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요일 2:18~27
2023.03.26.
오늘 본문에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직접적인 목적이 나타납니다. 이 직접적인 목적은 공동체에서 나간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계속 암시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상의 말씀들은 우리 모든 신자가 들어야 할 보편적인 하나님 말씀이면서, 동시에 당시 그 이단자들을 말하는 암시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제 직접적으로 그 이단자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사도 요한은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먼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은 세상 역사가 마지막 시기에 진입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령 강림도, 성령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주하시는 것도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그런 종말론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적그리스도의 등장입니다.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많다고 말씀합니다. 이로 보건대, 이 적그리스도는 어떤 한 인물이나 한 집단이나 한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거짓 표적과 기사와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그와 같은 모든 인물과 집단과 국가가 다 적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를 들면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국가적으로 행하며 믿는 자들을 박해한 로마제국이나 네로 같은 황제를 적그리스도의 한 전형으로 봅니다. 그래서 앞으로 최후의 종말에 그런 인물이나 집단이나 국가가 적그리스도로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적그리스도를 다르게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나간 그들을 그와 같은 적그리스도의 일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여기서 그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 자체를 부인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을 부인함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문제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만을 믿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인성만을 믿든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만 믿고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예수는 거룩한 신이기 때문에 예수의 몸과 육체는 환상이며 그의 십자가 죽음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신은 결코 인간이 될 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을 영지주의적 도케티즘, 즉 영지주의적 가현설파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인성만 믿고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예수는 동정녀 탄생도 없고, 예수는 단지 성령이 임한 인간 메시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그들을 에비온파라고 부릅니다.
사도 요한 당시 교회 안팎으로 이와 같은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또 다른 이단들은 또 다른 이단들대로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도 있고 니골라당도 있고 선지자 이세벨을 따르는 무리도 있고...
아무튼 예수님의 신성 및 인성과 관련해서는 영지주의 가현설파와 에비온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이 사람들이 이 둘 중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면으로 볼 때 예수님의 신성만 믿는 영지주의 가현설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가현이라는 말은 가짜 현실, 즉 환상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몸과 육체를 부인하고,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부인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사건도 부인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부인이 그들의 신앙을 어떤 잘못된 신앙으로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의 몸과 육체와 삶과 사역을 부인하니, 그런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의 몸과 육체와 삶과 사역도 자연히 부인하게 됩니다. 신자들이 자기 몸과 육체로 어떤 생활을 하든, 신자들의 삶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본받든 본받지 않든, 교회와 신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가짜이고 환상이니...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 대속의 피도 중요하지 않으면, 우리에겐 무엇이 중요하고 우리는 무엇으로 구원을 얻을까요? ... 그래서 그들은 ‘그노시스’라고 하는 영적인 지식을 내세우며,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비밀스런 영적인 지식은 오직 자신들만 소유하고 있고, 오직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그 이단은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잘못된 이해가 그리스철학과 같은 잘못된 세상 지식을 만나고, 그 결과 잘못된 신학과 신앙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결국 신자들의 잘못된 삶과 잘못된 구원을 만들었던 그런 위험한 이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위험한 사람들이 마치 가라지처럼 사도 요한 공동체 안에서 생겼고,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행히, 요한일서가 쓰여질 무렵에 그들이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아마 많은 논쟁과 영적인 싸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사이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사도 요한은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네, 우리가 작은 문제로 분열하고 갈라서면 안 되지만, 잘못된 예수와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구원을 말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이렇게 19절까지 말씀한 사도 요한은 이제 20절부터 자신의 공동체 신자들을 향해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합니다. 신자들의 믿음이 그 이단자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도록 특별히 2가지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거룩하신 자의 기름부음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바로 사도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죠.
오늘은 이 2가지 말씀 가운데 첫 번째 말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이 기름부음을 여러 차례 말씀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자에게서 받은 기름부음,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 그의 기름부음... 우리는 사도 요한이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하며 은혜와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그런데 이 기름부음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우선 ‘너희는 모든 것을 안다’는 말씀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20절 말씀은 27절 말씀과 함께 읽을 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아무도 나를 가르칠 필요가 없구나...’ 기름부음만 받으면 성경공부도 필요 없고 신학도 필요 없고 교회의 가르침도 필요없다... 이 말씀은 당연히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헬라어 원문을 볼 때 잘 확인됩니다. 20절 말씀의 초기 사본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 모두는 알고 있다.” 네, “너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가 아니라 “너희 모두는 알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초기 사본이란 약 4세기까지 나온 소수의 중요한 사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초기 사본 말씀은 여기서,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목적어가 없는 어색한 문장이기 때문에, 후대 사본으로 가면서 “너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고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 사본의 양으로 따지면 이렇게 되어 있는 후대 사본이 훨씬 많죠. 그래서 지금 우리말 번역이 후대 사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을 확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본의 양보다는 사본의 질을 우선시해야 하기 때문에, 초기 사본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오이다테 판타 / 너희는 모든 것을 안다”가 아니라, “오이다테 판테스 / 너희 모두는 알고 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27절 말씀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역시 이 말씀도 성경 원문을 보면 쉽게 해결됩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가 아니라, “누군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도”라고 번역한 이 헬라어 티스는 사실 ‘누군가’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nobody가 아니라 someone 또는 anyone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영어 성경들도 이 부분을 anyone 즉 누군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한글 성경의 번역 문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우리 공동체를 떠난 그들 중 누군가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도 원문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에 대해 너희를 가르치며” 네,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가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너희를 가르치며’입니다. 영어성경들도 다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모든 것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이 기름부음의 능력이나 결과를 지나치게 생각하거나 오해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혹 누가 이 말씀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면,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잘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시 20절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너희 모두는 알고 있느니라” 그러면 여기서 너희 모두는 알고 있다고 말씀하는데, 무엇을 알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네, 나중에 천국에서 사도 요한에게 직접 여쭤봐야 하겠지만, 19절을 가리킬 수도 있고, 21절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모두는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여서 나간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도 되고, 너희 모두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계속 이런 이중적인 방식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가장 궁금한 말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리스마’라는 말입니다. 