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
계 22:20
2023.03.31
오늘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21절이 남아 있지만 21절은 마무리 인사이기 때문에, 내용상 마지막 말씀은 이 20절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대개 살면서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고 의미있게 생각하는 일이 몇 가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예전 20대 초반에 2박3일 지리산 종주 등반을 한 적이 있는데 항상 그것을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 노고단까지 가고 거기서 화엄사로 내려왔죠. 그때만 해도 정보가 별로 없어서 그건 큰 모험이었습니다. 텐트며 배낭이며 다 메고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무릎 연골이 상해서 화엄사로 내려올 때 절뚝거리며 겨우 내려왔습니다.
제일 좋았던 것은 깊은 산속 혼자 걷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무아지경 같은 영적인 느낌이었죠. 제 생각에 스님들이 훌륭하게 되는 것은 도를 닦아서가 아니라 산에 살아서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그 경험을 늘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마찬가지로 목사로서 감사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마태복음이나 요한일서나 요한계시록 같은 하나님 말씀 전체를 여러분과 나누는 일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교회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여건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들을 준비가 필요하고 목사도 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누가 알아주지는 않지만 여러분과 저의 자랑거리라 생각됩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이 저희 같은 작은 교회에 주시는 은혜라 생각합니다. 이런 감사와 기쁜 마음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고, 또 거기에 대한 요한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요한계시록 결론 부분(계22:6~21)에 모두 3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약속은 요한계시록 결론부의 뼈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뼈대를 중심으로 요한계시록 결론이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과 약속에 대해 요한 역시 마지막 말과 신앙고백을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에게 최후의 신앙고백이 있다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바라고, 또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왕권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고백입니다.
아울러 이것은 단순한 고백에 그치지 않고, 주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내가 주님을 꼭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약속과 약속으로 그 장엄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 약속은 요한만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우리의 약속입니다. 만약 누군가 여기까지 요한계시록을 읽어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책을 덮기 전에 이 약속을 자신의 약속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요한계시록 읽기가 완성된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최종지점은 여기이고,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모두 이 약속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하늘과 땅의 비밀스런 내용도 많고 종말의 놀라운 내용도 많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기까지 오는 과정일 뿐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666, 아마겟돈, 짐승과 바벨론, 천년왕국, 최후의 심판 ...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그런 정보나 지식들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약속입니다. 주님의 약속과 우리의 약속이죠. 이 두 약속이 만남으로 요한계시록은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이 고백과 약속을 함께 하기 위해, 여기에 담긴 구체적인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 고백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믿음의 삶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이 고백은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어쩌면 너무도 단순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아직 그 구원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교회... 너무 이상하죠?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신자들... 정말 이상하죠?
그러나 역사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런 교회와 신자들이 많습니다.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되고 잘 사는 것이 신앙의 주목적이 되어, 주님이 오시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큰 관심사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미 다 구원을 받았다는 잘못된 가르침도 한몫을 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 많은 신앙은 나를 위해 무엇을 믿는 땅의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물질, 축복, 번영, 비전, 성공 등 이런 주제가 강단을 차지한 반면에, 그분을 기다리는 신실함, 올바름, 정의, 인내, 소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예수님의 말씀과 뜻에 관심이 없고 그분의 재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픈 현상은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요한계시록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을 기다리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우물가의 여인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입니다.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3~25)
이 여인은 자신의 삶과 일상 속에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여인의 특별한 점입니다. “내가 그리 편한 삶이 아닙니다. 살기도 바쁘고... 내가 지금 이 시각에 물 길으러 온 것 보면 모르시겠어요?” 그 여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은 일반적이지 않고 오늘도 사람들을 피해 물길으러 오지만, 늘 마음 한편엔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이 그 여인을 만나주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과 땅과 현실이 전부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하나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신자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대화를 해보면 땅의 현실만 있고 하늘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은 참된 현실이 아니고 죄악에 물들어 있기에, 진리에 목마르고 정의에 목마르고 사랑에 목마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기다림을 비난합니다. 속히 온다고 했는데 속히 왔느냐고... 그러나 성경이 여기서 말하는 ‘속히’는 시간의 임박성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헬라어는 타퀴이고 이 말에서 타키온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것은 행동의 신속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의미는 언제가 되었든 갑자기 최종적으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라”(3:3, 16:15)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기다립니다. 우리 시대 안에서 또 우리 시대를 넘어서... 그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에 대해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기다림이 곧 신앙이라는 것을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해도 만약 그분이 안 오시면 어떻게 하나요?” 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담은 영화도 있었죠. ‘잉글리쉬 페이션트’라고... 20년 전에 나온 영화인데, 전체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남자 주인공 알마시는 부상당한 여자 주인공 캐서린을 사막의 한 동굴에 두고 떠납니다. 꼭 다시 오겠노라는 약속을 남기고 말이죠. 캐서린은 알마시를 기다리지만 알마시는 빨리 오지 못합니다. 전시 상황 속에 한 사람을 위해 비행기를 내 줄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캐서린은 캄캄한 동굴에서 글을 쓰는데, 마지막 랜턴 빛도 꺼지고 맙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캐서린을 닮은 것 같습니다. 이제나저제나 어둔 세상 속에서 주님을 기다리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기만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알마시가 마침내 오죠. 물론 그 영화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동굴로 들어가는 알마시의 눈에 고요히 누워있는 캐서린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쩌면 우리는 그런 캐서린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장면의 알마시를 지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알마시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불타는 마음으로 사막을 건너갔다 다시 돌아왔습니다. 영화는 그가 시간 안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사람도 그렇게 한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더 그러실 분이시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저는 주님이 우리들을 위해 꼭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분이십니다. 오실 마음과 능력이 없으셨다면 애초에 그런 약속도 안 하셨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시간에 오시지 않는다해도, 주님의 시간에 도둑처럼 오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변함없이 주님을 기다리는 참된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