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요한계시록의 구조 1

믿음찬교회 0 253 2021.08.03 14:16
요한계시록의 구조 1
계 1:19
2021.07.30.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오랜 난제였습니다. 성경연구에 있어서 이보다 더 어려운 난제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직까지 잘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는 그 구조에 대해 많은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아직 주된 견해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메시지는 한 마디로, 종말의 시대와 세상 속에 변하지 않는 신실한 신앙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내용을 고도의 구조 속에 담아 굉장히 깊은 빛으로 우리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얼마나 치밀한지, 아직까지 잘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사람도 깊으면 한 번에 파악이 잘 안 되죠. 하나님도 깊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마치 아름다운 보석이 여러 빛을 내는 것처럼 파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잡하고 어려운 책일수록 그 내용과 메시지를 알기 위해서는 책의 문학적 구조를 그래도 파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 내용과 메시지를 잘못 해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단을 포함하여 요한계시록을 자의적으로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낮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해 깊이 있게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그런 분들은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말씀이 시간 순서로 기록되었는가, 아니면 주제 순서로 기록되었는가, 아니면 그 둘이 혼합되었는가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난제이자 고민거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비록 복잡하긴 하지만 잘 구성된 구조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견해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말씀이 시간 순서로 차례대로 기록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4장 이후의 내용이 하늘 보좌와 어린양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여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으로 진행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천년왕국과 최후의 심판으로 쭉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단순히 그런 시간적인 직선 구조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그와 같은 시간적인 직선 구조, 즉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보시는 분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1:19 말씀을 유독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1:19 말씀에 자신들이 주장하는 요한계시록의 구조와 관련,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3가지를 말하고 있죠. 즉 네가 본 것, 지금 있는 일, 장차 될 일... 원어로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라폰 운 하 에이데스 카이 하 에이신 카이 하 멜레이 게네스다이 메타 타우타” (여기서 이 단어들을 설명드리면 ‘그라폰’은 기록하라, ‘운’은 그러므로, ‘하 에이데스’는 네가 본 것, ‘카이’는 그리고, ‘하 에이신’은 지금 있는 것, ‘하 멜레이 게네스다이’는 되려고 하는 것, ‘메타 타우타’는 이후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어를 보더라도 이렇게 관계대명사인 ‘하’에 의해 3가지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이 내용으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보고자 하는 견해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시는 분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3가지 시간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고, 그래서 과거에서 미래로 쭉 진행한다. 과거인 ‘네가 본 것’은 요한이 방금 본 예수님에 대한 환상이다. 그리고 현재인 ‘지금 있는 일’은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곱 교회에 대한 2~3장의 말씀이다. 그리고 미래인 ‘장차(이후에) 될 일’은 4장 이후의 내용으로 최후의 종말에 일어날 미래의 일이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데, 특히 그 이유 중 하나는 1:19과 4:1에 동일하게 ‘이후에’라는 말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보시는 분들은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4장 이후의 내용을 최후 종말에 일어날 전적인 미래의 일로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을 문자적 미래주의 해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대주의 해석입니다. 상당수 한국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대해 이와 같은 문자적 미래주의적 해석과 세대주의 해석을 가장 기본적인 표준 해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을 최후 종말의 전적인 미래로 보는 것은 이 말씀의 가치와 의미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최후 종말의 일이므로 지금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지금이 적어도 그런 최후의 혼란이 일어나는 종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거나 필요하기보다는 그날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에, 지금은 다만 그날에 대비하는 용도로만 이해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의 의미는 대폭 감소되고,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오늘 우리에게 잘 설교되지 않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자적 미래주의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잘 설교되지 않게 하는 정도의 부작용만 초래하지 않습니다.
더 큰 부작용은 이런 해석이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지금 어둡게 하는 동시에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종말의 시간표로 전락시켜 신자들을 불안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 신앙을 종말론에 치우친 불건전한 신앙이 되게 합니다. 또 나아가 이런 식의 해석이 이단들의 자의적인 해석을 조장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1:19 말씀을 다시 한번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 말씀이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하는지,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시간 순서대로 차례로 기록된 것이지, 또 4장 이후는 최후 종말의 그날에 일어날 미래의 말씀이기만 한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1:19 말씀을 얼핏 보면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하는 말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1) 요한계시록 내용 자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현재라고 하는 2~3장에도 미래의 내용이 나오고 미래라고 하는 4장 이후에도 명백한 과거사건(12장 용과 해산하는 여인)이 나옵니다.
2) 4장 이후를 최후 종말의 미래라고 하면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은 1세기 성도들과 아무 상관없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일차적으로 1세기 성도들에게 주어졌던 말씀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3) 1장과 2~3장을 과거와 현재로 구분하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요한은 지금 자기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계속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1:19 말씀에 나오는 두 번의 ‘카이’는 헬라어 문법으로 볼 때 A and B and C가 아니라, A = B and C 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1:19은 “네가 본 것, 즉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2의 ‘자기가 본 것’과 1:11의 ‘네가 보는 것’을 요한이 받은 계시 전체로 이해한다면 1:19의 ‘네가 본 것’ 역시 요한이 받은 계시 전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19의 두 번의 ‘카이’를 A = B and C 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아집니다.
5) 아마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1:19의 ‘장차 될 일’ 즉 ‘이후에 될 일’이라고 한 표현은 다니엘서 2:28,29,45의 ‘후일에 될 일(장래 일)’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다니엘은 그 종말론적인 일(하나님 나라의 도래)이 먼 후일에 실현될 것으로 보았지만, 요한은 그 일이 지금 자신의 당대에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보았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니엘서를 인용하면서 그 ‘후일에(에피 에스카톤)’ 라는 표현을 ‘이후에(메타 타우타)’ 라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 바꾼 ‘이후에’라는 표현은 현재를 포함한 미래 개념, 즉 시작된 종말 개념입니다. 요한의 믿음과 사상 안에는 이와 같은 종말의 시간 개념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1:19에서 요한이 ‘이후에 될 일’이라고 한 것은 전적인 미래가 아닌, 시작된 미래 즉 시작된 종말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1:19의 ‘이후에 될 일’을 최후 종말의 미래로만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상의 설명이 조금 복잡하였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면 간단합니다.
1:19을 근거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기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분을 바탕으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적인 순서로 진행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이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 내용을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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