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요일 2:1~11
2023.02.26.
지난번 우리는 1:5~2:2까지 한 문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문단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6개의 ‘만일’이라는 말씀을 말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이시고 화목제물이라는 선언으로 마쳤습니다. 그래서 2:1~2 말씀은 이 문단의 마지막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2:1~2 말씀은 앞 문단의 마지막 말씀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새로 시작하는 뒷 문단의 첫 번째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2:1~2 말씀은 두 문단에 동시에 속하면서, 두 문단을 연결하는 연결고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2:1~2 말씀을 앞 문단의 마지막 말씀으로 보았지만, 오늘은 이 말씀을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말씀으로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 본문이 하나님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한 것처럼,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우리의 대언자이시고 또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을 한 후에 이제 새로운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그의 계명’이라는 말을 새롭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러면 이 계명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계명일까요? 네,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였는데,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 본문과 오늘 본문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사도 요한은 앞 본문과 아무 연결성 없이 오늘 본문을 새롭게 말씀하는 걸까요? 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앞 본문과 같은 의미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 본문이 소극적인 의미였다면, 오늘 본문은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사귄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보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사귄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보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한편으로는 죄를 짓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요한은 초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변경하면서, 그 주제를 죄에서 계명으로 변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2:6까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참으로 그분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도 요한은 지금 너무도 당연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씀을 해서 재미없고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은 당연한 말씀을 해야만 했던 당시 상황을 여러모로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직접적으로는 공동체 가운데 그런 잘못된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과 정체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들의 잘못된 신앙과 정체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면, 이 사람들은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만을 추구하고 그러면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올바른 신앙적 삶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올바른 신앙적 삶을 무의미하게 여기고 부인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네, 이와 같은 잘못된 신앙은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지금 현재 그런 이단자들이 있죠.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회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구xx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모략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신xx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본다고 하지만, 올바른 신앙적 삶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앞에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정통 교회들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도 그분의 빛 가운데 행하지 못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많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보다 세상 나라를 더 좋아하고, 교단을 차지하고 교회를 차지하고, 서로 미워하고 경쟁하고, 세습하고 정치하고, 자정 작용을 잃어버리고...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이 사도 요한의 당연한 말씀을 지루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깊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 말씀의 중요성을 성경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신약성경 중에 가장 마지막에 나온 성경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의 저작을 시간 순서로 생각해본다면, 제일 먼저 바울서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이 나오고, 마태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나오고, 그 후 히브리서와 일반서신이 나오고, 맨 마지막에 소위 요한 문서 즉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와 요한계시록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요한일서의 말씀은 바울서신이 말했던 것과 복음서들이 말했던 것을 다 지나오고 거쳐온 말씀이라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요한일서는 신약 신앙에 대해 권면하는 최종적인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서신이 말한 믿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구원, 성령의 은사와 능력... 이런 것들을 다 지나고... 복음서가 말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 이런 것들을 다 지나고... 사도행전이 말한 복음의 전파와 교회의 성장... 이런 것들도 다 지나고... 그래서 이런 모든 말씀과 신학을 다 경험하고 거쳐서 만들어진 우리 신앙이 이제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화목 제물이시니... 우리는 이제 죄를 짓지 말고 빛 가운데 살며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과 동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아무리 멋지고 능력 있고 열정이 넘치고 많은 일을 하고... 그런 것도 물론 좋지만... 그러나 신앙이 완성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사랑 가운데 거하고 그분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멋지고 능력 있고 훌륭해도, 죄를 계속 짓고 계명을 지키지 않고 사랑이 없고 영혼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신앙입니다. 이렇게 요한일서는 우리 신앙의 최종적인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참된 신앙을 알아보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 좋다고 따라가고... 능력 있다고 따라가고... 방언이나 예언한다고 따라가고... 카리스마 있다고 따라가고... 교회 크다고 따라가고...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대부분의 이단 교주나 잘못된 지도자들은 말씀이 좋고 화려하고 카리스마가 있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까이에서 그 사람의 실제 삶을 보면 얼마나 지배적이고 인간적이고 탐욕적인지 모릅니다. 종말론을 강조하는 그 어떤 이단 교주도 자기 생활을 종말론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 신자들의 피와 땀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합니다.