이 ‘크리스마’는 우리가 잘 아는 ‘카리스마’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카리스마’는 은사라는 말이고, ‘크리스마’는 기름부음입니다. 영어로는 anointing입니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라는 기름부음은 신약성경을 통틀어 여기 20절과 27절... 단 2곳에서만 나옵니다. 그러면 이 단어가 요한일서에서만 2번 정도 나오고, 다른 신약성경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네, 이 기름부음을 요한일서만 알고 있고 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성경은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기름부음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성령님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기름부음이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에서 충분히 자세히 말씀했습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자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영이시고, 그분은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또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의 말씀과 진리로 늘 가르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기름부음의 정체가 무엇이고 누구시냐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 요한이 이 기름부음을 말씀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네, 받는다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나 원어는 ‘에케테’라고 하는 ‘소유한다’는 동사입니다. 너희가 기름부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는 거룩하신 자로부터 기름부음을 소유하고”입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을 ‘소유한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기 때문에, 쉽게 번역해서 ‘받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소유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네, 이것은 바로 그들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서 나간 그들은 영지주의 가현설파들이었죠. 그래서 그들은 ‘그노시스’라고 하는 영적인 지식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요한 교회 공동체 안의 얼마나 많은 사람을 미혹했는지 모릅니다. 그 영적인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흔들렸습니다. 여러분, JMS 정명석 교주가 창세기 3장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말씀을 전혀 말이 되지 않는 해석으로 해석해도, 수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시 비밀스런 그노시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영지주의는 훨씬 영적이고 위험한 이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여기서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이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도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지식과 비교할 수 없는,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 기름부음.... 사도요한의 이 말씀은 구약적 배경을 가진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누군가를 왕이나 선지자로 세울 때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죠. 기름은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고 어깨와 몸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은 기름부으심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특별한 사람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신약에서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기름부으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으신 행위가 아니라, 그 능력과 결과를 소유하는 것이죠. 행위를 소유할 수는 없죠. 우리는 그분의 기름부으심의 능력과 결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름부으심은 능력과 결과만이 아니라, 동시에 성령님 그 자체입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에게 능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 기름부으심 자체로 우리에게 임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을 통해 너희는 그런 인격적인 기름부으심을 소유하고 있으니, 공동체를 떠난 이단자들에게 미혹되거나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떤 은혜와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첫째는, 이 기름부으심을 단순히 성령의 능력이나 결과로 오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교회 안에 성령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역을 했던 분들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성령의 은사나 능력이라는 의미로 광범위하고 무분별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믿는 자들에게 그런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분들의 그런 주장은 오늘 성경 말씀을 볼 때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기름부음을 유일하게 말씀하는 오늘 말씀은 기름부음을 그런 의미로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기름부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으로, 또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능력과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건전한 성령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건전한 성령론이란 우리가 성령의 은사나 능력이나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자체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나 능력을 내가 얼마나 받았느냐 행하느냐’ 그런 것을 중요시하기보다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고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이런 내용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사나 능력이 나타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자라고 변화되고 열매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건전한 성령론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우리도 이 기름부음을 확신하고 이단이나 혹은 세상에 미혹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기름부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름부음을 소유하고 있고 또 기름부음은 너희 안에 거하고 있다...’ 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아시고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혹 누가 와서 여기 특별한 영적인 지식이 있고, 특별한 말씀이 있고,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말해도 미혹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특별한 영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특별한 말씀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특별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오직 성경 말씀이 있고, 주님이 피로 세우신 교회가 있고,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와 같은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온전히 소유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가르치는 대로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말씀은 바로 27절 말씀입니다. 27절 말씀은 3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첫째,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 둘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내용은 이제 우리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겐 한 가지 교훈이 남았습니다.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기름부음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그 기름부음의 참되고 거짓이 없는 가르침을 따라, 계속해서 주님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기름부음만 소유하면 다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기름부음은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물건처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오라’한다고 오시는 분도 아니고, ‘가라’한다고 가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고백하고 순종하는 신자들에게 알아서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고 죄 가운데 살면, 에스겔이 본 환상처럼 알아서 떠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그분의 기름부으심을 따라가는, 노력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새 마음이 임했고 그는 선지자들 중에 예언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점점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떠나셨습니다. 사울 왕의 최후는 안타까운 최후가 되었습니다.
양을 치던 다윗도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곧바로 왕이 되지 못하고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 기름부음은 하나님께 신실했던 다윗과 늘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은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물론 다윗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실히 회개하였기 때문에, 그 기름부음은 그를 결코 떠나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고, 또 그것을 늘 간직한 다윗과 같은 생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언제나 여러분과 저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