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두루마리와 어린 양 2

믿음찬교회 0 156 2021.11.16 15:01
두루마리와 어린 양 2
계 5:1~14
2021.11.12.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등극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으신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담긴 유업의 책이었습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두루마리를 하나씩 펼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실행하시고 마침내 역사를 완성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자신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늘에서 엄청난 찬양과 경배가 울려 퍼졌습니다. 하늘 보좌의 모든 존재들과 우주의 전 존재들이 삼중적으로 찬양과 경배를 올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보좌에 등극하시는 이 일이 전 우주적인 대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이 환상을 보면서 그 광경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 보좌와 하늘 예배의 환상에 압도되었는데, 이 어마어마한 취임식 광경은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일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죠.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1~4)
바울은 자신이 하늘에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고, 자신의 이와 같은 환상과 계시가 지극히 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그저 일상적 경험을 한 것뿐인데 말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요한이 보는 환상은 그야말로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환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성경말씀은 우주적 대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취임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생각할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저는 무엇보다 한 가지 큰 영적 교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분의 주권입니다. 그 환상을 본 요한처럼,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주권에 대해 생각할 때, 늘 생각나는 한 분이 있습니다. 제가 간간이 말씀드리는 함석헌 선생입니다.
그분은 오래 전 한국기독교의 부패와 비성경적 모습에 환멸을 느껴 ‘내 기꺼이 기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했던 분입니다. 그것이 195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기독교는 요즘 와서 갑자기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절과 타협과 왜곡이 있었고 그때부터 많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벌써 그때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 기독교 주류와 선을 그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분은 여전히 진실한 신앙인이었지만,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기독교 밖으로 돌며 이런 저런 다양한 학문과 지식으로 신앙의 지평을 넓히고 박해 받는 신앙을 실천하였지만, 기성 교회는 그분을 그저 종교다원주의자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였던지 그분과 가까이 교제하던 장기려 박사도 함석헌 선생의 신앙 여정을 개인적으로 많이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것을 안 함석헌 선생이 어느 날 장기려 박사에게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내가 노자도 좋아하고 장자도 좋아하지만, 내가 믿는 내 주님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이지, 다른 이가 있겠어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장기려 박사님이 우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내 주님이라면 예수님 밖에 없다’는 함석헌 선생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주되심과 주권을 인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신앙과 사상에 있어서 기성 교회와 다른 견해를 일부 가지기도 했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일평생 참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정통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쓴 시 중에 ‘주님 찾아’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님 찾아 헤매는  이 벌판이 거칠어  내 벗은 발 상하여  자국마다 피오니
  주여 어서 오셔서  내 손 잡아 주시고  넘어지는 이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 
  주님 찾아 헤매는  이 세상이 사나와  내 약한 맘 부치어  숨결마다 꺼지니
  주여 어서 오셔서  내 손 잡아 주시고  넘어지는 이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
  저문 저녁 산골에  깃 찾는 새 다 가고  슬피 우는 시냇물  내 가는 길 같으니 
  주여 어서 오셔서  내 손 잡아 주시고  넘어지는 이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 ... 
여러분, 우리가 어떤 신앙을 정통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통 교회를 다니고 정통 신학을 따르고 정통 고백을 하고... 그러면 정통 신앙이 될까요? 네, 그런데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요소가 있죠.
그것은 우리 말과 삶으로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삶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정통 신앙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통 교회를 다니고 정통 신학을 배우고 정통 신앙고백을 해도... 예수님이 실제로 내 주님이라는 생각과 삶, 즉 그런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없으면 그건 정통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통 교회라고 자부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행하는 잘못된 모습들, 정통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들, 정통 신학을 가르친다고 하는 신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비리와 불법과 자리 다툼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봅니다. 그 모든 모습들 안에는 예수님이 내 주님이 이라는 정통 신앙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신앙을 스스로 정통이라고 믿고 자부하는 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다고 우리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정통 신앙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신앙이 정통 신앙이 되는 길은 우리가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인정하고 깊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정통 신앙이 됩니다.
구약 말씀 중에 참된 믿는 자의 삶을 간결하게 말한 중요한 말씀이 있죠. 우리가 잘 아는 미가서 6:8 말씀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정의롭지 못하고 정의를 모르고 정의에 무관심한 신자는 정통 신앙과 거리가 멉니다. 사랑이 없고 따뜻함이 없고 인정이 메마른 신자도 정통 신앙과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줄 모르는 신자도 정통 신앙과 거리가 멉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열심히 믿어도, 예수님이 내 주님이시라는 생각과 믿음이 없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모르는 사람은 정통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신앙이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고 주님을 내 주님으로 모시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해도 그 삶을 최선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정통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구원의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온 우주의 왕으로 좌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의 온 신앙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확실히 믿으시고 인정하십니까?
네, 그렇다면 아무쪼록 늘 그렇게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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