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신앙 보는 신앙
요일 1:1
2023.01.15.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요한일서 1:1~4 말씀, 요한일서 서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첫째 주일에는 ‘확신의 신앙으로’라는 제목으로, 지금 우리가 신앙의 위기에 있다는 사실과 그에 따라 우리에게 확신의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둘째 주일에는 ‘성육신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요한일서는 확신의 신앙을 우리에게 말씀하는데, 그 확신의 신앙은 성육신의 신앙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1:1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신의 신앙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 그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수 조용필 씨가 많은 노래를 부르셨는데,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노래 중 어떤 곡을 가장 아끼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바람의 노래’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이 노래는 여러 가수들이 많이 부르고 합창이나 공연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김순곤이란 분이 썼는데, 이 노래가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는 데에는 조금 특별한 점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이 노래가 사랑이나 이별을 말하는 대부분의 노래와 달리, 인생을 말하는 노래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라고 이 노래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삶의 방법과 철학과 교훈을 말하는 이 노래를 의외로 많은 분들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특별한 점은 이 노래의 제목이 ‘바람의 노래’인데, 그러나 첫 소절에 ‘바람의 노래’라는 말이 한번 나온 후 그다음에는 일체 이 말이 나오지 않고, 따로 설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면 ‘바람의 노래’가 무엇이냐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깁니다.
아마도 작사를 하신 분이 일부러 그렇게 그 내용을 듣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 생각엔, 이 노래가 말하는 바람의 노래란 ‘인생은 실패와 고뇌 속에 살아가지만, 그 해답은 사랑에 있다’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람은 과학적으로 말하면 기압에 따른 공기의 흐름이지만, 우리 사람들은 ‘바람이 우리에게 들려줄 노래를 하고 말을 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중국의 장자라는 분도 그런 생각을 오래 전에 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제물론 첫 번째 편을 보면, 바람이 땅에 불어 산이며 숲이며 나무며 땅의 온갖 것이 소리를 내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선생은 자기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아느냐? 너는 사람의 소리는 들어도 땅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땅의 소리는 들어도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구나...’ 그런데 그 선생님은 하늘의 소리가 결국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고 그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래서 장자를 연구하는 많은 분들은 그 이야기의 하늘의 소리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어떤 분은 그것을 만물과 만인의 각자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 각각의 소리와 각자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는 것이죠. 또 어떤 분은 그것을 근본인 도라고 말합니다. 노장사상의 근본이 도이기 때문이죠.
또 어떤 분은 그것을 근본인 도라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장자는 ‘그와 같은 비인격적인 도에 머물지 않고, 인격적인 신을 향한 일말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장자는 제물론 다른 곳에서 이런 묘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한낱 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꿈을 꿀 때는 꿈인줄 모르는 법... 그러나 만세 후 이 같은 인생의 뜻을 아는 성인이 오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시단모우지야’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그 긴 시간은 아침저녁 하루 해에 불과한 짧은 시간처럼 여겨지리라’라고 해석되기도 하고, 혹은 ‘그 시간은 아침저녁 하루 해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을 어떤 분은 이렇게 멋지게 번역했습니다. “혹 뉘 알리? 지금 저 길 모퉁이에서 그분과 만날지도...”
네, 저는 장자가 바라본 그 성인, 즉 꿈 같은 우리 인생의 뜻을 말씀해주실 분은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장자의 이와 같은 바람은 실현되었을까요? 네, 장자의 시대 약 200년 후에 예수님이 오시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무엇을 노래하는지... 보이지 않는 바람이 땅에 불어 무엇을 말하는지... 또 저 깊은 하늘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무엇을 말하는지... 사람들이 그렇게 듣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은 결국 생명의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를 살려주고 살게 하고 채워주는 말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사람이라면 그것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놀랍게도 그와 같은 생명의 말씀에 대해 말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렇죠. 생명의 말씀이라면, 그것은 태초부터 있는 근본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너무 쉽게 그것을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또 눈으로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참과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사람이 과연 만져본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그렇게 듣고 보고 싶었던 그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라면,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은 참과 진리에 대한 인류의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놀라운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1:1 말씀의 놀라운 점은, 이 말씀이 단순히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이다라는 것을 넘어, 그 생명의 말씀을 알아가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과정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생명의 말씀에 다가갈 수 있다는 복된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진리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 그 길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은 신앙의 시작을 말하고 신앙의 성장을 말하고 신앙의 완성을 말합니다. 신앙의 시작은 무엇입니까? 네, 듣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은 무엇입니까? 네, 눈으로 보고 또 자세히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신앙의 완성은 무엇입니까? 네, 그분을 우리의 손으로 만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우리의 신앙의 시작과 과정과 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이 내용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라다닌 모든 실제 체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와 같은 실제 사실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가 예수님을 만나 신앙에 눈을 뜨고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완성된 그 모든 믿음의 성장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요한은 한낱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던 자신이 생명의 말씀이신 그분을 만나, 사도이자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비단 사도 요한만이 아니라, 그의 교회 공동체 대다수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함께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신앙은 시작됩니다. 밥을 먹지 않고 사람이 건강할 수 없듯이, 말씀을 듣지 않는데 사람에게 신앙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잘 듣는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은 정말 귀한 축복입니다.
영주에 가면, 영주동산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아마도 영주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인 것 같은데, 제가 초등학생 어릴 적에 영주 이모님 집에 놀러 가면 주일날 그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교회에 부산 소정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부흥집회를 했습니다. 오전에도 하고 오후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 한 3일 정도 집회를 했는데, 제가 거기에 매번 맨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설교를 참 잘하셨습니다. 양에 대해 설교하면서 양 울음소리 흉내도 잘 내시고... 그래서 제가 재미있게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저를 기특하게 보셨는지, 마지막 시간 설교 중에 저를 단상으로 불러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말씀을 참 잘 듣는다고... 이런 학생이 되라고...
