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3가지 의미
롬 1:3~6, 벧전 1:3~4
2023.04.09.
사도들 중에서도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베드로와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사도로서 여러 교회를 돌아보며 사역하고 편지를 보냈는데, 우리가 방금 읽은 베드로전서와 로마서는 그 두 분의 대표적인 신약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부활주일을 맞아 이 두 서신을 살펴보면, 베드로와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동일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대표하는 분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편지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빠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회와 신앙에 얼마나 필수적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부활 사실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그것이 내일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이렇게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부활을 어제의 사건으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의미와 내일의 의미로 확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담긴 오늘의 의미를 말씀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사도 베드로는 부활에 담긴 내일의 의미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과거적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고, 내일의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과 성취가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총체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총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에 오늘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에 담긴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일어난,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믿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일관되게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빈무덤을 발견하고 놀란 여인들을 보여주고 끝납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가지 내용을 더 기록하지만, 역시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환타지가 되고 맙니다.
개미는 전기도 모르고 자기장도 모릅니다. 개미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부활을 모릅니다. 인간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시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사실로 말씀하고, 많은 부활의 증인들도 그것을 사실로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경을 통해 많은 부활의 사실적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주님으로 자발적으로 고백하게 된 것도 부활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도망간 제자들이 돌변한 것도 설명할 수 없고, 유대교와 전혀 다른 교회의 시작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부활의 증인들과 사도들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어떻게 보존하려고 했을까요?
그때는 사진도 없고 영상도 없고 ... 부활의 증인들만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복음서나 다른 신약 성경도 없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공식적인 신앙고백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교독한 고전 15:3~5절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 안에 확립되었던 신앙고백을 고린도교회에 전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4개의 문장이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게바에게 보이셨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당시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어서 몇 가지 자신의 말을 덧붙입니다.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여기서 사도 바울이 추가로 덧붙이는 말씀도 무척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들면 직접 가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는 2,000년 전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성경의 기록과 증인들의 증언과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자료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증거도 없습니다. 파피루스에 기록한 신약 성경 원본은 바스라지고 사라지고, 오늘날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된 성경이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의 물리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은 사람은 이제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말씀하는 성경 말씀 위에 하나님께서 믿는 마음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귀하신 은총이 언제나 여러분 위에 있으셔서,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가...
둘째,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능력입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고...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으심을 받은 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능력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전 예수님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 이후 예수님은 형상도 조금 달라지시고, 그 본연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런 능력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고,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 이 내용은 사도행전에 잘 나타납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성령님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시죠. 그래서 거기 있던 제자들은 성령님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충만히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들은 겁쟁이였고 도망자들이었고 지도자를 잃은 아무것도 아닌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온 세상에 나와 예수의 부활과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이 땅에 계시지 않았지만, 그 충격과 환희의 부활 체험과 능력은 그들을 더 이상 과거의 어부와 세리로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의 능력이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도행전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가 그때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보시오... 부활은 능력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도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그때의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능력을 힘입길 원하는 사람은, 그 능력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를 극복하고 마귀의 권세를 벗어나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과제가 있다면, 그 능력을 알고 그 능력을 의지하고 그 능력을 되살리는 일입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지금 나의 내면과 가정과 일과 환경에서 그 능력을 따라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 안에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울할 수 없고 좌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낙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고, 내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인격적인 능력이시기에, 오직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두운 마음과 포기와 절망이 순간순간 찾아옵니다. 저도 고비마다 그런 마음에 휩싸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그 능력으로 붙들어주셨습니다. 약하고 부정적인 제 마음이 믿음과 담대한 마음으로 급격하게 바뀐 역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시편22:21절 야니타니의 역사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과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도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붙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단순히 무엇을 보거나 체험하거나 넘어지거나 하는 것은 진정한 능력이 아닙니다. 말과 입으로 무엇을 장담하는 것도 능력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우리 기독교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여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거룩한 새 삶을 살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게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주시는 것이 주님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와 같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가...
셋째, 그것은 내일의 우리의 소망과 성취입니다.
이 내용은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이자 첫 신호탄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의 대규모 부활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찾으시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날에 우리도 부활한다는 점에서, 부활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고,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우리 믿음 안에는 그와 같은 소망과 기다림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를 단지 나의 소원성취의 종교로 믿고, 예수님을 단지 나의 위로자로 수호신으로 믿고, 자기를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 안에 있고 교회 안에 있어도,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말씀을 알고도, 그분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주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고, 우리 몸의 부활도 믿지 않고, 우리가 장차 다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설 것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분의 말씀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분들이 교회 안에 있고 겉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의 변질과 혼란이 있는 이 때에,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우리의 부활을 믿고, 무엇보다 다시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샤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시골길, 앙상한 나무 아래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며 실없는 대화와 부질없는 행위를 반복합니다. 이따금 포조와 그의 짐꾼 럭키가 등장하여 또 시간을 떼웁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지쳐갈 때 한 양치기 소년이 등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고도 씨는 오늘 밤에는 못 오고 내일 꼭 오시겠다고 전하랬어요...
그런 작품을 읽으면, 우리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도 그렇게 하염없는 기다림이 될까 두렵습니다. 믿는 자들은 주님을 2,000년 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실체가 없고 모호한 샤무엘 베케트의 고도와는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시기 위해, 우리보다 더 불타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인격과 약속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 세상과 우주에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의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현실에 충실하며, 그러나 내일을 바라보며... 그렇게 우리는 두 개의 시간 속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날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은 일어난 사실이고 오늘의 능력이고 내일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로 이어지는 진행형의 사건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그날에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을 주시고 주님을 만나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