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 떠내려가지 않게
히 2:1~4
2023.08.13.
우리가 지난주까지 살펴본 히브리서 1장 말씀은 조금 어렵고 딱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1장을 바탕으로 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하나도 어려운 부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달리 설명이 많이 필요한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히브리서의 첫 번째 권면의 말씀을 잘 듣고, 이 내용을 우리 안에 묵상하면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권면하는 말씀은 크게 3가지입니다. 그것을 1절부터 차례대로 정리해보면, 첫째,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 둘째,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셋째, 우리가 받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3가지 권면의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흘러 떠내려간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 안에서 여기에만 1번 나오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반지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지는 것, 또는 배가 닻을 내리지 않아서 조금씩 물결에 떠내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사소한 우리의 일상과 부주의가 반복되고 쌓이면서, 돌이키기 어려운 모습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반지를 잃어버리게 되고, 또 먼바다로 떠내려간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당시 로마 교회 신자 앞에는 이와 같은 물결이 계속 흐르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지 않은 불안한 신앙생활, 기독교를 향한 사람들의 의심과 냉대, 안전한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다가오는 박해의 어두운 그림자와 먹구름... 그들의 믿음은 이런 도전을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들 안에 신앙의 힘과 의지가 약해지고 고갈되면, 그들은 결국 흘러 떠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우리를 향한 그와 같은 세상의 물결은 동일합니다. 그 물결은 우리 삶에도 찾아오고, 우리 신앙에도 찾아옵니다.
지금 한여름이 지나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가을이 찾아오게 됩니다. 저는 언젠가 한 번, 가을과 관련하여 조금 적적하고 쓸쓸한 현실적인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춘천에 살며 서울에 면접을 보고 온 한 청년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 살며 춘천으로 하루 여행을 온 중년 커플의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 다 춘천과 소양강 댐과 청평사라는 절을 배경으로 잔잔히 펼쳐집니다.
청년은 아직 젊지만, 계속된 취업 실패 속에 흘러 떠내온 자가 됩니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길게 하고 절에 올라가 절도 올리고 식당 알바 일도 열심히 하지만... 그 청년의 마음은 무겁고 적적하고 암울합니다.
중년 커플은 부부가 아닌데 하루 춘천 여행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각자 자기의 배우자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무의미해져서, 하루 정도 다른 사람을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밥도 먹고 배도 타고 절도 둘러보면서 나름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울에 와서 마지막으로 각자 화장실에 들렀다가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맙니다.
영화는 그렇게 각자 나름의 이유로 흘러 떠내려온 사람을 보여주고 싱겁게 끝납니다.
제가 이번 주에 그 장소에 한 번 가보았습니다. 소양강 댐과 청평사를 둘러보며 영화의 분위기를 한 번 느껴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아쉽게도 그 분위기를 많이 느끼진 못했습니다. 언젠가 늦가을에 한번 다시 가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많든 적든... 그렇게 우리 인생에서 각자 나름의 이유로 흘러 떠내려온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지를 잃어버린 휑한 손에 원치 않는 곳으로 온 우리의 모습... 우리는 그런 우리 인생의 한 모습도 하나님 안에서 잘 극복해야 합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늘 소망과 의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삶을 살면서, 우리 주위의 그런 분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흘러 떠내려가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히브리서 당시 이유와 지금의 이유는 많이 다르죠. 그때는 직접적인 박해와 직접적인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보다 크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신은 없다는 무신론, 신앙과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성경 말씀에 대한 비하와 무관심, 과학과 인간 진보에 대한 낙관, 나 자신의 자유로움과 물질적 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 이기적이고 세속화된 신앙, 존경받지 못하는 교회... 오늘날 우리 신앙은 이런 도전을 매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새로 신앙을 가지기가 무척 어렵고, 기존 신자들도 자의 반 타의 반 한 사람씩 세상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이 시대는 우리 신앙의 쓸쓸한 늦가을 같은 시대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신앙을 쓸쓸히 떠나선 안 됩니다. 또 떠나지 못해 겨우 신앙을 붙잡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을 향해 밀려오는 물결을 영적으로 인식하고, 또 역사의 큰 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을 저해하는 물결은 밀려오고 밀려가고 시대마다 다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오랜 역사 속에 많은 시대를 극복하며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의 이유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시대마다 신앙을 잃어버린 뭍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제는 소를 샀고 오늘은 밭에 가야하고 내일은 누구를 만나야 하고... 어제는 어제의 이유로 신앙을 떠나고 오늘은 오늘의 이유로 신앙을 떠나고... 그런 사람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우리의 신앙도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더욱 하나님이 없는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림자 한 자락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온통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작은 자부터 버려지고 잊혀지는 차별적인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세상 속에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를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도 있고 하나님의 섭리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자기 신앙과 자기 삶을 찾는 여정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모압 땅에 혼자 남은 나오미는 그렇게 유대 땅으로 돌아오고, 보리 이삭을 줍던 룻은 그렇게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나오미는 많이 흘러 떠내려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돌아보셨다는 고국의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붙잡았습니다. 룻도 낯선 땅에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이 밭 저 밭을 다니며 얼굴이 빨갛도록 이삭을 주웠습니다. 그런 룻을 보아스가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려운 시대 속에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공동체의 사랑 속에 그런 귀한 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권면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합니다.
