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화 있을진저

믿음찬교회 0 153 2022.05.04 14:52
화 있을진저
마 23:13,15,16,23,25,27,29
2022.05.01.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22장 마지막 부분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22장 마지막 부분은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예수님과 헤롯 당원, 또 예수님과 사두개인 사이의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가지 논쟁이 남았죠. 바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입니다. 한 바리새인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 이 질문이 중요할까요? 율법은 모세오경 전체이고 매우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율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여러 법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체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고 그다음 중요한 것이 있고 또 그다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체계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법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 중요한 법이 있고, 그렇게 해서 맨 마지막에는 시행세칙이나 부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일반 법이나 공부가 필요하고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법의 중요도를 구분하고 그 중요도에 따라 적용하고... 법을 마구잡이로 시행해서는 안 되죠.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가장 중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당시 권위 있는 랍비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 서기관과 제사장들 사이에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기관은 이런 큰 문제를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그 서기관은 당연히 예수님이 제대로 대답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이 시골 선생이 모세오경과 율법 전체를 이해하고 제대로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도 분명하고 간단하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둘째 계명도 그와 같은데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무도 그렇게 명확하게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탁월한 대답에 더 이상 논쟁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도전받으셨던 세 번의 논쟁을 모두 완벽하게 이기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예수님께서 오히려 그들을 향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사야서에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칭한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그분이 어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것은 그들의 성경 지식을 넘는 내용이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들과의 논쟁에서 방어와 공격 모든 면에서 그들을 압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와 같은 예수님의 논쟁 승리를 바탕으로 23장 내용이 시작됩니다. 마태는 23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도전을 물리치신 후 그들에게 하신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와 심판의 말씀은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23장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앞부분인 1~12절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뒷부분인 13~36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직접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7번의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매우 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23장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오늘은 이 말씀의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말씀을 먼저 전체적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때로 우리는 작은 것을 보다가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죠.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체를 놓쳐버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신랄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 기억에 제 평생에 오늘 본문에 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하기 썩 좋은 본문이 아니죠. 설교는 모름지기 은혜로워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일반적인 설교 본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교독했던 신명기 말씀도 그렇습니다. 신명기의 복에 대한 말씀은 은혜롭지만, 저주에 대한 말씀은 은혜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 말씀은 교독문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균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만 듣지 말고, 쓴 말씀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넘기지 말고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파격적인 입성이 있었고, 물의를 일으킨 성전 정화가 있었고, 그런 성전 정화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권위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은 3가지 비유로 대답하셨고, 그러자 그들은 조직적으로 예수님을 향해 3가지 논쟁으로 도전했습니다. 여러분, 이 일련의 일들이 다 무엇일까요?
네, 지금 예수님과 성전 권력자 사이에 큰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본연의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율법만 붙들고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새로운 본연의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면서 결국 신앙개혁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율법을 붙들면서 결국 종교 권력과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성전 권력자들 사이에 큰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결은 무서운 대결이고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대결입니다.
그러나 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필연적입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신앙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불사하고 그들의 잘못된 모습과 잘못된 가르침을 그것도 예루살렘과 성전 한가운데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시며 이 싸움을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싸움의 성격입니다.
이 대결은 그와 같은 영적인 대결이고 진리의 대결이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대결입니다. 그들은 지금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을 가진 자들이고, 그런 그들의 잘못된 점을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일은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대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형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그런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국가와 권력에 반기를 든 정치범들을 사형시키는 처형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영적인 의미에서 바라보아야 하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만,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돌아가신 이유는 예수님이 개혁가이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한 개혁가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 또 진보와 보수 사이에 항상 갈등과 대결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 그런 첨예한 대결이 뉴스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와 신자도 이 둘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그런 대결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현재 많은 교회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 신앙을 보수이자 우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당수 교회들이 물러나는 문재인 정부를 싫어하고 새로 들어서는 윤석열 정부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부활절 연합 예배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참석한 윤 당선자에게 많은 찬사와 축사가 있었죠.
