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후예, 예수의 후예
요일 3:11~16
2023.04.23.
오늘 본문부터 요한일서 본론 2부가 시작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3:11부터 2부가 시작된다고 보는 이유는 첫째 ‘소식’이란 특별한 단어가 나온다는 점, 둘째 말씀의 주제가 ‘빛’에서 ‘사랑’으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본론 2부로 들어가기 전에, 1부 내용을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론 1부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본론 1부에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내용들과 함께 요한일서를 기록한 직접적인 목적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목적은 이것이었죠. 공동체를 나간 사람들... 그들의 잘못된 모습과 가르침을 밝히고, 공동체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격려와 확신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요한일서 본론 1부를 마무리한 사도 요한은 이제 본론 2부를 시작하면서, 말씀의 주제를 바꾸고 말씀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말씀의 주제는 이제 ‘사랑’이 되고, 말씀의 방향은 이제 ‘공동체에 남아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방향의 전환을 우리는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2장까지 예수님은 외부의 사건과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지만, 요한복음 13장부터 예수님은 철저히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고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도 이와 같은 요한복음의 구조를 따라가고 있다...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요한일서는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오직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말씀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가인의 후예’와 ‘예수의 후예’입니다.
사랑이라는 관점과 시각... 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영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가인의 후예가 있고 예수의 후예가 있다’, ‘인류는 영적인 관점에서 가인의 후예가 있고 예수의 후예가 있다’... 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의미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내용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사도 요한은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아주 고대의 인물인 가인을 갑자기 소환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본래 발음으로 카인이죠. 카인이란 이름은 본래 좋은 의미입니다. ‘얻었다’라는 의미로, 아담과 하와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고백을 하며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 요한은 사랑의 정반대 모델로 왜 가인을 예로 들까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인 한 대표적인 인물로 가인을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인 최초의 인물로 가인을 말하는 걸까요?
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인 최초의 인물로 가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대표 인물이 아니라 최초 인물을 말할까요? 네, 그것은 그 최초의 인물을 통해 그 후예들이 나왔고, 지금도 그 후예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두려운 사실이죠.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인 가인의 후예들이 지금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소나기’라는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쓴 황순원 작가라는 분이 있습니다. ‘소나기’는 한줄기 소나기처럼 너무나 짧게 끝나버린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황순원 작가가 ‘카인의 후예’라는 장편소설도 썼습니다.
‘카인의 후예’는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일어난 지주와 소작농 등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증오와 비극을 이야기한 소설입니다. 결론적으로 그 소설은 그런 격변과 소용돌이의 시대에 어떤 사람은 카인이 되고, 카인의 후예가 되었다는 무거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황순원 작가는 2,000년에 돌아가셨는데, 황순원 작가가 어떤 분이길래 그런 제목과 그런 소설을 쓰셨을까 하고 알아보니,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작품에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의미가 많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의 제목은 단순한 작가의 생각이 아니라, 창세기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을 잘 이해한 작가의 성경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카인의 후예’... 창세기는 그 내용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댓가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아담을 떠나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창세기는 그런 그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며 자손을 낳는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카인은 에녹을 낳고,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 그렇게 그의 후손이 땅에 퍼져가는 내용을 자세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이어서 하나님이 그런 가인과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신 내용을 말씀합니다. 셋은 에노스를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아담의 후손이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으로 갈라져, 땅에 퍼지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번성하던 가인의 후손들은 결국 노아 홍수 심판 때 다 멸망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 함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인의 후손들이 나오고, 그들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바벨탑을 쌓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이전, 창세기 1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창세기 말씀과 영적인 역사를 지금 여기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여기서 단순히 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의미와 역사와 배경 속에 가인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가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악한 자에게 속하여... 누구를 가리킬까요?
네, 사탄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미움과 살인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역사가 인류의 시초부터 일어났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가인과 가인의 후예는 사탄에 속해 있다는 영적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이것은 지금 아주 높은 영적인 관점에서 인류와 인류의 역사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 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이유라면 이것이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는 악한데, 아벨은 의로웠습니다.
