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에 하나 되는 신앙
요일 1:1~4
2023.02.05.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보고 듣고 체험한 사도 요한은 마침내 그분을 우리의 손으로 만졌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의 이 고백은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보았다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전의 예수님과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신성이 뚜렷해지시고, 생명의 말씀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만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내가 그분을 한번 만져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에 천지 창조를 그리면서, 그것을 하나님과 아담의 손가락이 서로 접촉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창조를 그렇게 심오하게 표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여기서 우리가 그분을 만졌다는 심오한 표현을 합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나 요한계시록이나 성경 안에서도 매우 심오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생명의 말씀과 진리 자체이신 그분을 확실히 알게 되고, 전인적인 접촉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실제 경험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최종적인 신앙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혹은 산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길 끝에는 뭐가 있을까?, 이 산을 다 오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그런 질문과 호기심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그 신앙은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까?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그 완성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어떻게 믿어도 천국에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는 그것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없죠. 우리는 신앙의 좋은 과정을 거쳐야 신앙의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성장과 완성에 큰 관심을 가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나 훌륭한 전도자나 존경하는 신앙 위인이 있으면, 그분을 따릅니다. 그런 분을 따르면, 우리 신앙도 그분을 닮고 그분처럼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그런 유명한 목사님들이 많았습니다. 한경직, 조용기, 김준곤, 옥한흠... 한편 이단은 그런 현상이 더 심하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교주를 신앙의 특별한 모델로 따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런 모델 정도가 아니라, 신앙의 완성과 완성된 신앙 자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졌다고 말씀하고, 그것을 우리 신앙의 최종 완성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가 그분과 하나가 되고, 마침내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완성이 이와 같은 모습임을 성경의 인물을 통해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베드로와 사도바울... 이분들은 신구약을 대표하는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낯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좋은 순종의 사람이었고 좋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땅에 정착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었고, 그분을 잘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한 창세기 말씀의 호의적인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고,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살아가기 위해 자기 부인 사라를 자기 누이로 속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바로에게 자기 부인 사라를 빼앗기게 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가 자칫 위험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아브라함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분을 더욱더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후 그가 자기 조카 롯과 결별하고, 가나안 땅에 남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후 많은 일과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납니다. 다 말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많은 과정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고, 그의 신앙은 듣고 보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자세히 보고 주목하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아직 결정적인 문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녀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시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무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 바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오랜 단절과 하나님 부재의 시간이 있게 됩니다. 그 시간이 얼마였을까요? 약 13년 정도입니다. 13년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 말씀도 아무 역사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99세에 다시 나타나시어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완전히 믿는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완성은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부인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제는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는 놀라운 사건이죠. 아브라함은 그 사건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안에 온전히 실현하는 신앙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시작과 성장과 완성을 우리는 모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운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자기 민족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그의 나이 40세에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던 때였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날 그는 양떼를 이끌고 광야 서쪽으로 이동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나타나시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못 간다고 했고 안 간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애굽을 잊고 자기 민족을 잊고 자기 몰락을 잊고 여기서 40년을 살았죠.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설득하시고 여러 이적과 약속을 보여주셨습니다. 급기야 진노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받고, 겨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렇게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모세는 출애굽을 하면서,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신실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놀랍게 만나면서 완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그런 변화를 민수기 12: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경이 온유하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의 단순한 인간적인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을 통해 그의 내면에 완고한 자기 자신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그의 내면에 하나님의 성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하나되고 일치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도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이렇게 하나님은 모세를 비방하는 미리암과 아론에게, 모세가 나와 하나 되고 매우 특별한 관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유언과도 같은 노래를 남깁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 같이 진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완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눈동자같이 지켜주시는 분이 없으므로, 너희는 절대로 그분을 떠나지 말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행복한 민족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다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자세히 말씀하는 인물은 다윗입니다. 다윗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잘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다윗은 그의 생애 동안 심각한 죄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는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의 최전선에 보내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분리되었습니다. 비록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는 받았지만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고, 그 죄의 결과에 계속 시달리고 고통 받아야 했습니다.
노년의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을까요?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과 그의 마지막 업적과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을 보면,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말씀은 다윗이 밧세바 사건 전에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다윗의 승전가를 마치 그의 마지막 모습처럼 삼하 22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이렇게 사무엘하 말씀은 비록 다윗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서 굴곡이 많고 험난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의로운 모습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과 좀처럼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과 대답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제자들과 서로 자리다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게 되면서 점점 더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말고의 귀를 자르고 도망가고, 대제사장의 뜰에서 또 도망가고, 골고다 언덕에 따라가지 못하고...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마지막이 십자가로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년과 마지막 모습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것과 달리, 사도바울의 말년과 마지막 모습은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나옵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를 통해 사도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초라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주님께 감사하고 복음의 미래를 확신하며 자신의 면류관을 확신하며 자신을 버린 자들을 용서하며... 그렇게 주님의 은혜 안에 아름답고 평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유 인격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고 보게 되고 그분께로 나아가,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 안에 거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어떻게 보면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 언어로 말하면 신과의 합일이죠. 이것이 신앙의 완성이자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신앙이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내 용서가 되고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내 마음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내 나라가 되고 있는가? 예수님의 복음은 내 복음이 되고 있는가? 예수님은 내 주님이 되고 있는가? 나는 점점 주님의 품에 안기고 있는가? ...’
그런데 혹 어떤 분들은 이 내용이 어렵다고 생각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은 아브라함이니까 모세니까 다윗이니까 베드로와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니까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성장과 완성은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가능합니다.
여기에 대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매우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사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생명의 말씀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혹시 어려울지 몰라도, 그분과 사귀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사귀고 함께 놀고 ... 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귐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영적인 경험입니다.
요한복음 역시 이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기도를 말씀합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어 하나가 되고 생명의 말씀과 하나가 되면... 우리 신앙과 삶이 일치하고 매우 자연스러운 신앙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잘 된 모습은 바로 자연스러움이죠.
우리의 예수 믿는 모습과 삶은 그분과 하나된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기도도 자연스럽고 찬양도 자연스럽고 사랑도 자연스럽고 가정예배도 자연스럽고 전도도 자연스럽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부족하지만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내 신앙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일부러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표시내지 않아도 예수 믿는 사람 표시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목사 같은 모습이 보이면 아직 실패입니다.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어디 큰 교회 장로님이나 권사님 같은 모습이 보여도 아직 실패입니다. 신자들도 교회 교인 같은 티가 나면 아직 실패입니다.
그런 모습들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고,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자기를 낮추는 사랑과 겸손과 영적인 생명이 있는... 나의 죽음의 자리에 마지막 기도를 그분에게 맡기고 싶은...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신앙의 완성을 향해 점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분과 사귀어 살면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그런 모습이 되시고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올해의 표어를 정했습니다. 보고 듣고 전하는 교회... 이 표어는 우리가 확신의 신앙이 되고 완성된 신앙이 되어, 그런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이웃과 세상으로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내용입니다. 억지로 열심을 내어 전도하자... 그런 의미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마침내 만졌다고 말씀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귄다고 말씀하고, 그리하여 그런 놀라운 사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초청에 다 응하셔서, 생명의 말씀과 하나가 되고 자연스러운 신앙이 되고 기쁨이 충만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