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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이해

믿음찬교회 0 117 2023.07.16 11:47
히브리서의 이해
히 1:1~2
2023.07.16.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조금 낯설고 어렵고 묘한 성경입니다. 참 좋은데, 이상하게도 잘 안 보는 성경입니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데, 너무 잘 쓴 성경입니다. 굉장히 신학적이고 논리적인데, 또 굉장히 목회적이고 따뜻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숨어있는 보석 같은 묘한 성경입니다.

그러면 참 좋은 말씀인데, 왜 이 성경을 잘 안 보고 언급을 잘 안 할까요? 3가지 정도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조금 어려워서 잘 안 봅니다.
히브리서는 신학자들도 버거워할 정도로 살펴볼 내용이 많고 글의 수준이 높고 글의 구조도 잘 파악되지 않습니다. 들어가보면 작은 집은 구조가 간단하지만, 큰 궁궐 같은 곳은 구조가 복잡하고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또 히브리서는 바울서신보다 훨씬 뛰어난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신약 서신에 나오지 않는 생소한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헬라어가 한국에서 배운 영어 같다면, 히브리서 기자의 헬라어는 미국에서 배운 영어 같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당대의 수사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정교한 구조 속에 문장과 문단이 서로 맞물려 연결되어 있고, 보는 사람에 따라 구조가 달라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히브리서가 조금 어렵기 때문에 목회자도 일반 신자도 잘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신자라도 잘못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어서 잘 안 봅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우리는 그런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런 우리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집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은 히브리서 말씀은 불가피하게 우리 신앙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은 어쩐지 정통 신앙이 아닌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롭고 익숙한 말씀이 많은 상황에서 굳이 히브리서를 펼쳐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셋째는, 히브리서는 신약 신앙의 교과서 같은 말씀이기에 잘 안 봅니다.
히브리서는 당시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 말씀한 성경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유대인 신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옛 신앙으로 돌아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새로운 신앙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신약 신앙을 구약 신앙과 비교하며 변호하고 설명하는 교과서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히브리서를 당연히 우리 신약의 신자들은 더 많이 읽고 사랑해야 하겠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점 때문에, 히브리서가 인기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네, 아직 우리와 우리 교회들은 구약 말씀과 구약 신앙이 더 좋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앙은 성전과 각종 의식을 우리 눈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도 율법 규정으로 명확히 말합니다. 그래서 의외로 구약 신앙은 그 신앙을 지키고 살기에 편합니다. 때를 맞추어 제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율법 조항을 외적으로 지키기만 하면, 별다른 신앙적 고민과 갈등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신약 신앙은 보이는 성전이나 의식이 없고 세부적인 의무나 규범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숙하게 지키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 신앙은 구약 신앙에 비해 어쩌면 더 어렵고 힘듭니다.
그리고 구약의 복은 다 우리가 좋아하는 물질적인 복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위인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들을 왕과 선지자로 높이 세우십니다. 하지만 신약의 복은 다 영적인 구원의 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복을 누리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 하늘나라에 가야 그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신약의 위인들은 예수님을 잘 믿어도 오히려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한편 목회자나 교회도 신자들을 구약 신앙으로 지도하면 편하고 좋습니다. 권위도 세울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이끌기에도 좋고, 또 예수님처럼 낮아지거나 모범을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구약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이 좋고 쉬운 구원이 좋고 쉬운 말씀이 좋기 때문에, 히브리서를 어쩐지 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히브리서는 참 좋은 말씀입니다. 한편으론 어렵기도 하고 딱딱하기도 하고 우리 입에 쓰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몸에 귀한 양약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잘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네, 우리 안에 신약 신앙을 잘 정립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써 열어주신 우리의 새로운 구원과 신앙이 무엇인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제 간단히 히브리서가 어떤 성경 말씀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단 히브리서의 저자는 베일에 쌓여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어떤 분은 이 저자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맨 마지막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풀려났다는 말씀이 나오죠. 그래서 디모데를 언급하는 사람은 대개 사도 바울이니까, 저자를 사도 바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라고 하기엔, 히브리서의 문체나 글의 분위기가 상당히 다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3절 말씀 때문에, 저자를 사도 바울로 보기 어렵습니다. 2: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포함한 우리는 소위 2세대 신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1세대 사도와 신자에 해당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성경 말씀을 쓸 수 있는 인물이 신약성경 안에 누가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분은 누가로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바나바, 또 어떤 분은 아볼로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가능성은 있지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히브리서 저자의 문제는 우리가 모르는 문제로 역사의 어둠 속에 남겨두어야 합니다. 다만 그분은 아마도 1세대 사도들과 함께 사역했던 2세대 지도자 중 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 문제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의 수신자 문제입니다. 히브리서를 전달받은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구인지 알면, 우리가 히브리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2가지 가능성으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일 가능성, 다른 하나는 로마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자들일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말씀은 그 내용 안에 매우 유대적이면서 매우 헬라적인 도시 배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맨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결정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달리야에서 온 사람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이 그 사람들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죠? 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말을 일부러 편지 마지막에 한다는 것은, 수신자들이 그 사람들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덧붙이는 것이죠.
