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칠병이어 기적의 의미

믿음찬교회 0 1,405 2021.09.07 11:45
칠병이어 기적의 의미
마 15:29~39
2021.09.05.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에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하시고, 그곳을 떠나 갈릴리 호수 근처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들에게 치유사역을 행하시고, 또 오병이어 사건과 동일한 칠병이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치유사역과 칠병이어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통 우리가 이 부분을 읽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또 치유사역을 행하셨나 보다’,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한번 더 행하셨나 보다...’ 대개 이렇게 생각하고 지나갑니다. 그것은 이 치유사역에 별다른 특징적인 말씀이 없고, 그저 불특정 다수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칠병이어 사건도 오병이어 사건 말씀과 별다른 차이가 없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떡의 개수와 먹은 사람의 수가 차이날 뿐, 상황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모습이나 이 모든 것들이 오병이어 사건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래서 오늘 본문이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성경은 지면을 낭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마태는 별다른 메시지나 특징이 없는 오늘 말씀을 굳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치유사역을 생략하더라도, 또 칠병이어 사건을 생략하더라도 마태복음의 흐름이나 진행에는 큰 영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합니다. 마태는 생략해도 될 이 내용들을 왜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뭔가 이상한 점 하나가 발견됩니다. 바로 33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이 제자들의 말이 참 이상합니다. 제자들이 앞서 있었던 오병이어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지금 어디서 떡을 구하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이럴 수는 없죠. 불과 몇 주 혹은 몇 개월 전의 그 특별한 사건을 이렇게 열두명이 다 까맣게 잊어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정말 오병이어 사건을 다 잊어버린 걸까요? 아니면 이것은 마태가 의도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이렇게 기록한 걸까요?
네, 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 칠병이어 사건을 오병이어 사건과 똑같이 말하기 위해 제자들의 모습도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마태는 이 칠병이어 사건과 오병이어 사건을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이 말하려 하는가?’입니다. 마태는 왜 이 두 사건을 똑같이 말할까요?
‘똑 같으니까 똑 같이 말하는 거 아닐까요?...’ 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똑 같으면 하나를 생략하는 게 더 낫죠. 생략 하지 않고 두 개를 다 말한다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비슷해보이는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을 굳이 다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어떤 힌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좀 전에는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고, 지금은 힌트 하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힌트는 웬만해선 발견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좀 전문적인 내용이죠.
그것은 바로 3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네, 이 말씀에서 힌트는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그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마태는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그것은 바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그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죠.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안에서 이 용어를 검색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혹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런 표현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이 용어 하나로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참고하면, 이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후 이동하신 동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막7:31) 
마태복음은 29절에서 그저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라고 말하지만,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시돈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내륙으로 들어와 갈릴리 호수 동쪽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데가볼리는 ‘데카 폴리스’ 즉 ‘10개의 도시’라는 말이고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 지도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을 두루 다니신 후 갈릴리 호수 동쪽 이방인 지역에 이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가복음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여기서 치유사역과 칠병이어를 행하신 이 사람들은 이방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제 우리는 마태가 오늘 본문의 치유사건과 칠병이어사건을 기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태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 사건에 이어서 이방인 치유사건과 이방인 칠병이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오병이어 사건 후에도 치유사건이 있었죠. 오병이어가 14:13~21에 있고, 치유사역은 14:34~36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행하신 오병이어 사역과 치유사역을 지금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재현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간 갈릴리에서 2년간 많은 말씀과 사역을 하셨지만,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유대 성전당국도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녀의 떡은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집니다. 이것이 칠병이어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이란 이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거절하면 복음은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에 복음은 이제 이방인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흘러가는 복음 앞에 이제 선민이란 따로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선민이 아닙니다. 그러면 선민은 사라진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제 새로운 선민이란 누구인가? 네, 그리스도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태생적 민족적 선민 개념은 이제 복음과 함께 폐지 되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제 그 사람은 선민이 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지금 마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실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의 복음과 은총은 한 가나안 여자에게 흘러가고 또 이방인들에게 흘러가고... 그들은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치유를 받고 떡을 먹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는 오늘 우리의 많은 교회들이 구약적인 정서과 구약적 선민의식을 일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방식이 구약적입니다. 하나님의 복에 대한 이해가 구약적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해도 구약적입니다. 목사님들의 모습도 어쩐지 구약의 제사장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신자들의 모습도 어쩐지 제단 앞에서 제사드리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면 백성들은 그저 그 앞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죠. 한국교회는 이런 구약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말씀이지만, 교회를 구약적인 모습으로 만들면 편하기는 편합니다. 누가 편할까요? 네, 목사님들이 편합니다. 이끌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바뀌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공동체의 모습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가급적 그런 모습을 벗고 바울서신등이 말씀하는 좋은 신약적인 모델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도 한 분 한 분이 성숙하고 자발성을 가지고 권위는 있지만 계급은 없는 그런 귀한 교회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의 많은 교회들이 아직 구약 신앙을 많이 갖고 있는데, 그래서 일종의 그런 구약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해 이미 구원받은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구원의 확신과는 좀 다릅니다. 
