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앙의 증거와 확신
요일 5:6~13
2023.06.04.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두 번째 본론의 마지막 말씀이면서, 요한일서 전체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맨 처음 요한일서를 시작했던 서론 말씀과 연결됩니다.
요한일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요한일서는 이제 그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그분 안에 있는 생명과 그분을 믿는 사람 안에 있는 영생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생명, 그리고 영생의 확신... 이것이 요한일서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은 요한일서의 결론은 요한복음의 결론과 동일합니다.
요한복음 20:31 말씀은 이렇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너희로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지만, 요한일서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을 소유한 더 분명한 확신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일서 말씀을 제대로 보았다면, 첫째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둘째,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셋째, 그분을 믿는 우리 안에도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확신의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확신으로 잘못된 신앙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개인의 두려움과 절망을 극복하고, 우리 시대의 거짓과 불신앙을 극복하고, 언제나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은 자라고 성숙되고 마침내 확신이 됩니다. 이와 같은 믿음과 확신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요한일서의 결론을 먼저 확인한 후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확신의 신앙을 위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 네,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 신앙의 많은 증거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증거는 이 땅에 실재하셨던 예수님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과 피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오래전부터 교회는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해 왔습니다. 물은 예수님의 세례를 의미하고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로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 사건을 가리키면서, 그때 요한의 세례를 받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피로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을 가리키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귀하신 피를 흘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은 내용을 물과 피라는 특별한 표현으로 말씀하는 이유는 공동체를 나간 이단자들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들은 가현설을 주장하는 초기 영지주의자들인데, 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이 인간 예수의 몸에 임하고, 이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리스도의 영이 인간 예수의 몸에서 떠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인간 예수와 그리스도의 영을 구분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없고 인간 예수만 죽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우리 신앙과 믿음의 첫 번째 증거로 이 땅에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물로 임하신 예수님을 세례 의식으로 고백하고 보존하고 있고, 피로 임하신 예수님을 성찬 의식으로 고백하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물과 피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상징하고, 이차적으로 교회의 세례 의식과 성찬 의식과 나아가 예배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물과 피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증언이 되고, 그 의식과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도 믿지 않는 악한 시대입니다. 내가 원하면 사실이고, 내가 원하지 않으면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은 매우 악하고 어두운 종말의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믿는 참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 실재하셨던 그분의 삶과 죽음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실재하셨던 그분의 삶과 죽음... 이것이 우리 믿음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성령님입니다.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님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하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마가복음 서문에 특별히 성령의 역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한의 세례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때에 성령님은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활동에서, 성령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도 성령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고, 로마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장 잘 말해주실 분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물과 피는 하나입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증거이자 증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신 성령님은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진리이신 성령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 증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 네,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성령님의 증언을 세상은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의 선하신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는 의심이 사라지고 믿음의 증거들이 풍성해집니다.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잘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오래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을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성경 말씀에 성령을 사모하라는 직접적인 말씀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은사를 사모하고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있죠.
성령님에 대한 성경 말씀의 가르침은 성령을 거스르지 말고 거역하지 말고 소멸하지 말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감화를 받고 인도하심을 받고 그분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사모하는 것을 좋아하실까요?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은사와 능력을 목적으로 성령을 사모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이자 오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분을 사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잘 받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쪼록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통해, 풍성한 증거를 늘 얻는 확신의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사도 요한은 여기서 이 내용을 아주 잠깐 지나가면서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증거를 더 중요하게 말씀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신뢰할만한 증언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 나다나엘, 사마리아 여인, 백부장, 사도들과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 그런 증인 중 한 명인 사도 요한은 그분을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모두 그 증언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변화산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는 후에 이 내용을 베드로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우리 신앙의 중요한 증거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음성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그 음성으로 예수님을 자기 아들로 증거하셨다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계속 이어집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대개 우리가 이 말씀을 전도용으로 많이 사용해서, 이 말씀을 그저 전도에 있어 구원의 확신을 주는 의미로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전도용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지금부터 생명의 삶을 증거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영생은 지금부터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소유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생명의 삶을 주십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과 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새 힘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타고난 자기 생명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꺾인 가지처럼 점점 말라지고 허무해지고 마침내 죽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죽음 직전에 그분을 보면 너무 약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리 뛰어나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사람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그렇게 초라하고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또 영생의 소망과 믿음 가운데 마지막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큰 증거인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큰 증거를 가진 성도님들이 되시길 빕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우리 안에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 신앙의 증거들이 다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증거, 성령님이 주시는 증거, 믿음의 선진들이 주는 증거,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 그래서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자기 증거입니다. 이것은 10절 말씀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아무리 놀랍고,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아무리 깊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삶이 아무리 크고 귀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은 모두 우리 바깥에서 우리에게 오는 증거들입니다. 우리 바깥에서 온다는 것은 아직 우리 안에서 내 것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느 순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실제적이고 역사적이고 영적인 모든 증거들은 우리 안에서 내적인 자기 증거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자기 주체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내적인 자기 확신을 갖도록 늘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은 어느 날 이해할 수 없는 두렵고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100세에 얻은 자기 생명 같은 아들, 그것도 하나님이 친히 주신 아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지시한 땅, 지시한 산에서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산 아래에 도착해서는 종들을 머물러두고 이삭과 함께 이삭에게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고,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의 결말을 다 알지만, 그러나 한 가지 큰 의문이 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앙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네, 물론 저는 그분들이 좋은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되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이거나 맹목적인 믿음밖에 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 신앙은 매우 슬픈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결코 슬픈 신앙도 아니고 맹목적인 신앙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여기서 히브리서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네 아들 이삭을 통해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 네 아들 이삭을 통해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생각한 것입니다. 사흘 길을 걸어가면서, 또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약속을 끝까지 믿고 붙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크고 위대해서 그렇게 그 약속을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오히려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어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부르실 때부터 지금까지, 가나안 땅의 그 모든 사건과 시간 동안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고 거짓말 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고 그렇게 실패할 때가 많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또 놀랍게 100세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러 번 직접 만나고 음성을 들으면서, 그분이 얼마나 신실하고 거룩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바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충돌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 안에 내적인 증거를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윗도 마지막에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마지막에 아도니야의 반역에 맞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나님께서 나의 평생에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건지셨다는 자기 내적인 믿음의 증거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믿음의 경험과 완성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입술로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귀한 은총과 경험이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 성도님들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많은 증거들을 통해, 모두 다 믿음의 사람이 되시고 확신의 신앙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