능력 있다고 혹은 방언이나 예언한다고 누구 따라가서도 안 됩니다.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그분이 정말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과 소통한다면... 그 능력과 기도와 은사는 먼저 자기 자신을 선하고 깨끗하게 바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교회와 참된 지도자와 참된 신앙은 무엇인지... 이 기준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ccm 찬양으로 부른 찬양은 본 회퍼 목사의 옥중 시로 만든 곡입니다. 그는 히틀러에 맞선 독일 교회의 양심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총통으로 취임하고 자신을 신격화하고 나라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갈 때, 히틀러를 정면에서 비판하였습니다. 27세의 젊은 신학교 교수였던 그는 히틀러의 총통 취임 이틀 뒤, 라디오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의 라디오 강연은 즉각 중단되었고, 이후 그는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고, 얼마 뒤 신학교 교수직도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후 본 회퍼는 독일 교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고 찬양하고 우경화될 때, 거기에 반대하는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1939년, 그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초청을 받고 미국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를 아낀 라인홀드 니버 같은 신학자들이 그에게 유니온 신학교 연구교수직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독일이라고 말하고 독일로 건너가, 반 히틀러 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체포되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서류가 발견되고 마침내 36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중에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전쟁이 임박한 시기에 미국에서 교수직을 제의받은 것은 그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전보다는 고통받는 자신의 나라와 교회와 신자들을 생각했고 그래서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 회퍼 목사와 같은 분의 마음에는 오늘 본문 6절 말씀이 늘 담겨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6절까지 이 내용을 말씀한 사도 요한은 이제 7절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의 계명 가운데에서 특별히 새 계명과 옛 계명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보통 7~11절을 읽으실 때, 뭔가 이 말씀이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뭔가 확실하게 잡히지 않고 뱅글뱅글 도는 느낌이라고 할까... 앞에서 느껴던 바로 그 느낌... 6번의 ‘만일’ 말씀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이 여기서 새 계명과 옛 계명을 말씀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그것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 이유는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요한복음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분명히 잘 나오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것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계명과 옛 계명은 무엇일까요? 네, 새 계명과 옛 계명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동일한 계명입니다. 바로 ‘네 형제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3:1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한복음 13:34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5:12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새 계명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레위기 19장에 이미 있는 옛 계명이기도 합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7~18) 예수님은 그 옛 계명을 새롭게 의미 부여하여 새 계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지금은 예수님의 그 새 계명도 옛 계명이 되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교회와 신자들이 그 예수님의 계명을 잊어버리고 실천하지 않아, 그것은 지나간 옛 계명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8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지금 이 시점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예수님의 그 계명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본래 우리가 알기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이라고 우리가 알 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특별하게도 그와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형제 사랑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만 말씀하는 것은 그럴만한 어려운 사정이 교회 안팎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유대인 회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출교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유대 사회에 고립된 섬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 교회는 내부적으로 이단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무너지고 말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을 특별히 말씀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동일한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 이 세상 가운데 외로운 섬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교회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곳이었고 사랑과 존경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앙은 불신을 당하고 진리는 외면을 당하고 하나님은 부인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물론 우리 교회들이 자초한 면도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내부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희미해지고 있고 믿음은 좁아지고 있고 무엇보다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조직 자체가 되면서, 따뜻한 믿음의 보금자리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신자들도 다 자기 삶에 바쁘고,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귀하게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이 어려운 마지막 시기에 교회는 버틸 수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교회가 살아나고, 전도를 하면 교회가 살아나고, 능력을 받으면 교회가 살아나고... 네, 그렇지만... 그러나 교회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살아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신자들이 ‘나 혼자 예수 믿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 교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마다 그런 개인주의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이 만들어지는 배경엔 이 시대의 영향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개인화된 사회... 남이 어떻든 나만 잘 되면 돼... 그런 생각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도 교회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신앙은 ‘나만 잘 믿어서 천국 가는’ 개인적인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구원도 공동체적입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이고,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인류가 개인을 자각하고 개인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처럼, 이제는 공동체를 자각하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의 교회는 마치 어둔 밤 캄캄한 골짜기에 불 밝힌 작은 오두막 같습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세상 속에 작은 보금자리 같은 곳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숨을 쉬고 힘을 얻고 사랑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은 이렇게 교회가 본질적으로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인 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귀담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향한 복음의 공동체가 되려면, 먼저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고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 나를 조금씩 내려놓고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곳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만들어가는 교회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는 그런 좋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서로를 향한 사랑과 은혜를 더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