이런 사정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수주의라고 믿는 신자들은 개혁에 대해 편견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연중 그것을 소위 진보나 좌파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 성향을 떠나서, 개혁 자체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보더라도, 분명 개혁가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개혁과 사람의 개혁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개혁은 완전할 수 없고 많은 문제가 있고 실수가 있고 자기 이해관계가 있고... 그래서 아마도 개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바로 그런 점을 보시는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는 세상을 개혁한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악하고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무조건 보수주의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개혁가이시고, 우리도 개혁교회이고 프로테스탄트이고, 우리는 잘못된 것에 항의하고 세상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개혁가이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의 잘못된 것을 말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바꾸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개혁가이신데 어떤 개혁가이신가? 네, 예수님은 좌와 우로 개혁하시는 분이 아니라, 위와 아래로 개혁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좌편에 서서 우편을 개혁하신 분도 아니고, 우편에 서서 좌편을 개혁하신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패하고 잘못되고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있던 위를 개혁하신 분이십니다.
성전 권력자들, 율법 권력자들, 종교 기득권자들... 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고 랍비라 칭함을 받고 무거운 짐과 의무를 사람들에게 지우되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천국 문을 닫아서, 자신들도 못 들어가고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개혁하셔야 할까요? 안 하셔야 할까요? 네,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그 부패하고 잘못된 위를 뚫어야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개혁의 그런 성격과 방향성은 사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늘 말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금요기도회 시간에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계 12장 말씀을 보았는데, 드디어 악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이 드라콘이라고 하는 용은 악의 실체인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사탄의 역사는 대부분 자신의 짐승과 음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사탄의 사주를 받는 짐승과 음녀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상 나라와 세상 권력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돈이 있고 권력이 있고 자신들만의 영역이 있고 사탄의 그림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주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력과 세상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언젠가 충돌합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와 신자들을 박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와 같은 사탄과 세상 나라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완전히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개혁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 나라와 악한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을 향한 개혁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과 같이, 그들을 향해 혹독한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개혁가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을 바꾸고 잘못된 것에 저항하고 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세상의 위에 있는 악한 것에 맞서 개혁하고자 하는 개혁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개인 신앙에만 머물러선 안 되죠. 예수 믿고 복 받고 천국 가는 작은 신앙에만 머물러선 안 됩니다. 우리는 내 삶에서 또 내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 일만 하고 교회만 다니고 그리고 그저 천국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통령도 선택하고 국회의원도 선택하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문제의 잘못이 어디에 있고 누구에게 있는지 판단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 우리 한국교회는 독재 정부 시절 민주주의를 위한 시국기도회 한번 제대로 열지 못했습니다. 소수의 깨어있는 믿는 분들이 악한 세상 권력을 향해 그런 일을 했다가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우리 믿는 자들을 그렇게 개인 구원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답답한 사람들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세상 전체를 보셨고, 시대를 보셨고, 권력자들을 보셨고, 그들의 악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무시하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도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만 잡던 어부들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새로운 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 받고 구원 받고 천국 가는 작은 신앙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세상 현실을 보고 세상 나라를 보고 세상 권력의 악한 모습을 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뜻으로 그 잘못된 모습을 분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가운데 현실 정치를 지지할 것은 지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을 따라, 세상 권력과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에 대해 늘 주의해야 합니다. 사탄이 그들 배후에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 우리나라 정치 현실도 여야나 좌우의 문제가 아닙니다. 권력자들과 일반시민 사이의 문제이고 기득권자들과 일반 백성 사이의 문제입니다. 즉 위와 아래의 문제입니다. 이 위와 아래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도 당연히 계속 흘러온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개혁하고 백성을 조금 더 위해주려고 했던 많은 개혁가들이 비참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역사와 현실과 성경을 잘 알아서, 세상 나라와 권력과 악한 현실을 비판하고 분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우리는 그것을 바르게 개혁하는 편에 늘 서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악하고 잘못된 성전 권력에 맞서시는 개혁가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치이고 우리의 정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예수님을 따라서, 사탄이 이용하는 세상 나라와 악한 권력을 분별하고 대적하는 참된 개혁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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