 은퇴한 지금 돌아보니, 한가지 후회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간 자신의 목회와 설교는 한 마디로 설탕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듣기 좋은 위로와 격려와 승리하자는 말씀들... 누구나 좋아하는 그런 말씀을 위주로 설교하고, 목회도 그렇게 평생 했다는 것입니다. ‘감사합시다, 건강 합시다, 복 받고 잘 됩시다...’ 그래서 돌아보니 자신이 겉으로는 성공한 목회를 하고 큰 교회도 세우고 명예롭게 은퇴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죄송하고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네, 그 목사님의 글처럼, 지금 우리 교회 안에는 달콤한 설탕물 같은 말씀이 너무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주십니다, 믿으면 다 구원 받습니다, 예수 믿고 행복하세요...”
우리는 주일 낮 예배에서 대체로 그런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도 물론 좋은 말씀이지만, 한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신자가 이런 말씀만 들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아무 분별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현실과 자기 생활 속에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생각하거나 분별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사업가이면 그렇게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돈을 쫓는 사업을 하고, 그런 사람이 정치인이면 일반 정치인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를 하고, 그런 사람이 부모라면 일반 가정처럼 세속적으로 자녀를 기르고, 그런 사람이 목회자이면 프로그램과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목회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품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우리를 세우고 책임과 의무를 말하고 때로는 우리를 책망하고 돌이키게 하는 의로운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됩니다. 의롭게 살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공동체를 귀히 여기고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단단한 말씀들이죠.
또한 단단한 말씀은 지금까지 히브리서가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깊이 해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말하고 우리의 고난과 인내와 소망을 말하고 우리 믿음의 담대함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단단한 말씀을 먹고 소화하면, 우리에게 분별력과 능력과 지혜가 생깁니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
이 말씀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훈련된 생각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깊이 있는 말씀은 우리 생각과 사고를 올바르게 형성합니다. 사고의 방법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성숙해진 생각과 사고로 선악을 분별합니다.
기도를 통해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하고, 우리는 그런 깨끗해진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과 선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이런 말씀과 해석과 권면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가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강조하는지 잘 보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히브리서를 설교하는 이 설교 시간도 잘 귀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딱딱하고 재미없지만, 이런 말씀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과 지혜와 분별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한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6:1~2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단단한 말씀을 잘 듣고 성장해서, 성숙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이 말씀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를 아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죠. 거기에 계속 머물거나 맴돌거나 그것을 다시 쌓거나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간혹 어떤 교회를 보면, 금요기도회를 매주 회개기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그렇게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요기도회만 되면, 목사님의 설교도 죄에 대한 말씀을 주로 전하고, 이어지는 기도 시간에 모든 성도가 한 주간의 죄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눈물 흘리며 고백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런 회개의 시간을 매주 똑같이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런 회개의 시간을 신앙의 루틴으로 매주 정기적으로 가지는 것이 과연 좋을까요? 물론 우리는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주 죄를 샅샅이 찾고 철저히 고백한다고, 우리가 거룩해지고 신앙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철저한 회개를 위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고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와 회개 기도를 조금 구분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가 회개하여서 돌이키고 밝고 건강한 생활을 하고 성숙할 때 극복되는 것이지, 계속 눈물 흘리며 열심히 회개기도 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를 짓고 회개 기도하고 죄를 짓고 회개 기도하는 그런 어두운 어린 신앙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벗어나, 그리스도의 도의 성숙한 영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말은 성숙한 영역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말씀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해당하는 6가지 신앙을 예를 들어 말씀합니다. 이 6가지 신앙은 2개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배우게 되는 회개와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처음 전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래서 이것은 우리 신앙이 시작하고 출발하는 기초적인 내용이죠.
그런데 한 사람이 점점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면, 회개할 것은 줄어들고 믿음은 커집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신자는 회개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러워지고, 반면에 믿음은 커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금요기도회 예를 든 것과 같이, 회개와 회개 기도에 열심을 내는 신앙생활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에 머무르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세례와 안수입니다.
