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세상 끝에 드려진 제사

믿음찬교회 0 139 01.23 13:27
세상 끝에 드려진 제사
히 9:23~28
2024.01.21.

저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목사가 되어서도 항상 성경이 궁금했습니다. 신학교를 가면 성경을 가르쳐 주긴 하는데, 성경보다는 주로 신학이나 목회에 대한 내용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도 학년이 높아지면 성경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데, 저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신학이나 신학자를 잘 알기보다는 성경을 잘 알고 싶었습니다.
특히 성경 중에서도 복음서, 로마서, 요한계시록, 창세기, 이사야서... 이런 말씀들이 궁금했습니다. 히브리서도 그런 성경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그 말씀들을 최근의 주석을 참고하여 여러분과 나누면서, 무엇보다 제 개인적으로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대충 지나가지 않고, ‘한 구절 한 구절 한 문단 한 문단...’ 미력한 눈과 손으로나마 살펴보고 만져보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밥을 먹을 때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꼭꼭 씹어 먹어...” 꼭꼭 씹어 먹는 아이를 보면, 귀엽기도 하고 야무져 보이기도 하고 참 좋습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 말씀도 꼭꼭 씹어서 먹는 것이 좋습니다. 꼭꼭 씹어 먹지 않고, 오늘은 이 말씀 내일은 저 말씀... 이렇게 필요에 따라 덤벙덤벙 말씀을 보면, 아무래도 그 말씀 안으로 잘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신 그런 설교에는 설교자의 생각이 많이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그 본문을 선택할 때 그 말씀을 어떻게 설교할지... 그 방향이 이미 설교자의 마음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요즘 경제가 안 좋으니 이번 주에는 이렇게 설교해야지... 요즘 아픈 분들이 많으니 이번 주에는 이렇게 설교하는 게 좋겠어... 이제 연말 연초가 되니 이번엔 이런 말씀이 필요한 것 같아...’ 그래서 그러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칫 설교자의 말씀을 듣는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본문을 정해 놓고 이렇게 조금씩 꼼꼼히 살펴보면, 그런 부작용을 줄이고 한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고민스럽고 막막할 때가 많고, 회중들도 계속 같은 말씀을 반복적으로 듣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이렇게 우리 교회가 오늘까지 이 딱딱하고 어려운 히브리서 말씀을 살펴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러분과 저는, 말씀을 꼭꼭 씹어먹는 착한 어린아이인 줄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잠깐 히브리서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히브리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천사란 현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소위 ‘엔젤’이 아닙니다. 그런 예쁘고 귀엽고 가벼운 ‘엔젤’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때론 하나님을 대리하는 무거운 천사입니다. 하나님을 대리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나의 수호신조차도 겁을 집어먹는... 그래서 그 천사가 나타났을 때 나의 시공간이 왜곡되고 주위가 온통 빛으로 가득한 그런 신적인 천사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그런 천사를 영적인 높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런 천사보다 뛰어나시다’라는 히브리서 말씀은 ‘예수님이 그런 천사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뜻의 대리자 혹은 전달자’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히브리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했습니다.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함께 절대적인 인물입니다. 모세는 곧 율법이고, 율법은 곧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런 모세를 ‘하나님의 집의 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요? 누구의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세 번째로 히브리서는 ‘새로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했습니다.
새로운 대제사장은 단지 새로운 대제사장 한 사람이 세워졌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대제사장은 새로운 율법을 말씀하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고, 새로운 성소에서, 새로운 제사를 드립니다.
그 새로운 제사는 3가지 점에서 특별한 새로운 제사입니다.
첫째, 그 새로운 제사는 하늘 성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그 제사는 짐승의 피로 드린 옛 제사와 비교할 수 없는 제사입니다.
둘째, 그 새로운 제사는 세상 끝에 드려지는 종말론적인 제사입니다.
셋째, 그 새로운 제사는 우리 죄를 사하시는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입니다.
첫 번째 내용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히브리서 기자가 이 내용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글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심혈을 기울여, 마지막 절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피로 드리는 이 제사는 우리가 히브리서 말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 제사는 사도 바울의 신학과 언어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복음서를 제외하고 십자가를 가장 많이 말씀한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사도 바울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드리는 제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와 제사가 중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 내용을 그저 단순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모형과 그림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늘에 들어가셨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와 말씀은 8장 앞부분에서 이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앞 본문에서는 새 언약과 중보자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러고보면 새언약과 중보자라는 말도 8장 중간에 이미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8장과 9장 말씀을 살펴보면, 여기에 교차대구 구조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차대구 구조는 글을 이런 순서로 쓰는 것이죠. A-B-C-C′-B′-A′
8장 앞부분 A는 하늘 성소와 지상 성소 그리고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8장 뒷부분 B는 새 언약과 중보자입니다. 9장 앞부분 C는 옛 성소입니다. 9장 중간 C′는 하늘 성소입니다. 9장 중간 B′는 다시 새 언약과 중보자입니다. 9장 뒷부분 A′는 다시 하늘 성소와 지상 성소 그리고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8장과 9장을 이런 구조 속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왜 말씀을 이런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 속에 쓸까요?
첫째는 귀한 말씀을 귀한 그릇에 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피로 드리는 이 제사는 히브리서 말씀의 절정입니다. 그 절정의 말씀을 밋밋하게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죠.
둘째는 귀한 말씀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 아무나 쓱 들여다볼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놀라운 영적인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참으로 성령께서 권고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심령을 위해 가려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호기심으로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이 구조에 막혀, 이 말씀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 말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이 구조를 발견하고 그 안에 감추인 말씀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자신의 말씀을 외인이 알아듣지 못할 비유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귀한 말씀을 위해 이런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 이 말씀을 귀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즉 그분의 죽음과 피로 드리는 놀라운 제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안에는 그 제사의 두 번째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끝에 나타난 종말론적인 제사라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지 아니하셨으니...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끝에 나타난 종말론적인 최후의 제사라는 사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의 제사가 없고, 더 이상의 사건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이와 같은 의미를 살펴보기 이전에, 우선 어떤 분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세상 끝에 나타났다는 오늘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적으로 무려 2,000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 당시도 종말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종말이고, 지금도 종말이라는 사실은 설명하기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일반 사람들은 이 내용을 불신하고, 교회 내 신자들도 종말이 오고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언제가 진짜 마지막 종말이고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지... 그 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종말에 대해 일관되게 말하는 영적인 진리는 예수님 이후로 종말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시작된 종말론입니다.
물론 성경은 늘 때가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속히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당장 내일 주님이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론이 아니고, 그때는 언제쯤이라는 시한부 종말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고, 그날은 무척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종말을 시간적으로 이해하는 실수는 초대교회 당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처음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곧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그날을 기다리며 뜨겁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세상도 세기말적인 모습을 보였고, 종말이 곧 올 것 같았습니다. 바울서신이나 마가복음은 그런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여, 그 말씀들 안에 임박한 종말론 사상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AD 72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후 나온 복음서나 신약성경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지연된 종말론을 말씀하고, 성취된 종말론을 말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때가 가깝다고 말씀하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산비탈에서 굴러진 돌은 빠르게 굴러가 마침내 땅에 닿고 맙니다. 그 비탈면이 얼마나 긴지, 그 굴러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그것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 돌은 반드시 땅에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화약에 연결한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불은 타들어가 마침내 폭발하고 맙니다. 그 심지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화약은 반드시 폭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가깝다는 말씀은 그런 하나님의 뜻의 온전하심과 그 성취의 확실성을 가리키는 영적인 시간 개념입니다.

