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2)
요일 2:15~17
2023.03.19.
지난 주일 우리는 요한일서 네 번째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 사랑이 우리의 헌신이라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한 번의 설교로 충분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한 번 더 동일한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할 3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5절, 16절, 17절... 이 각각의 말씀이 그 3가지 이유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내용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 네, 세상과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고 서로 대립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세상이 아니라, 사탄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물질주의 인간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런 세상을 특별히 가리켜, 음녀 바벨론이라고 말씀합니다.
음녀 바벨론은 붉은빛 짐승을 타고 있는데 그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합니다. 음녀 바벨론 자신도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또 특별히 금잔을 가졌는데 그 안에는 온갖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사탄은 짐승을 내세우고 짐승은 음녀 바벨론을 태우고 온 세상을 바벨론 세상으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세상의 본모습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단순히 타락하고 부도덕하고 경건하지 않은 단순한 죄악의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 돈과 자본과 물질주의 문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서 온갖 죄악과 타락과 불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 그리고 우리 삶과 신앙마저도 결국은 대부분 돈을 따라가고 자본을 따라가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치도 나를 잘 살게 해주는 정치를 선택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는 경제적인 요소가 큰 부분을 차지한 지 오래입니다. 교육도 돈을 벌고 잘 살려고 교육을 받지, 진리를 향한 순수한 배움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개인 삶도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크고, 돈 많은 사람은 좋은 대우를 받습니다. 종교나 신앙도 결국은 복 받고 잘 살려고 하는 목적이 큽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지금 이 세상은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사랑해선 안 됩니다. 이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돈과 맘몬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의외로 돈과 물질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위협하는 우상은 바로 돈과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재물을 가장 조심하고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돈과 재물을 조심한다는 것은 돈에 깨끗한 생활을 하고 돈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또 기본적으로 정직한 소득을 벌고 알맞은 지출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돈에 있어서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물질에 있어서 깨끗하고 정직한 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잘 듣는 것만큼이나, 우리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상을 모르고 세상을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않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지 않다는 의미도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있지 않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의미이건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15절 말씀은 하나님과 물질주의적인 세상이 완전히 반대 본질이고 대립 관계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는 이와 같은 철저한 대립이 불가피하게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4~16) 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 일이나 사람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아선 안 되지만,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불가피한 이분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의 실체를 알아서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두 번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16절 말씀은 세상의 본질을 우리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앞서 첫 번째 말씀이 세상을 전체적으로 말씀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세상을 우리 개인의 욕망과 탐욕과 잘못된 갈망으로 말씀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간단히 다시 말씀드리면, 한마디로 이 세상은 결국 우리의 욕망과 욕심과 잘못된 갈망이 모여 만들어진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 속에 한 때 세상을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고 또 많은 의미를 가지고 볼 때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멋지고 찬란한 세상... 인스타그램 같은 곳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리는 멋진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벌고 일을 하고 사람과 만나면서 실제로 점점 알게 되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 개개인의 물질적이고 죄악된 욕망들이 모여, 불행하게도 그런 물질적이고 죄악된 전체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본 모습이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상을 모르고 그런 세상을 사랑하고 또 동화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욕망의 세상을 살아가는 거룩한 이방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돌아보고 다스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육신의 정욕은 없는가, 안목의 정욕은 없는가, 이생의 자랑에 빠져있지는 않은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2~13)
이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처럼 되고 싶지만, 우리가 우리 몸의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고 허탄한 자랑을 내려놓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마음과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계속 말씀합니다. “...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6:14)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정욕과 잘못된 욕망을 주님의 은혜로 십자가에 못 박고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세상의 욕망의 시민이 아니라, 거룩한 이방인으로,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사람들의 부고 소식을 듣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입니다.
우리의 치열한 욕망과 의지도 영원하지 않고 시들어갑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과 땅, 유니버스라고 하는 우주 전체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비단 종교나 철학만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도 이를테면 그것을 열역학 제2법칙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것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세상은 몰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종말과 몰락과 상실을 동서고금 모든 사람은 다 깊이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우리 가곡 ‘내 마음의 강물’이라는 노래를 자주 들었습니다. 전에는 가곡을 잘 듣지 않았는데,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가곡을 듣고 있습니다. 고향의 노래, 보리밭 등... 그래서 이 ‘내 마음의 강물’이라는 곡도 여러모로 마음에 와닿아 듣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진원지로 유명한 중국 우한에 가면 황학루라는 유서 깊은 누각이 있습니다. 황학은 전설적인 누런 빛깔의 학을 말하죠. 황학루는 중국 3대 누각의 하나라고 합니다. 거기엔 오래전 중국 당나라 시인 최호가 쓴 ‘황학루에 올라’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인은 그 누각에 올라 양자강 천리길을 바라보며 거기엔 얽힌 전설과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선 이백도 거기서 시를 지으려했는데, 이 시를 보고 감탄하여 자신의 붓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옛사람 이미 황학 타고 가 버려 / 지금 이곳 빈 황학루만 남았네
한번 간 황학 돌아올 줄 모르고 / 흰 구름만 천년 두고 유유히 흐르네
물 맑은 장강 건너 나무들 모습 또렷하고 / 강 가운데 앵무주 봄 풀이 무성하네
해는 지는데 고향은 어디쯤인가 / 강 위에 저녁 안개 시름에 젖게 하네”
이렇게 이 세상이나 우리 인생이나 다 흘러가고 소멸되고 사라진다는 쓸쓸한 마음은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인생을 살아본 동서고금 모든 사람은 이런 결론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런 결론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그러므로 우리는 이 흘러가는 세상과 인생을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집착하거나 뜻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17절 말씀에서 중요한 말씀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느끼는 인생의 종말과 무상함...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누구도 말할 수 없는 특별한 말씀을 이어서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요한은 놀랍게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의 영원함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함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이 지극히 작고 유한한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도 그 영원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영생으로 잘 알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자 영원한 생명이신데, 우리가 그분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그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영원성을 가지게 됩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능력일까요? 어떤 실체일까요? 어떤 인격일까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영생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영생은 창세기에 2번, 시편에 1번, 다니엘서에 3번... 구약엔 그렇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이 시작되면서 영생이라는 말씀은 봇물 터지듯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에 대한 말씀을 너무나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약 전체로 영생이라는 말은 모두 50번 정도 등장하게 되는데, 그 모든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는 영생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특히 신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나온 말씀의 하나인 요한일서는 영생이 무엇인지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1~13)
네, 요한일서는 영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어떤 능력이나 어떤 실체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영생은 예수님과 따로 존재하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그것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에서 인격적이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관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영생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입니다.
우리는 불로초와 같은 신비한 약을 먹거나, 늙지 않는 마법의 샘물을 먹어서 영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내게 있는가?, 나는 예수님 안에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명제가 성립이 될 때 영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유한한 인간이지만, 흘러가는 인생을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나가는 시간이나 세상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영원함을 품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구원의 새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렇게 영원한 존재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오늘 하나님 말씀으로 믿음의 소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인생의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쓸쓸한 날이 와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은 아름다운 소망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호흡을 지켜주시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늘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성실히 살고 최선으로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빠지거나 길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물질과 부, 자랑과 욕심, 욕망과 갈망... 이런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아름다운 것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이방인으로, 하늘나라 시민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예수님을, 언제나 바라보고 사랑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