흘러 떠내려가는 위기의 신자들을 향해 히브리서 기자가 두 번째로 권면하는 말씀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입니다.
네, 그것은 들은 것에 유념할 때, 우리 안에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는 이것은 특별한 신앙적 방법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방법이자 원리입니다. 무엇이든, 그것이 좋건 나쁘건, 어떤 사실을 계속 반복적으로 들으면 그것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좋은 확신이 되고,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나쁜 확신이 됩니다. 무의식적으로도 그렇게 되고 의식적으로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계속 반복하는 이 방법은 맹목적인 것이기 때문에, 좋은 목적으로 잘 사용해야 합니다. 칼이 요리사의 손에서 잘 사용되면 좋은 요리도구가 되지만, 칼이 범인의 손에서 사용되면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이든 뉴스든 사람의 이야기든 좋은 것은 계속 들으시길 바라고, 그러나 나쁜 것은 분별하셔서 반복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하는 말씀은 우리가 들은 것은 모두 좋은 말씀이므로, 우리는 그 말씀에 계속 유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흔히 말하는 세뇌가 아닙니다.
교회를 오해하는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교회가 사람을 세뇌한다고 말을 합니다. 특히 젊은이 중에 비판적인 이들이 그렇게 많이 의심합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는 불행한 일도 있습니다.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왜곡된 신앙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마지막 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참된 말씀을 떠나지 않기 위해 계속 이 말씀에 유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들으시길 바랍니다. 이 주일 설교 시간도 그와 같은 말씀을 듣는 반복의 시간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의 설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설교는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 본문이나 설교 내용이 새로울 수는 있지만, 그러나 설교의 결론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늘 들었던 결론을 다시 듣습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바로 거기서 우리 신앙의 힘이 자랍니다.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행하지 못하나, 하나님 안에서 그 새로운 역사를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특히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틈틈이 성경을 읽으시면, 그러면 여러분 안에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제가 이번에 뼈를 다쳤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동안 뼈에 대한 치료 영상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매우 인상적인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사가 뼈를 붙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수술을 하든 수술을 하지 않든, 의사는 단 1mm도 뼈를 붙이지 못합니다.
뼈가 부러지면 거기에 피가 나고 진액이 나와서, 우리 몸이 스스로 뼈를 붙이게 됩니다. 의사는 그 과정을 잘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의료지식이 부족한 저는 뼈가 스스로 붙는다는 것에 큰 인상적인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원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나 목사가 신자들 개개인의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를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아무리 성경공부에 열정을 쏟고 아무리 좋은 훈련을 해도, 단 1mm의 신앙과 신앙의 뿌리를 교회나 목사가 만들지 못합니다. 목사는 그 일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뼈가 스스로 붙듯이,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는 스스로 자라게 됩니다. 오직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저절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저는 지금까지 훈련도 많이 받아보고 세미나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언젠가는 어떤 세미나에서 깃발을 들고 뛰어다녀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 신앙을 자라게 하고 뿌리를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담긴 설교와 성경 읽기와 좋은 신앙 주석과 책이었습니다. 특히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제 신앙이 잘 자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자기 신념이 아니기에, 내가 스스로 무엇을 믿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내가 될 때, 자기 신앙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그렇게 자기 신앙을 가진 공동체로 세워주시고, 나아가 한 분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세워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세 번째,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얻은 우리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겨선 안 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에 이어서 한 가지 경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신 구원입니다.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이 땅의 죄의 현실 속에서 그분의 삶과 죽음으로 또 그분의 살과 피로 직접 이루신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구원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알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큰 구원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 길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거부한 그 사람은 그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고 말씀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교의 한 종교인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그런 신을 나는 믿고 싶지 않다” 네, 당연합니다. 그런 신이라면 저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독교의 전제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 타락했다는 사실, 죄인이라는 사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사실...
기독교도 구원의 종교이고 불교도 구원의 종교이지만, 기독교의 전제와 불교의 전제는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신중한 불교인이라면, 자기 시각과 자기 전제에서 볼 것이 아니라, 자기 시각과 자기 전제가 올바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죽어가는 죄인이 맞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와 죽음으로 이루신 사랑의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은 매우 악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오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을 하나님과 우리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죠.
그러나 실제론 많은 것들이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내용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긴 문장의 말씀이지만, 그 의미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예정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령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바람을 잡고 뜬구름을 잡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영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을 등한히 여겨선 안 됩니다.
선불교에 전해 내려오는 한 설화가 있습니다. 학인의 모든 질문에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던 구지라는 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제자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그 자리에서 제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뛰쳐나가는 그 동자를 불러세우고 ‘부처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동자는 스승이 늘 하던대로 손가락을 올리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나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이런 극단적인 치열함이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록 그 정도와 모습은 달라야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 신앙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모습은 동일하게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지 한 번 더 생각하고, 이것은 내 욕심과 내 잘못된 생각인지 한 번 더 고민하고...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구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섭섭해서 예수를 못 믿고, 부자가 못되어서 예수를 못 믿고, 바빠서 예수를 못 믿고... 우리는 구원의 삶을 그렇게 살아선 안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인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는 지금 내 앞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하는 하나님 존재의 의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어려운 세상 속에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선 자기 신앙과 자기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유념할 때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 신앙을 가졌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사랑의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히브리서 기자가 첫 번째로 권면하는 이와 같은 귀한 말씀을 늘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