미움에는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이유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냥 싫고 그냥 거슬리고 그냥 죽이고 싶고... 이유는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먼저 미워하고 이유는 나중에 만들기도 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준 미움은 그런 무서운 영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죠. 그렇다면 그 이유가 해소되거나 사라지면, 미워하지 않아야 하죠. 그것은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카인에게 준 미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이유 이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합니다. 그렇게 미움의 물결이 우리 마음에 흘러넘치고 미움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 네, 그것이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민감한 선교의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일상 가까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는 이와 같은 사탄의 역사에 오염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미워하고 비난하고 싸우고 빼앗고 공격하고 살인하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가인의 후예입니다. 모욕하고 욕하는 모든 사람도 가인의 후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요한은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렇게 가인과 가인의 후예를 말씀한 사도 요한은 16절에서 가인과 완전히 다른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예수님은 미움과 살인이라는 사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미움과 경쟁과 공격과 살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새로운 삶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마음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의지이고 능력이고 실천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와 같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네,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다르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후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와 같은 새로운 공동체와 새로운 영적인 인류를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혐오하고 싸우고 경쟁하고 빼앗는 세상 속에 그런 사탄의 방식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구원과 십자가의 새 생명으로 새로운 사랑의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을 이 땅에 심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길과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을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천국 간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는 우리의 구원은 예수 믿어서 바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과 삶을 지금 여기서 살아서 마침내 저 천국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사랑장이라고 잘 알고 있는 고전 13장 말씀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 후에 고전 13장 말씀을 시작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길과 삶의 방식 안에는 모든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들어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이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읽으며, 이와 같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우리가 혼자 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서로 배우고 나누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의의와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죠. 전도와 선교도 중요하고 사역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먼저 여기서 그 삶을 배우고 살아서, 세상에 나가서도 그렇게 사랑으로 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예수의 영적인 후손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어떻게 나의 자리에서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이 삶의 방식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뺏고 빼앗기고 죽고 죽이는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가인의 후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예수의 후손이 되기 위해 다음 몇 가지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미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거짓도 그렇고 미움도 그렇고... 이것은 단순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마귀의 본질에 속한 영적인 큰 잘못된 일입니다. 미움은 살인을 내포하고 있는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4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마귀에 대해 2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벗고 성령 안에서 살게 되면, 반드시 거짓과 미움을 버리게 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가 생길 때가 있죠. 그러면 딱 그만큼만 미워하시길 바랍니다. 누군가를 비판할 이유가 생길 때도 있죠. 딱 그만큼만 비판하시길 바랍니다. 그 이상은 죄가 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을 비판하시고 성전당국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비판은 정당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이유 이상으로 미워하거나, 비판하거나, 증오하거나, 혐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지, 인간의 권리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분명히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거나 모욕하거나 없어져야 한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누군가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맞서고 저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저항해야 할 때는 저항하거나 맞서시되,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비폭력으로 맞서시고, 보복하거나 복수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했다고 고백할 때에는, 언제나 너그러운 용서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 그가 잘못했다고 고백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시거나 하나님이 특별한 마음을 주시면, 하나님께 맡기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용서를 실천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미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움을 극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는 더 기도가 필요하고 고민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미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둘째, 세상의 방식인 경쟁을 극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경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도 경쟁이고 돈 버는 것도 경쟁이고 장사도 경쟁이고 시험도 경쟁이고 ... 경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나 사람들과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 속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많은 신자들이 주일날에는 은혜를 받고 사랑을 말하지만, 월요일이 시작되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아무개 학생도 학교에 가면 경쟁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며 학교생활을 합니다. 예수 잘 믿는 아무개 집사님도 이웃 가게를 늘 의식하고 경쟁하면서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합니다. 부흥한다고 하는 아무개 큰 교회도 이웃 교회와 경쟁하는 모습으로 전도를 하고 교회 홍보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무개 친구의 잘 된 모습에 웬지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생생한 모습으로 이런 삶을 계속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후손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와 경쟁시키려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쟁취하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와 같은 믿음과 정신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경쟁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시험을 치고 똑같이 사업을 하고 똑같이 회사를 다녀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공존하고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이상과 염원을 조금씩 현실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것... 너도 잘 되고 나도 잘 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축하해주는 것... 그런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어떤 분은 이런 마음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닌가... 네, 맞습니다. 이상적인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그런 것이죠.
아시는 바와 같이, 이상적인 공산주의는 기독교로부터 나왔습니다. 마르크스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역사적으로 보면 공산주의는 당시 교회의 부패와 어두움 속에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둡고 책임과 의무를 잊어버릴 때, 비극은 일어납니다.
아울러 현실의 공산주의는 인간의 죄악과 잘못된 방법론으로 그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결국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모두가 잘 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고 차별이 없고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저도 신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늘 경쟁하는 마음을 버리고자 했습니다. 시험을 위해 공부하지 않고 공부를 위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기고 높아져서 크고 좋은 교회로 가야겠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숨막히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로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더 기도하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미워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조금 손해를 보고, 조금 양보를 하고, 조금 더 수고하고, 그러면서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높이지 않고, 다른 이에게 박수를 쳐주고, 모두를 위하며 살아가는 삶... 이런 것이 예수의 후손다운 사랑의 삶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 성도님들은 그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