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나님을 모르는 사두개인들

믿음찬교회 0 263 2022.04.26 17:27
하나님을 모르는 사두개인들
마 22:29~33
2022.04.24

‘부활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아주 어려운 부활 문제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일곱 형제의 아내였던 사람이 부활 시에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예수를 백성들 앞에서 조롱하고 못 믿을 선생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으로 부활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질문을 넘어 자신들의 문제를 정확히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동일한 일이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께 할 말이 많고 불평이 많고 그래서 따지듯이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이것은 너무합니다, 이것은 부당합니다...’
‘하나님~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됩니다.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는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데 왜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는 늘 아프고 건강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께 따지듯이 논쟁하듯이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그 거친 기도와 질문을 넘어 우리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해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000야~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너의 문제는 그것이 아냐, 너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혹 사두개인들과 같이 질문하거나 기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 시에 누가 그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인지... 그런 신학적인 문제를 지금 고민할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네, 이것은 너희는 그분의 능력을 잘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는 그분을 잘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두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네, 사두개인들은 대부분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 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가장 잘 모르는 맹인인 것입니다.
요세푸스라는 유대 역사가는 사두개인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책에 기초한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을 이 땅의 현실과 떨어져 초월해 계신 분으로 이해한다. 그들이 보기에 이 땅에 신적인 영역은 없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인간은 죽으면 스올이라고 하는 음부로 내려가고, 부활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고 심판도 없고 보상도 없다...”
네, 사두개인들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부활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모세오경을 읽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삶에 역사하신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긴 하지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런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인도하고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두개인들과 같은 생각과 믿음을 가진 일부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에 우리는 그런 유형의 믿음을 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이신론은 이성 신론의 줄임말입니다.
이성 신론이란 하나님과 성경을 내 이성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고 이성을 통해 보고, 이성에 맞지 않는 부활이나 기적이나 재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은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시긴 계시지만, 그분은 저 멀리 홀로 계시고,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거나 함께 하시거나 역사하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신론적인 신앙인에게 있어 내 삶은 전적으로 내 삶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 혹은 하나님이 관여하시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과 현대의 이신론자들은 서로 매우 닮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은 사두개인들의 모습과 믿음을 이렇게 분석하고 살펴하는 것이 왜 필요할까요?
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잃어가고 그래서 이런 믿음이나 생각이 교회 안에 알게 모르게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실상 믿지 않고, 예수님을 말하지만 예수님을 사실상 믿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지만, 자기 삶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습니다.
무엇을 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 길로 가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그런 신앙적인 마인드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입니다. 나는 나대로 삽니다. 내 이익을 따라 내 생각을 따라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교제나 관계는 거의 없습니다. 기도도 무엇을 구하는 기도 위주이지, 기도 속에 하나님과 통하고 오고 가는 것은 없습니다. 한 마디로 내 생활 속에 하나님의 뜻과 손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누구입니까? 네, 나는 이 시대의 사두개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두개인들을 보면서, 우리 신앙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혹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너는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왜 사두개인들이 만들어졌을까요? 그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런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그들 말대로 모세오경만 봐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오경 안에는 비록 부활이란 말은 없지만,
그러나 모세오경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활의 의미와 산자의 하나님이 분명히 있습니다. 모세오경 안에는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고 우리를 생생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그런 생각과 신앙과 삶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들이 세상과 현실 속에서 그런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러면서 역사와 현실 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율법과 규례 안에 스스로 갇혀버렸습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하고 그저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천국 가는 수단으로만 이해하고 우리 삶과 현실 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비록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다녀도 사두개인 같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세속화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속화된 그리스도인... 성경은 그런 사람을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으로 말할까요?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사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그저 교회 바깥에 있는 일반 세상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렇게 행하는 사람을 말하고, 그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들이 성령과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고 끝내 그런 열매를 맺는다면, 너는 그 사람에게서 돌아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로 세워진 디모데에게 그렇게 권면했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그런 안목으로 목회를 하면 교회는 참된 신자가 많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교회는 그것을 목회자 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그렇게 해야 합니다. 
 
누구든 교회를 다니면 기본적으로 경건의 모양은 다 갖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삶을 실제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능력은 모양으로 따라할 수 없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며 정직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행동과 언어와 생각까지 그렇게 경건할 때 우리는 경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들은 지금까지 좋은 교회의 모델을 만들고, 좋은 신앙의 모델을 만들었는가? ... 한국교회는 약 1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130년 믿었다면 하나님도 알고 성경도 잘 알아야 하겠죠.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잘 알면 좋은 교회가 무엇인지, 좋은 신앙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무엇이 좋은 신앙인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정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큰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그저 잘 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항상 신앙 유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기도의 열풍이 불고, 어떤 때에는 성령의 열풍이 불고, 어떤 때에는 비전의 열풍이 불고, 어떤 때에는 긍정의 힘의 열풍이 풀고... 교회는 유행을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걸까요?
목사님들 가운데에는 소위 카리스마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성령의 각종 능력과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과 축복의 능력... 그런 것들을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위에서 카리스마적으로 사역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카리스마적인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꼼짝 못 하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좋아하는 모세도 카리스마적이지 않고 온유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지 않고,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영적인 모습은 한편으론 바리새인이고 한편으론 사두개인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바리새인처럼 형식화되고, 사두개인처럼 세속화된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여 내 바라나니 서재에서 자유를 노래하지 말라
      형제여 내 바라나니 학교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라
      형제여 내 바라나니 교회에서 예수를 찾지 말라
      형제여 내 바라나니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
‘교회에서 예수를 찾지 말라’니... 이 시를 지은 분은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세속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나 우리나 다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고, 비록 느리지만 만들어지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속을 씻어내는 일이 멈추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두개인이 될 위험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두개인 같은 신자, 세속화된 신자, 하나님을 모르는 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요? 여러 말씀을 나눌 수 있지만, 2가지 내용만 실천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는 내 삶을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살고 있든,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 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살든 못 살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힘들고 만족스럽지 않아도, 그 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삶이 멋지고 훌륭하고 뛰어나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처럼 자신의 제국과 자기가 이룬 모든 것들을 보며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단 4:30~32)
그러므로 여러분, 잘 살든 못 살든, 근사하든 근사하지 못하든,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시대의 사두개인과 세속화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는 돈에 있어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세속화시키는 가장 주된 사탄의 도구입니다. 돈에 깨끗하고 정직하면 우리는 많은 죄를 피할 수 있고,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속화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돈을 섬기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 앞에서는 하나님도 없고 진실도 없고 양심도 없고 수시로 타협합니다. 우리에게 만약 돈이 가장 최고라면 우리는 세속화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언제나 돈은 권력과 불의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직하고 깨끗한 부자가 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잘 살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중요하고, 일부러 가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 이상으로 또 잘못된 방법으로 돈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속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해야 할 영적인 모델입니다. 특히 사두개인은 세속화된 신앙을 보여주는 영적인 모델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사두개인을 따라가지 않으시길 빕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껍데기만 남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참된 신앙과 경건을 가진 좋은 신앙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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