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히 4:11~13
2023.09.24.
지난 주일에 11절까지 살펴보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11절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겠죠. 그런데 오늘 본문인 11~13절은 한 덩어리입니다. 이 3구절은 한 덩어리로서 지금까지 말씀한 권면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결론을 이루고 있는 이 3구절을 하나로 이해하면서,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의 2번째 내용으로 모세와 안식을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모세의 하나님 집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집으로 들어가자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자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11절에서 그와 같은 말씀의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저 순종하지 않았던 모델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의 모델입니다. 하나의 모델이고 모형이고 예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실체와 원형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날 복음을 듣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순종한 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델을 매우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그들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 오늘의 우리의 실패로 다시 나타나고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의 모델로서 중요하게 말씀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오직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고, 그들의 불순종의 모델을 본받아선 안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12절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대체로 많은 설교에서 이 12절과 13절을 히브리서 문맥에서 따로 분리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큰 능력을 이 구절을 통해 말씀하곤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이 히브리서 말씀의 본래 의미는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갑자기 하나님 말씀에 대해 무언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우리가 전도 목적으로 요한계시록 3:20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우리는 이 말씀을 전도 목적으로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의미로 이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래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죠.
그 말씀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그 말씀을 우리와 무관한 전도용으로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실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믿는 내용이지만, 그러나 이 말씀이 지금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12절 말씀에는 앞 문장과 이어주는 ‘가르’라고 하는 연결어가 있습니다. 헬라어 ‘가르’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 12절 말씀이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그래서 이렇게 12절 말씀은 11절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인데, 우리말 성경은 여기서 ‘왜냐하면’을 빼고 번역을 했고, 또 이런 내용을 간과한 많은 설교가 워낙 예전부터 그렇게 설교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말씀을 진행하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다른 내용을 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굉장히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말씀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를 존중하면서, 본래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의미로 이 12~13절을 말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12~13절 말씀 전체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드린 것처럼 이 문장의 시작에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앞 문장과 연결되어 앞 문장에서 말씀한 그들의 불순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불순종을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앞에서 계속 중요하게 인용했던 시편 95편 말씀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12절 말씀의 의미는 예리한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95편 말씀이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불순종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교훈을 받아, 그들이 걸어갔던 그 불순종의 모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불순종을 그렇게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시편 95편 말씀은 어떤 내용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잠시 시편 95편을 읽어보면, 그 시편은 참 특이한 시편입니다. 앞부분은 너무나 아름답고 부드러운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 시편의 뒷부분은 너무나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므리바와 맛사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내가 40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시편 95편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의 깊은 불순종의 마음과 태도를 예리한 검과 같이 드러내고 판단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13절의 ‘하나님’은 12절의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13절 말씀의 의미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1~13절 말씀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을 바라보면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고, 뒤를 돌아보면서 그들의 저 불순종의 모델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의 악한 모델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시편 95편의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예리한 검처럼 그들의 불순종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고, 모든 것은 다 그분 앞에 드러나게 된다”
네, 이것이 11~13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같은 말씀을 당시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하는 이유는 지금 그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배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신앙의 위기 속에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유대교와 율법에도 하나님이 있습니다. 유대교로 가면 박해를 피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며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같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어떤 은혜와 교훈을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우리 인간의 마음에 있는 깊은 불순종과 죄를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 인간 마음 안에는 그와 같은 깊은 불순종과 죄가 있을까요?
어떤 분은 그것을 인간의 타락한 원죄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우리는 모두 그 죄의 후예들이고 그 근본적인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죄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원죄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없고, 또 원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담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 직접적으로 전가되는 것인지... 이런 내용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그러나 그런 여러 신학적인 내용을 뛰어넘어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 안에는 그런 깊은 죄와 불순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의 원죄가 아담의 원죄인지 아니면 내 자아라는 원죄인지... 그런 논의를 뛰어넘어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런 깊은 불순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깊은 불순종은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 하나님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고 환경이 되고 조건이 되자, 여지없이 불순종의 싹은 마음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다를까요? 편안하고 어려움이 없고 잘 될 때 하나님을 믿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하나 둘 찾아오고 위기가 찾아오고 나의 평안이 깨어지고 나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불순종이 고개를 듭니다.