그리고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저의 교회에 조금 늦은 나이에 신학공부를 하시는 전도사님이 중고등부 전도사님이셨는데 그분 설교를 또 제가 잘 들었습니다. 그때 어린 제 생각에도, 그 전도사님은 매주 설교를 잘 준비해오시고 열심히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를 하시면서 손수건으로 땀을 막 딱으시는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아무튼 제가 그 전도사님 설교를 열심히 들으며 신앙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저는 매일 책가방에 영어 성경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이제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를 하게 되면, 매번 성경말씀을 20~30분 정도 먼저 읽곤 했습니다. 그때도 기억이 나는데, 그 시간은 마치 제가 말씀을 먹는 것 같고, 또 말씀은 제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그때 저의 신앙이 많이 자랐던 것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뉴스와 정보와 영상과 책과 지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핸드폰이 항상 우리 곁에 있죠.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도 그렇고 중장년들도 그렇고... 지금 사람들은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하거나 말씀을 나누거나... 이런 시간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 결과 지금은 신자들의 신앙이 자라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시작은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듣지 않으면 성령님도 어떻게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 80~90%는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비록 설교를 잘 하는 목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성경적인 설교를 하려고 하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잘하나 못하나 그런 거 보지 마시고, 다만 설교를 잘 들으시고 말씀을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믿음의 큰 유익이 될 줄 믿습니다.
이번 주 금요기도회의 요한계시록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7가지 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7가지 복이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잘 살펴보시면 그 3가지는 미래의 복이고 4가지는 현재의 복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의 복 4가지를 잘 받으면, 그것은 미래의 3가지 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의 복 4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재의 복 4개는 또 서로 2개씩 비슷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복 4개는 결국 2개로 요약됩니다. 그래서 그 2개가 4개로 확대되고, 그 4개가 7개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복이죠. 그렇다면 그 가장 기본이 되는 2개의 복이 무엇일까요? 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말씀과 옷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말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말씀의 복입니다. 우리는 그 복을 받아야, 이 어려운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말씀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우리는 그분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그 신앙은 단지 잘 듣는 신앙으로 그치지 않고, 한 단계 신앙적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은 이제 보는 신앙으로 올라섭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이것은 뭔가 영적이고 신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마치 한 사람이 어떤 일을 오래 하면 능력과 경험이 쌓이고 일을 잘하게 되고,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공부든, 회사 업무든, 자기 사업이든, 운동이든, 예술이든 ... 한 분야를 오래 하면 사람은 뭔가를 볼 수 있고 보이기 시작하죠.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면, 그런 신앙생활이 우리의 신앙을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특히 말씀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앎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죠. 신앙적인 경험도 하고 체험도 하고, 그러면 또 그 경험과 체험으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뭔가를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 그것을 땅에 던지라 ...”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드온 역시 미디안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양털에만 이슬이 임하고, 다음날에는 양털에만 이슬이 임하지 않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드온은 그것을 보고 미디안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도 ‘보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적 체험도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인위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보고 싶다고 보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그런 참된 체험과 확신을 하시게 될 줄 믿습니다.
한편, 이와 같은 보는 신앙의 단계에서 조금 주의할 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보는 신앙이 되었다고 해서 듣는 신앙을 졸업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부 신앙인들이 종종 그런 오해를 하고 실수를 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그런 오해와 실수를 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은사로 방언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만 그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방언이 하늘의 소리이고 천사의 말이라고 믿고, 그래서 그들은 이제 완전히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그래서 이제는 사도 바울의 지도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어떤 실수나 죄를 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잘못된 교인들을 위해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의 그 각각의 내용들은 바로 그런 그들의 잘못된 오해와 믿음을 바로 잡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고린도교회의 그와 같은 잘못이 자주 재현되죠. 성령의 신비적 은사를 받고 기도나 방언이나 예언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본인이 이제 신앙의 단계가 높아졌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는 신앙이 되어도 듣는 신앙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그 순서가 굳게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어쩌면 한 덩어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듣고 보게 되지만, 또한 동시에 그분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이 서론의 말씀에서도 이 순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라고 말씀하지만, 3절에서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한다” 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요5:38~39)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요3:31~3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듣는 것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러나 듣는 것과 보는 것은 하나의 신앙이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의할 것은, 보는 신앙이 되었을 때 자신의 보는 것과 체험과 간증을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적 체험은 다양하고, 시대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 알맞게, 그 시대에 맞게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적 체험이나 영적 체험은 늘 말씀 안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고, 또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거나 절대시하거나 일반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체험’이라고 하면, 사도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만큼 영적 체험을 많이 한 분이 없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씀의 사람이었지, 체험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의 거짓 선생들을 반박하기 위해, 비로소 자신의 14년 전의 체험을 말한 사람입니다. 아마 그 일이 아니라면, 자신의 그 체험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적으로 많은 체험과 경험과 간증을 하되,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성장과 발전을 말씀하는 1:1 말씀의 반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신앙은 듣는 신앙이 되고 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확신의 신앙이 되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올해 여러분들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확신의 신앙이 되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셔서, 여러분과 저의 신앙을 그분을 듣고 보는 확신의 신앙으로 이끌어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 2부 모임 토의 질문 >
1) ‘바람의 노래’를 듣고, 각자의 소감을 나누어 주시기 바
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요즘의 자신의 생활을 나누어 주
시고, 또 감명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경험을 나
누어 주세요.
3)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서 확신을 가졌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주시고, 보는 신앙의 주의점도 나누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