세례도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한편 안수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안수는 아마도 한 사람이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도록 안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씀하는 세례와 안수도 우리 신앙의 아주 기초와 시작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세례와 안수를 대단하게 생각하게 생각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머무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과 심판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부활할 것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믿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신앙의 오랜 고백 가운데 하나인 사도신경 안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기초를 말하고 거기에 머무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신앙엔 더 높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하면서 이런 내용을 말씀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방언을 받고 그것을 하늘의 언어와 천사의 말이라고 대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다 구원을 받고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지도도 필요없다고 거부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방언을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방언은 우리 신앙의 기초적인 내용이죠. 그들이 하나님을 오래 믿고 성숙해져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때 그 시대 속에 고린도교회에 그런 은사를 허락하셨고,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도 있고 받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방언을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나 사도 바울이나 동일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기초를 형성하는 이런 초보적인 내용에 머무르지 말고,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의 도, 즉 보다 성숙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리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은사인 사랑으로 나아가고, 자기 절제를 넘어 자기 부인과 헌신으로 나아가고,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고, 승리가 아닌 고난의 겟세마네와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성숙한 말씀과 신앙으로 나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6:3 말씀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네, 방금 앞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보다 완전하고 성숙한 데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면, 우리가 그런 영적인 성장과 진보를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 당연한 말씀이죠. 영적인 성장과 진보는 우리 힘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셔야, 우리는 그런 영적인 성장과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본문의 책망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책임에 대한 균형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젖을 떼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가 되어야 하고, 초보를 버리고 완전하고 성숙한 데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그리고 우리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균형을 말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말하면서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면서 우리를 말하는... 이런 두 개의 초점을 가진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유튜브에서 설교를 살펴보다가, 한 유명한 목사님이 마태복음의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 설교하시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상을 보게 된 이유는 그 영상의 제목이 무척 자극적이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영상의 제목이 이랬습니다. “ooo 목사의 10분 명설교 시리즈 :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대부분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좋은 밭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라면, 그 설교를 안 할 수가 없죠. 저도 마태복음 강해설교를 하면서 그 설교를 했습니다. 찾아보시면 제가 어떻게 설교했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상의 제목이 제가 그 말씀을 평소 생각하는 방향과 달라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목사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옥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옥토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네, 틀린 말씀은 아니죠. 그러나 저는 그 말씀에 전적으로는 동의하지는 못하는 목사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이 어떤 배경과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합니다. 그 목사님은 장로교 목사님이시고, 장로교 신학을 하시고, 장로교 신학교에서 가르치시고... 그러니까 그 목사님은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계십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중요시하는 신학이죠.
그래서 칼빈주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있으면, 인간의 측면보다는 하나님의 측면만 강조하는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장로교회가 많고 장로교 신자들이 많으니까, 그런 신학적 배경을 가진 설교 영상이 많이 올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튜브를 보다 보니까,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또 다른 비슷한 설교 영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영상들 역시 그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씨를 뿌리라는 천국 비유이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옥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비유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설교들도 다 그 신학적 배경은 인간의 측면보다는 하나님의 측면만 고려하는 칼빈주의 신학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체로 칼빈주의가 신학적 주류이지만, 전세계적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 바와 같이,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와 함께 인간의 노력과 최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측면과 인간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할 때 설교한 것처럼, 씨 뿌리는 비유는 제목 그대로 어느 밭이든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한다는 천국 비유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실 때는 그 밭을 사람의 마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래서 말씀을 듣고 깨달아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는 비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이기도 하고 4가지 밭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씨도 중요하고 밭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비유를 칼빈주의 입장에서 하나님 측면만 말하는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밭이 되기를 사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이 말씀을 따라, 최선의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책망의 말씀을 합니다. 다가오는 박해의 어려움 앞에서, 유대인 신자들은 돌아가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 오늘 말씀은 그런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 어려움을 이기고 끝까지 주님을 붙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씀합니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귀한 책망의 권면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