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3가지 확신
요일 5:18~20
2023.06.25.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요한일서 설교가 잘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이면 요한일서 설교가 마무리됩니다. 요한일서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여러분은 무엇이 마음에 깊이 남으십니까?
우리 각자 여러 가지 다양한 말씀으로 은혜와 감동을 받을 수 있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동일한 일치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확신의 신앙입니다. 요한일서를 우리가 제대로 읽고 보았다면, 우리는 최소한 확신의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최소한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말씀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름부음을 말씀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런 하나하나의 내용들이 우리 믿음의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이와 같은 확신의 신앙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요한일서 설교를 시작할 때 큰 영적인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그냥 믿으면 안 되겠구나, 교회를 왔다갔다 하면 안 되겠구나... 예배 한번을 드려도 진정으로 드리고, 기도 한번을 드려도 진심으로 드리고, 알아도 확실히 알고, 믿어도 확실히 믿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구나...’ 그런 마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너무 많은 실족과 믿음의 파선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 일어날까요? 바로 우리 교회 안에서, 바로 우리 옆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번 발을 잘못 디뎠는데, 그것이 실족이 되어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한번 큰 세상 물결을 만났는데, 그것이 믿음의 파선이 되어 신앙생활을 중단합니다.
불행한 실족과 믿음의 파선을 막기 위해서는 확신의 신앙 외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이 베드로후서 말씀대로, 확신의 신앙을 늘 추구하시길 바랍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둘 사이에 서 있는 것은 사랑도 믿음도 신앙도 아닙니다. 확실히 알고 확실히 믿고 확실히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확신의 신앙을 말씀해온 사도 요한은 이제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3가지 큰 확신을 말씀합니다. 이 3가지 확신은 지금까지 말씀한 확신들과 함께 우리 신앙의 확신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마지막 3가지 확신을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앞서 우리는 3장에서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하나도 죄를 짓지 않고 전혀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조금 전 16절에서도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라 말씀했습니다. 1장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신자들도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가? 네, 이 말씀의 의미는 2가지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중생하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런 상태에서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죄를 지을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계속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참된 신자는 죄를 지어도 계속 죄를 짓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권고하시고 우리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왜 이렇게 우리는 죄를 짓는데 죄를 안 짓는 것처럼 모순되게 말씀할까요? 사도 요한은 논리적으로 잘 말하는 것보다,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3장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말씀했고, 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계속 말씀하는 것은 여기에 큰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은 결코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만,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책임을 지고 댓가도 치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단코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몸의 죄된 본성과 이 세상의 죄악된 현실 속에서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진리이자 신앙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하나님을 잘 믿다가도 큰 죄를 짓고 큰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이스마엘을 낳았고, 모세도 므리바 물가에서 하나님을 저버렸고, 다윗도 밧세바를 범했고,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함석헌 선생도 그분의 생애 속에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 연약한 죄인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럴 때 이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계속 죄를 지을 수 없다...’ 이 말씀이 죄에 빠진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사탄은 우리를 무섭게 정죄합니다. 세상은 비난과 조롱을 퍼붓습니다. 친구들도 다 떠나고 아무도 우리 곁에 없게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이 말씀과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악의 정죄와 비난에 무너지고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말씀과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여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진리를 로마서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이 말씀을 확신하시고, 요나처럼 어떤 고래 뱃속 어둡고 캄캄한 곳에 있다하더라도 사탄의 정죄와 죄의 지배를 물리치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의 지배를 물리치고 죄에서 해방된 확신을 가지게 되면, 우리 신앙과 삶은 많이 밝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중하고 귀한 진리와 신앙의 확신을 잘못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 진리와 신앙의 확신은 잘못 사용하기 쉽고, 그래서 잘못 사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의 주일예배나 금요기도회는 언제나 자신을 정죄하고 한 주간의 죄를 찾고 고백하기에 바쁩니다. 그런 분들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죄를 회개하고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눈물 흘리는.. 그렇게 어둡고 무거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오늘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이 너무나 생소하고 어색합니다. 이 요한일서 말씀과 로마서 말씀을 알기는 알지만, 어떻게 이 말씀을 자신의 신앙과 삶에 적용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정반대로 이 진리와 신앙의 확신을 너무 남용하고 이용합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삶을 살면서도 전혀 자신의 죄와 잘못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는 이미 다 끝난 문제처럼 생각합니다.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피를 찬양하지만, 자신의 십자가와 자신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복 받고 잘 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이 소중하고 귀한 진리와 신앙의 확신을 몰라서도 안 되고,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신앙의 확신은 어리석은 자의 것도 아니고, 영리한 자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늘 성실하고 올바른 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늘 바라보시되, 그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복된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잊지 마시되,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용기있게 아름답게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어둡고 매인 신앙이 아니라, 밝고 자유롭고 성숙한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 죄의 지배를 벗는 이 진리와 확신을 온전히 내려주시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시라는 확신입니다.
