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
히 11:7~12
2024.03.17.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믿음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항상 믿음을 배울 수 있지만, 집중적으로 믿음을 배우는 데에는 히브리서 11장만큼 좋은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들은 말씀은 이와 같습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자 실체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내적 증거이자 외적 증거입니다.
-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 우리는 보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부터 왔습니다.
- 아벨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 에녹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습니다.
-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아벨과 에녹처럼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정당한 삯을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6절까지 믿음에 대해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 하나하나가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믿음에 대한 새로운 말씀이 시작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세 명의 인물을 소개하는데,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세 명의 인물을 통해 믿음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말씀합니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 이 세 사람은 각각 시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각자 삶의 자리도 많이 다릅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반면에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이긴 하지만 평범한 여인입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믿음의 큰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을 믿음으로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 사람의 믿음을 연속해서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내용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노아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이 말씀은 조금 복잡한 문장입니다. 여기엔 한 3가지 정도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했다 /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 그렇지만 노아는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감당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에서 노아의 믿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네, 노아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너는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칠하고,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홍수는 노아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홍수입니다. 노아는 그런 홍수를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알고, 보는 만큼 보고, 경험한 만큼 이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와 경험 안에 살고 그것을 쉽게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종종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고, 이 땅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따라가려면, 비록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노아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믿었을까요?
물론 노아도 땅의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이 열리는 40주 40야의 대홍수를 사전에 다 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대홍수를 환상으로 미리 보아서, 방주를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경외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아시리라 믿습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믿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항상 준비된 모습으로 서 있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노아는 평소 하나님을 그렇게 경외하였기에, 비록 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과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큰 뜻을 향해, 경외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는 믿음... 이것이 노아의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몰랐습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 12장 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그렇습니다. 보여줄 땅입니다. 그 땅은 그 말씀을 들을 당시, 미지의 땅이고 보이지 않는 땅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계획을 향해,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는 믿음...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미리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미리 알아서 안전한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지만, 미리 다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다 보여주시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그렇게 인도하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 우리를 자라게 하고 믿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지식과 힘으로 살지 않고, 겸손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이와 같은 믿음은 마지막으로 사라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사라는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습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년에 그녀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아브라함도 엎드려 웃었고, 사라도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과 이삭의 출생 사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 집의 모든 태를 닫으시고, 그가 사라를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사라의 마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요?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기에게 일어날 그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갈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과연 말씀하신 대로 아들을 주신다면, 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아들로,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뜻 가운데 올려드리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 길로 걸어가겠다는 사라의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라는 단순히 아들을 잉태해서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자신의 믿음의 결단 속에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명의 인물에게서 동일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 알고 다 보고 가는 것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같은 믿음을 여기서 말씀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믿음이 당시 로마교회의 고뇌하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자들은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앞에는 짙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두렵고 험한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반면에, 뒤에는 자신과 가족의 미래에 안전하고 쉽고 편한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문제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떠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구약의 하나님과 성전과 율법을 믿겠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약은 이제 예수님을 통한 구약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갈등하고 고뇌하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비록 보이지 않지만,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할까요?
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을 우리 삶에 잘 적용하기 위해, 성경의 동일한 사례를 좀 더 살펴보길 원합니다.
먼저는 리브가입니다. 리브가가 누구일까요? 네, 이삭의 아내입니다.
창세기에는 리브가에 대한 말씀이 24장 한 장 전체에 걸쳐 67절이나 되는 매우 긴 분량으로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실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기 종을 고향 땅으로 보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하며 그 종을 보내었습니다.
고향 땅에 도착한 그 종도 우물가에서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인도하시길 기대하며 표적을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표적은 자기에게뿐만 아니라 자기의 지친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아름다운 섬세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우물가에서 자기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그 종은 리브가의 집으로 가서, 그가 누구의 딸이며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알아보고 자기가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가운데 혼사는 잘 이야기되었습니다. 그 종은 은금 패물과 의복을 리브가에게 주었고, 그의 오빠들과 어머니에게도 귀한 물품을 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 종은 리브가와 함께 길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어제 처음 온 사람이 어제 혼인 이야기를 하고 오늘 떠난다는 것입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은 다 말렸습니다. 며칠 만이라도 더 있다가 떠나야지... 이렇게 갑자기 출발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하루라도 빨리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리브가의 가족들은 리브가를 불렀습니다. 그 아이가 가겠다고 하면 허락하고, 안 된다고 하면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를 불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리브가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네,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저는 오래 전 이 말씀을 읽을 때 이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자기가 결혼할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 이것은 무모한 용기인가 아니면 준비된 믿음의 용기인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성경이 무모한 용기를 말씀하거나 권장할 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리브가는 자신의 결혼과 관련하여 하나님 안에서 준비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퍼즐 맞추어지듯 맞추어지자, 비록 보이지 않지만 미지의 그 길을 걸어가기로 믿음의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그 종을 따라 떠났습니다. 리브가는 하란에서 가나안 땅 남쪽까지 오랜 여행을 했습니다. 마침내 리브가는 저물 때에 들판에서 생각에 잠겨 서성이던 이삭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리브가의 말과 행동과 결단의 모습 속에서, 우리도 동일한 믿음의 적용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고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일어날 때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리브가에 이어 살펴볼 인물은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자기 땅에 살러 온 유대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편이 일찍 죽어,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의 동생도 죽고 집안의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었습니다. 미신적으로 생각하면, 그 집안은 완전히 끝난 집안이었습니다.
그래도 룻은 시어머니가 좋은 분이어서 시어머니를 의지하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유대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너는 젊으니, 친정으로 돌아가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시어머니의 그 말은 자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동서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여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렇게 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한 룻의 말은 성경 안에서도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나오미는 할 수 없이 딸 같은 며느리 룻을 데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룻기는 그 내용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며, 룻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궁금합니다.
백번 천번 생각해도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남편도 없고 완전히 망한 집안에 아무것도 없는 시어머니 한 분만 계십니다. 더구나 지금 시어머니는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이 집안에서와 그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가운데, 룻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룻의 마음에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룻의 믿음이고 룻의 뜻이고 룻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룻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문을 열어주셨는지 우리는 룻기를 통해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룻의 자리에 나를 넣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약 룻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
비록 자주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보이지 않는 길을 앞두고 믿음의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신앙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내 삶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내 직업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을 시작하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잘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인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 달라고 할까요?, 무당을 찾아갈까요?, 법사를 찾아갈까요?, 전문가를 찾아갈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을까요?...

그러나 그런 우리를 향해 성경이 말씀하는 방향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의 결단을 하고 믿음으로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런 믿음의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충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충분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계획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단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뜻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뜻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뜻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언제나 형통하거나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울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뜻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인정해주십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모르는, 하나님과 나만의 믿음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감동 안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은 다 다르게 삽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 길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되는대로 삽니다. 아무 뜻이 없고, 아무 길도 없고, 아무 믿음도 없습니다. 살아온 어지러운 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영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잘 인도하십니다.

믿음의 결정과 믿음의 용기...
그런데 이것은 한 번의 우연한 결정과 한 번의 우연한 용기가 아닙니다.
그런 결정과 용기가 있기 위해선 평소 하나님 안에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순종으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사라도 소돔과 고모라와 아비멜렉 사건으로 준비되었습니다. 리브가와 룻도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다 중요한 순간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도 믿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믿음의 일상을 살아가고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어떤 큰 결정과 보이진 않는 길이 와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역사와 감동 속에, 언제나 믿음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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