하나님이 섭섭하고 의심스럽고 안 계신 것 같고 불신하고... 급기야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하는 불순종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가라지 비유가 있습니다.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원수가 뿌린 가라지는 사실은 깜뿌기를 가리키는데, 그 씨는 곡식에 붙어 나중에 추수 때에 곡실을 깜뿌기로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도 근본적인 불순종이 있지만, 사탄도 끊임없이 우리 삶 가운데 불순종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서 그 씨가 우리 안의 근본적인 불순종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체질이 바뀌고 맙니다.
그러면 비록 우리의 겉모습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모습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의 반대편에 서는 불순종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 불순종의 사람은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교회 안에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말씀하기를 ‘너희의 영적인 체질을 부단히 변화시켜서, 불순종의 아들들이 되지 말고 빛의 자녀들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 사랑 가운데 행하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도 마땅치 아니하니...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게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영접하고 주님을 고백하면, 자신이 이미 천국의 시민이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고백하면, 그날로 자신의 죄와 죄에 대한 책임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많은 교회가 그렇게 신앙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우리 신앙에 한계가 왔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단순한 복음주의 신앙은 자기 신앙도 지키지 못하고 참된 신앙의 길도 걷지 못하고 오늘의 사회 현실에도 잘 대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그런 단순한 신앙을 말하는 복음주의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주셔도, 우리는 내 삶 속에서 그 죄로부터 돌이키고 책임을 지고 벗어나는 충분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자들에게 단순히 회개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는 충분한 시간... 우리는 그런 시간을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고, 우리 안의 불순종을 제거하고 빛의 열매들을 하나씩 맺어 가야 합니다. 자기 중심, 자기 교만, 자기 욕심... 하나님보다 더 높이 자리잡고 있는 그런 나의 완악한 모습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언제가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 안의 근본적인 불순종과 죄를 고쳐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저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깊은 불순종과 죄를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깊은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깊은 마음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어떤 공간이 있는지, 무엇이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의 근본적인 죄인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 그것이 내 안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겪고 사건이 일어나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내가 일이 잘 되고 높이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자, 나는 교만해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납니다. 반대로 내가 일이 잘 안 되고 실패하고 힘들어지자, 나는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하나님을 믿기 싫고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실제로 발생한 그런 일이나 사건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일이나 사건 이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우리의 깊은 것을 예리하게 살피시고 판단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시편 95편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판단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정확히 판단하십니다.
내가 얼마나 여전히 완악한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믿는지, 내가 얼마나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은 얼마나 진실한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믿음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질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온전히 살피십니다.
오래전 저는 처음 선교단체 간사가 되어 간사훈련의 마지막 코스로 필리핀 단기선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IMF 시기여서, 저는 단기선교비 80만원 마련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지만, 제 마음 안에는 단기선교비의 반만 후원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 정도만 후원을 받아도 감사한 일이고, 나머지 반은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채우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잘 몰랐지만, 제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반만 믿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간사로 부르시고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신다는 믿음보다는, 저는 현실적으로 나의 필요의 반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후원을 받고 시간이 흐르면서, 제 계획대로 반 정도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분이 좋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발할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후원이 조금 더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 주일 저녁에 교회 목사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이 선생, 단기선교 간다고 들었는데 이거 선교비에 보태세요...”
그 봉투를 받는 순간 마음이 무척 불길해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봉투를 열어보았을 때, 거기엔 80만원을 꼭 채우는 금액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마음이 들키고 찔린 사람처럼 하나님께 너무 부끄럽고 두렵고... 저의 불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간사 시작부터 하나님을 반만 믿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100% 믿어야 하죠. 비록 우리의 실제 현실엔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만큼은 100%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100% 믿어도, 돌아서서 우리 마음에 조금의 불안이나 의심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조금도 불안하지 않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 중심을 계속 가지면 됩니다.
그 사건 이후 저의 믿음은 한 단계 발전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저는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예리한 검처럼 살피시고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그분과 그분의 말씀 앞에 숨길 수 없고,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발람 선지자는 그 보낸 자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발람 선지자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그 많은 선물과 후한 대접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발람의 마음 중심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던 발람 선지자는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것,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합당치 않은 것이라면 즉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은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적당히 믿고 하나님께 적당히 순종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한 기도를 하고 정직한 예배를 드리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는 벌거벗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하루하루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히 살아가시고, 온전히 순종하시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