‘나는 수십년간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고, 그래서 나는 예정되어 있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주로 그렇게 확신을 갖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만큼 구원의 확신이 확고한 신자들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구원 받는다... 추호의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신실한 삶은 없지만 자기 구원을 너무도 확신하는... 이런 매우 불균형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어떤 일회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과 백성에게 인치신다는 말씀이 있죠? 그 말씀을 실제로 그렇게 일회적으로 선택받고 도장 받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일회적으로 태생적으로 민족적으로 과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구약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씀하는 택함 받은 선민이란 그런 일회적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고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현재적이고 지속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예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이란 한 개인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신다는 개인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선택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공동체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정이란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신실히 이루어가시기 위해 우리를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을 혹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개인선택론이나 결정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의 길을 예정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원은 길을 걷는 것이고 우리의 새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처럼 구약적 선민 의식을 가지지 마시고, 주님과 복음의 은총 안에 늘 걸어가고 자라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구원을 과거적인 의미로만 알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총체적인 것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당연히 우리는 지금 현재의 구원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그 구원의 삶을 살고 있느냐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복음의 은총을 내 안에 간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여러분, 복음의 은총은 내 안에 머무르고 간직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에 무관심하고 등한히 여기면, 복음은 오늘 말씀처럼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율법만 남고 메마르게 되겠죠. 
복음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이해하고 간직하고 그것으로 살지 않으면, 복음은 떠나게 됩니다. 우리 삶은 복음을 간직하든지, 복음을 잃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복음을 잃으면 우리는 메마른 심령이 되고 세상을 따라가게 됩니다.
딱딱하고 메마른 심령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지 못합니다. 회개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내가 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죄가 내 삶을 살고 돈이 내 삶을 살고 세상이 내 삶을 삽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죽어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친척 어른 한 분을 전도하려고 한 일이 있습니다. 연세가 많으셨는데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간을 내어 찾아갔습니다. 사촌형님의 양해를 얻고 그 어른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큰 어머님... 제가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예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면 구원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른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말씀하시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싸늘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분은 몸이 쇠약하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복음을 거부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그분 말고도 그런 눈빛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영적인 복음을 받을 수 없고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영적인 일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말씀과 생명을 감사하면서 최선으로 복음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른 이는 없습니다. 무지개도 없고 파랑새도 없습니다. 유토피아도 없고 파라다이스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만이 우리를 소망으로 인도하십니다. 노래는 노래로 끝나고, 철학은 철학으로 끝나고, 종교는 종교로 끝나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삶을 줍니다. 
복음으로 우리는 더 풍성한 삶을 삽니다. 더 자유로운 삶을 삽니다. 비록 나의 작은 삶이라 할지라도 더 의미있고 충실하게 만들어줍니다. 살아가는 방향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그 은총과 구원을 베풀어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2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갈릴리 구석구석을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오병이어로 해결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내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그분의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성전당국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온 세상으로 흘러가야 했기에,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그 말씀과 치유와 떡을 이방인들에게 베푸셨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복음이 필연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칠병이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선물인 이 복음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이 복음을 간직하시고 소유하시고 이 복된 능력으로 충만해지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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