그런 영적인 시간 개념이 오늘 말씀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이 세상 끝에 나타났다는 이 말씀은 물리적인 시간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시간 개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은 인류 최후의 사건입니다. 더 이상 어떠한 제사도 없고 어떤 영적인 사건도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계속되고 문명은 발전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영적인 발전이나 도덕적 발전도 이제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도 더 이상 없고, 새로운 인물도 더 이상 없고, 새로운 복음도 더 이상 없습니다.
자기를 재림 예수라고 하고 새로운 예언자라고 하고, 자기 말이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는 모든 말은 다 가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분의 피... 그것이 인류의 영적인 역사의 마지막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따라, 이 마지막 때를, 이렇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류 역사의 절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인류의 역사는 이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습니다. 문명은 발달하고 기술은 발달하고 과학은 발전하겠지만, 인류를 향한 말씀과 가르침과 도덕과 영적인 진리는 예수님에게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발전하는가? 인류는 발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그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가 계속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발전이나 인류의 발전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기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섣부른 정치가나 과학자들이 말하는 장밋빛 미래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류와 세상은 오직 의미 있는 영적인 진보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 믿는 자들과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심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인 방황이나 지적인 방황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속에서 뭔가 새로운 영적인 것을 계속 찾고자 합니다. 인도의 수행자들은 아직도 고된 수행을 하면서 뭔가 새로운 영감을 받으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과학 기술과 새로운 발견을 통해 새로운 인류의 진화를 꿈꿉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우리 인류에게 남은 오직 한 가지 사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일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역사의 절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하심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도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적인 양식을 공급 받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성령의 역사는 어떨까요? ... 네, 물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신앙을 새롭게 하는 보조적인 역사이지,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역사하심은 아닙니다.
한때 교회들 속에 성령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치유가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을 주도하는 분들은 그런 역사를 마치 새로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역사처럼 말했습니다. 그것을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너도나도 다 그런 열풍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령의 열풍은 이제 다 식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하심은 오직 우리에게 우리 주님의 생애와 말씀과 죽음과 부활을 되살리는 것이지, 전혀 새로운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새로운 인물도 없습니다. 기독교 일각에서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카리스마적인 누구를 따라다니는 일입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 이단 교주처럼 자기를 따르게 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훌륭한 분을 아끼고 존경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따라야 할 새로운 지도자나 예언자는 따로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지도자나 예언자를 주시는 일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혹되지 마시고, 우리가 따를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세상 끝에 나타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이제 차분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를 뚫고 들어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주 만물을 뚫고 들어오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주적인 나팔 소리가 울리고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그날을 감히 다 상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우리의 작은 믿음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먼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반드시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죽고, 세상은 종말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윤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번 살고 한 번 죽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우리는 모든 인생의 연극이 끝난 후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과 종말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죽음과 종말 이후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다시 만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기다림은 희망 없는 막연한 기다림은 아닙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이, 기독교는 막연히 언젠가 그분이 오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뜻과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지막 하나가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영광의 주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영광의 주님과 재림의 큰 날을, 우리 마음속 작은 믿음 안에 간직한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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