사도 요한은 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2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여기서 ‘그분께 속했다, 그분 안에 있다’는 이 말씀은 그분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확신을 요한일서 마지막에 새삼스레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 말씀을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또 말씀하시는 걸까?...’ 그래서 이와 같은 말씀의 반복이 마치 잔소리 같고 지면의 낭비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잔소리 같았던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거기에 부모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마지막에 다시 반복하는 것은, 이 고백과 확신이 참으로 중요하고, 이 고백이 우리 입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 신앙이 마침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경험적 고백이고 경험적 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알아서 하거나 설교를 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 삶과 생활 가운데 경험하고 체험하여 우리 입에서 흘러나오고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가 아니라 나의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저의 이 고백과 확신은 온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는, 이 고백과 확신을 사용합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죠?, 내 주님이시죠? ...”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과 확신이 우리 모두의 경험적 고백과 확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과 청년들도 이 신앙이 마침내 자기 신앙과 자기 믿음이 되어서, 도마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확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런 믿음의 고백과 확신의 공동체로 늘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늘 진리 가운데 성장시키신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20절에 나옵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지각을 주신다는 것은 알고 깨닫고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참된 자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분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셔서 참된 자를 알게 하시고 참된 자 안에 있게 하신다는 이 말씀은 다른 말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진리 가운데 살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 성장시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성장에 대한 확신입니다. 믿는 자는 반드시 자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지만, 반드시 우리를 씻기시고 변화시키시고 자라게 하셔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그대로 두고 방치하는 부모님은 없습니다. 먹을 것만 주고 잠만 재워주는 부모님도 없습니다. 언제나 가르치고 교육하고 마음과 생각이 잘 자라도록 애씁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반드시 진리 안에서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을 닮은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자라며,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선한 지혜와 지식과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구원의 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 받고 천국 가는 것만 아는 신자가 많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불신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는 교회 다니는 사람을 하나님만 아는 편협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 현실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고 과학 지식도 모르고 정치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만 섬기고 예수만 믿고 교회만 알고 전도만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거룩한 이방인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만 믿는 답답한 이방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실 많은 교회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우리 눈을 밝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최고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을수록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와 지식 가운데 더 성장하고 커지지 못하고 편협한 시각을 가진 옹졸한 신앙인이 되는 걸까요? 분명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다면, 목회자도 그렇고 신자들도 그렇고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지고 더 성장하고 더 지혜로워지고 더 폭넓고 더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세상의 평균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이 방향을 잃고 어두울 때, 하나님의 뜻으로 빛을 비추어 주는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초청하면 가서 밥 먹고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귀 기울일 수 있는 권면과 조언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치도 알고 역사도 알고 어려운 현실도 알고 하나님의 말씀도 아는 성숙한 진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안에는 나는 진리 안에서 성장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나는 자라고 성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큰 특권입니다.
좋은 선생님 밑에 지도를 받고, 좋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좋은 감독에게 운동을 배우는 것은 큰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고 진리 되신 그분을 알게 하시고 그분 안에 자라게 하시는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마치 왕자와 거지 이야기에서 그 거지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왕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이 과정을 넣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구원에 이 과정이 없고 그저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복 받고 천국가는 것만 있다면, 우리는 그저 싸구려 구원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변화되고 자라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종교적 멍에나 의무가 아닌, 우리의 특권이자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지신의 교회를 그렇게 아름다운 신부로 만드시고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잔치에 “내 모습 이대로 받으소서... 할렐루야...” 그렇게 찬송하면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최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최선의 준비된 모습으로 다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마무리하면서, 3가지 확신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확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확신, 우리는 진리 안에서 영광스럽게 성장한다는 확신...
아무쪼록, 이 귀한 확신이 여러분의 확신이 되셔서, 여러분의 삶과 신앙이 더 밝고 더 온전해지고 더 확신에 넘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