그런데 이달리야는 이탈리아를 가리키는데, 그러나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특별히 로마를 이달리야라고 언급하는 사례가 발견됩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추방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언급하면서, 이들이 이달리야에서 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우리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를 로마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자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사실이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이 유대인 신자들과 그들의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네, 로마에 있는 그 교회는 하나의 큰 교회가 아니라, 소규모 여러 가정 교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유대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는 그런 인정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공식적인 회당 같은 장소가 아니라, 그저 믿는 자중 누구의 집에서 조용히 모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집 거실 같은 곳에 모이면, 그 인원은 많아야 20~30명 정도 될 것입니다. 대략 우리 교회와 비슷한 규모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는 그런 가정 교회가 여러 군데 있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그리고 로마 전체로는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 말씀은 그런 로마에 있는 여러 가정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설교입니다. 히브리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초대교회의 설교이죠. 그래서 그때 이 말씀은 한 20~30명 정도 되는 신자들을 앞에 두고 낭독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때 로마에 있었던 신자라면, 그렇게 어느 집에서 소박하게 모여 이 말씀을 설교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것을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그분들이 소박하게 이 히브리서 말씀을 한편의 설교로 들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듣는 주일 설교와 그분들이 그때 들었던 히브리서 설교를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네,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 같은 설교를 한편의 설교로 듣지 못합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님도 별로 없고,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신자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분들은 가정집에서 모여 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매주 이런 설교를 듣지는 않았겠지만, 대체로 이런 깊이 있고 진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신자들은 이런 말씀을 듣고 나누며 신앙생활을 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 예배와 설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설교는 얼마나 성경적인가? 오늘날의 우리 신자들의 설교 듣기는 얼마나 성경적인가? ...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는 너무 편하고 쉬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설교가 일부러 어려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날의 설교는 대체로 쉽습니다. 쉽고 은혜가 되고 재미있기까지 하고... 무척 청중 지향적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서, 그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쉽고 편한 설교가 과연 우리를 자라게 하고 있을까요? 쉽고 은혜로운 설교가 과연 우리 신앙을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고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이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예배와 설교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듣기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신자들은 깊이 있는 설교를 듣고자 하고 또 설교자는 그런 설교를 하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진지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우리의 수준을 높게 잡고, 은혜가 조금 안 되더라도 딱딱한 말씀을 소화하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듣는, 우리 교회가 그런 말씀과 예배의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그때 이 히브리서 말씀을 들었던 그 귀한 공동체와 같이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순서로 말씀을 진행했습니다. 히브리서를 잘 안 보는 이유, 히브리서의 저자, 히브리서의 수신자, 그리고 히브리서 설교 듣기... 이제 마지막으로 히브리서가 언제 기록되었고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의 기록 시기는 대략 60년대로 추정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안에 있는 내용과 여러 역사적인 사실들을 종합한 결과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조금 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린도에 있던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로마를 떠나게 되는데, 그 유대인 추방령은 역사적인 기록이어서 그때가 대략 AD 52년경입니다. 그러면 왜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을까요?
그것은 유대교를 믿는 기존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다른 도시에서 했던 것처럼 기독교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소요 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바울이 여러 도시에서 선교할 때 그런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로마제국의 중심부인 로마에서 발생하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마침내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히브리서 안에서 로마의 유대인 신자들이 겪은 첫 번째 박해 사건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2절 말씀은 그 사건을 암시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네, 그리고 지금은 그때로부터 약 10년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추방되었던 유대인들도 하나둘 로마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에는 다시금 기독교인들에 대한 먹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황제가 그 유명한 네로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네로 황제는 AD 64년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 탓으로 돌리고, 그때부터 기독교를 크게 박해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신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처형되고, 베드로와 바울도 그 시기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있던 당시 많은 신자들은 이와 같은 다가오는 위험과 박해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면서,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로마제국이 승인한 합법적인 종교인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강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유대교를 믿으면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고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이와 같은 시기에 쓰인 성경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마도 네로의 박해가 일어날 시기 직전에 쓰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12장에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가 전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유대인 및 비유대인 신자들은 큰 어려움과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그와 같은 어려운 때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결코 신앙을 저버리거나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와 목적을 이해하고 이 말씀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읽으면, 이 말씀에 담긴 많은 간절한 마음과 의미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신앙의 어려움이라든지 위기라든지 불이익이라든지 박해라든지... 그런 것들이 없는 편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내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내가 믿기 싫어서 안 믿고, 내가 예수님이 필요 없어서 안 믿는 시대이지, 어려움이 있거나 고난이 있거나 두려워서 믿지 않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밤이 찾아오는 것처럼, 언젠가 우리 신앙에도 밤이 찾아오고 먹구름이 일어납니다. 시대적인 어려움이든, 개인적인 어려움이든... 우리 삶과 신앙에 어려움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그런 닥쳐올 어려움을 이기고 그런 다가오는 시대를 살아갈  신앙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비록 안전하고 평안해도, 이 히브리서 말씀을 읽으며 단단한 신앙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베짱이가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볼 수 있을 때 말씀을 보고, 예배드릴 수 있을 때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인생의 밤이 찾아오고 신앙의 먹구름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준비된 믿음의 사람으로 항상 설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반석과 같은 믿음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히브리서를 시작하는 우리 공동체에게 그와 같은 큰 믿음의 선물을 내려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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